최영숙의 문학서재






오늘:
0
어제:
0
전체:
43,548

이달의 작가

유쾌한 꾸지람

2013.02.06 08:59

최영숙 조회 수:495 추천:144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 앞에 서 있을 때였다.

주차장으로 차를 가지러 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날씨가 제법 추웠다. 마침 불어 온 바람을 피해 몸을 돌리자, 건물 주위에 죽 늘어 서있는 형광 색 교통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차량에게서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놓은 표지판이었는데, 그곳에는 “슬로우”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교우들이 연신 들락거리는 교회 문 앞에 머쓱하게 서있던 나는, 어린이가 깃발을 들고 있는 모양의 표지판을 향해 슬며시 다가갔다.

손을 들어 표지판 녀석의 빨간 모자를 한 번 쓰다듬어 보고,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빨간 깃발을 툭툭 쳐보다가는 아무런 생각 없이 깃대를 잡아서 천천히 뽑아 올렸다. 흐음, 생각보다 쉽게 빠지네. 뽑은 깃발을 두어 번 흔들어 본 다음 제 자리에 다시 꽂아놓는 순간이었다.
  
“돈 타칫!”
어느 새 왔는지 바로 코앞에 너 댓살짜리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는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이는 두 발을 모으고 서서 다시 한 번 내게 소리쳤다.
“도온 타치잇!”
“아! 미안!”
사태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얼른 사과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깃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아래로 내가 지나가는 거야!”
아이는 깃발 아래로 머리를 숙이면서 천천히, 보란 듯이 지나갔다. 아이의 머리통에 닿은 깃발이 찰랑 흔들렸다. 아이가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이는 “슬로우”라는 말을 깃발 아래로 천천히 지나가라는 표시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다른 표지판 아래를 또 그렇게 신중하게 통과해 갔다.

아이는 주일학교 교재를 옆에 끼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걷다가 놀이터를 돌아보기도 하고, 앞서가는 친구들을 큰소리로 부르기도 하면서 교육관 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찬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머릿속이 씻겨 나간 듯이 시원하고 후련해졌다.  짜아식, 그제야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에 숙제를 딱 한 번 안 해갔는데, 하필 그날 걸려서 출석부로 머리를 맞은 적이 있다. 그 후로는 학교 숙제이건 맡겨진 일이건, 약속한 일이건, 마치고,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다. 머리통을 맞으면서 느꼈던 수치와 후회를 평생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가 다가왔다. 남편이 차에 올라타는 나를 향해 물었다.
“왜 웃어?”
“오늘 나, 제대로 혼났어요. 간만에 진실을 만났네. 기분이야, 점심 살게.”  
  
  언제부터인가 잘못을 지적당하거나 꾸지람을 들은 기억이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위의 사람들이 말조심을 한다. 뭔가 분명히 오해가 있거나 실수를 한 모양인데도 뒤에서 수군거릴지언정 앞에서는 말해 주지 않는다.

서로 기분 좋은 말로 띄워주고 맘에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가며 한다. 예쁘지 않은데 예쁘다고 말하고, 맛없는데 맛있다고 한다. 싱겁고 재미없는 말에도 웃는 척한다. 반갑지 않으면서도 반색을 한다.

듣지 않으면서도 듣는 척하고, 찌푸리고 있다가도 남들 앞에서는 웃는다. 전보다 늙은 게 확실해 보이는 데도 젊어 보인다 하고, 얼굴이 퉁퉁 부어서 갑갑해 보이는데 살짝 눈웃음을 치며 보톡스가 필요 없네, 하고 비위를 맞춘다.

인간은 영적 유기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로 이야기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잘못을 지적당해도 진심이 담겨있다면 가슴에 와 닿게 마련이다.

어린 아이에게 꾸지람을 들은 일은 면구스러웠지만, 그 아이의 지적은 결국 내 양심의 허물어진 한 부분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어디에서고 형광 색 표지판을 보게 되면 아이의 목소리를 떠 올리게 될 것이고, 녀석의 동그랗게 뜬 눈을 기억할 것이다.

슬며시 범하는 잘못에 대해서도 양심의 빨간 깃발이 찰랑찰랑 흔들리게 될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에 대해서, 그들의 직설적인 순진함과 도덕에 대한 예민함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나의 불순과 잘못에 대한 무감각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짯짯하던 눈길을 떠 올리며, 죄에 대해 무심하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에 대해서도 가슴앓이를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