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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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착한 아이 서약서

2013.02.07 03:35

최영숙 조회 수:511 추천:144

   딸 아이 집에서 냉장고를 열다가 문짝에 붙어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이게 뭐야? 프라미스?”
종이에는 “더 이상 외식 안하기, 더 이상 장난감 안 사기, 밥 먹기 전에 간식 안 먹기”라고 쓰여 있고
“학교 가기 전에 텔레비전 안보기”는 옵션이라고 했다.

 다섯 살, 일곱 살짜리 손자 두 녀석이 그 내용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비뚤비뚤 영어로, 한국어로 크게 쓰고, 또 지렁이 모양의 서명을 그 아래에 그려 넣은 다음, 맨 아래쪽에는 딸 부부가 증인과 파트너 서명을 해 놓았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딸집에 들어섰을 때, 두 아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었다. 학교 갈 준비는 커녕 잠옷 바람으로 천연덕스럽게 앉아서 만화 시리즈 “아더”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딸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른 돌아서야만 했다.

맞벌이 부부인 딸의 자녀 교육에 대한 고충이 한 눈에 보이는 서약서를 보면서, 나는 중학시절, 내가 동생들과 약속을 하고 벽에 붙여 놓았던 “선행 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에 나는 이미 여섯 명의 동생을 가진 큰 언니였다. 그 중에 다섯이 여동생이고 끝으로 남동생이 하나있는데, 바로 아랫동생과 언니 사이에는 항상 티격태격 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다. 콩나물 사러 가는 일은 거의 네, 다섯째가 맡고 청소와 빨래는 나와 셋째 사이에서 어머니를 돕기 마련이었지만 이런 일들의 담당이 자주 얼크러져서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한창 사춘기였던 나는, 아침 일찍 부스스한 몰골로 콩나물, 두부를 사러 가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 게다가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던 나는 빨래 차례도 수시로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여행을 가거나 편찮게 되면 이런 일이 피할 수 없이 맏이인 내 앞으로 한꺼번에 닥쳐 올 때가 있었다.

아무튼 서로 간에 불만이 쌓였다가 다들 왜 나만 시키느냐고 어머니한테 대드는 일이 생겼고, 때가 차면 위아래 질서가 깨지면서 급기야는 소리를 지르고 다투게 마련이었다.  

  개인 공간이 거의 없던 형제자매 공동체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였다. 그래서 맺어진 평화 조약이 “선행 표”라는 것이었다. 이름과 날짜를 적어놓고, 착하게 별일 없이 하루를 잘 지내면 동그라미, 다투거나 화를 내면 가위표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 평화 조약이 효험이 있어서 정말 그림같이, 달콤하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부모님이 행복한 얼굴로 방안에서 평화롭게 바글거리는 당신의 자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선행 표를 고안해 낸 나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엄마 아버지께 표를 가리키며 착한 아이 일등이 누군가를 말해주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난 어느 날, 평화 조약은 깨지고, 방안에서는 다시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선행 표에는 사정없이 빨간 색으로 가위표가 죽죽 그려지고, 나쁜 아이 일등이 된 동생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평화 조약을 깨버린 나쁜 동생에게 등을 돌렸고, 실망이 큰 나머지 아예 말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 날, 눈물범벅이 된 동생은 자신을 나쁜 아이로 만든 선행 표를 와락 뜯어버렸다. 그 후에 선행 표를 뜯어내는 일에 대한 벌점을 강화해서 여러 번 다시 시도해봤지만, 다른 동생은 물론 역시 나에게도 같은 일이 발생하는 바람에 할 수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15)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또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는 대조적인 말씀이 있다.

자녀 교육이 어려운 것은, 이 중간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지혜와 분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아무리 서약서를 써 봐도, 선행 표를 만들어서 상을 주어 봐도, 아이들에게는 고쳐지지 않는 성품이 있다. 자라는 과정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고, 유전적인 성품이거나 후천적으로 주어 진 환경 탓일 수도 있다. 자녀교육에 대한 책을 읽고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 해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채찍과 꾸지람이 어느 때, 어떻게 필요한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일이고, 지금과 앞으로의 힘든 세대를 살아가야 할 어린 것들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할 일이 어떤 것인지, 우리 앞에 숙제로 남아있는 이 일들을 알기 위해 오로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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