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

2017.09.06 11:04

정용진 조회 수:22

가을이 오는 소리

20131031()/한국일보

                                                              정용진 시인

 

10월에 접어 들면서   포플러 나무들이 유난히   보이고 바람을 모아 오는 소리가 맑게 들리기 시작한다. 

 봄의  소식이 남쪽에서 바닷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것에 비하여 가을의 엽신(葉信)들은 하늘이 가까운 높은 산으로 부터 붉고 누렇게 물들기 시작하여 시내가 흐르고 숲이 우거진 마을로 내려와 벚나무북나무, 옻나무, 그리고 감나무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다

  시인 두자미(杜子美) 산행(山行)이란 시에서   정경을 시로 읊어서리를 맞은 단풍은 2월이 꽃보다 붉다’(霜葉勝於 二月紅花)라고 하였다조석으로 청량한 바람이 불면서 부터 더위와 흙먼지가  낮은 구름이 자리를 피하고 어두운 산그늘이 말끔히 걷히어  개인  산의 신선미가 흐르듯 한여름 멀리 섰던 산들이 집주위로 다가와 둘러선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 보다도 먼저 싱그러운 가을을 영접하게 된다우아하고 산뜻한 봄의 정취, 무성하고 강인하며 선이 굵은 여름의 풍만,  속에 덮여서 새로운 생명의 꿈을 잉태하는 겨울의 인내와 고적에 비하면, 가을은 만고풍상 갖은 여정을 보내고 조용히 황혼을 맞이하는 노인처럼 은은히 풍겨나는 덕의 향기와 원숙한 열매를 대하는 포만감과 낙엽의 구수한 내음에 취하는 멀고 깊은 여유가 있다

 봄의  내음의 정경이 여인의 계절에 비유되는데 비하여 가을의 타는 듯 붉은 단풍과, 터질 듯 알알이 영근 백과들은 남성의 계절에 견준다

 봄은 조그마한 소망이 아름답고 조용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꿈의 계절임에 반하여, 가을은 먼 길을 떠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사립문 앞을 청결히 하며, 동구  고목나무 밑을 딩구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묻고 허무를 노래하며 죽음을 생각하는 애상의 계절이기도 하다어린 시절 시냇가에서 낙엽을 헤치고 돌을 들춰 가재와 게를 잡아내던 추억들과 추석이 되면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시골 간이역에 내릴 ,  마을 사람들이 둥근 달빛을 밟고  줄지어 늘어서서 외지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을 기다리며  깊은  모르고 기뻐하던 모습들이 나이가 들수록 되살아나는 것은, 추억의 깊은 상념들이 영근 알곡처럼 뇌리에 알알이 들어와 박힌 까닭이리라

 가을 계곡엔 기인 여름의 따가운 더위를 견뎌낸 인내와, 지루한 장마 속에서 풀벌레들의 짜증을 들어  여유와, 맺힌 열매를 성숙시키기 위하여 힘겹게 늘어진 가지를 버티고  나무들의 강인한 의지가 엉켜있음을 본다보는 이도 별로 없고 가꾸는 손길도 없는 외진 산록을 지나다 윤택하게 익은 산과를 대하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다른 한편으론 왠지 안쓰럽고 가엾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청량한 가을바람이 가슴을 향하여 조용히 흘러들면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말없이 성숙하는 과일들을 대할 ,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와, 신의 위대한 섭리와, 이들을 바라보고 감사할  아는 인간임을 기쁘게 생각하게 된다

 산을 떠나 거리로 접어들면, 지조를 버리고 명성을 찾아  잃은 개처럼 헤매며, 나올  못나올  가릴  없이 얼굴을 나타내면서 상황에 따라 편리하고 약삭빠르게 변신하는 인간들의 삶이, 무언의 섭리 속에 조용히 길들여질  아는 자연에 비하면 너무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근래에 와서는 이일  일로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많은 이들을 만나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으면 무엇보다도 보람되고 가슴이 흐뭇하여야  터인데 어디인지 답답하고 우울한 생각이 엄습해 오는 것은 가을이 주는 계절적 우수의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지닌 생각만이 우국의 길이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만이 민주와 통일에 일가견이 있다고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수신이나 제가도 못한 처지에 치국 운운하는 우를 범하는 위인은 아닌가. 강자 앞에는 비굴하게 기어들고, 약자들은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지는 아니하는지 마음 깊이 생각해 봐야할  가을이다. 알곡을 가득히 싣고 가는 수레는 소리가 없고  수레만이 요란한 것이 가을 거리의 정경이다

자연은 인생의 위대한 스승이다. 계절은 우리의 훌륭한 안내자다. 이를 통하여 껍질뿐이고 부족한 우리 인간들이 윤기가 흐르고 원숙하게 성장하는  가을이 되기를 거듭 다짐하고 싶다

 나는 위대한 남일  없다. 나는 부족하고 작고 보잘 것 없어도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탈된 삶의 길에서 정돈된 삶의 괴도로 접어드는  가을이 되도록 힘쓰자가을 바람은 가볍지만 가을의 열매는 무겁고, 가을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은 얇지만  하늘은 깊고 푸르다

머 언 길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어 모으고, 밖에서 방황하던 삶의 모습들을 안을 향하여 채우며, 내실을 다지는 평화의 계절이 가을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평화를 안겨주기는 어렵다. 나의 헛점을 가리려는 위선과 악을 선으로 나타내려는 위장된 거짓의 마음이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중후무언(重厚無言) 계절,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때에 조국에선 남북한  형제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민주와 통일의 좋은 소식이 무르익는  가을이 되기를 바라고, 해외 동포들은 개척의  길이 열매와 성으로 연결 되는  가을 이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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