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시학(詩學) 3-정용진 시인

 

미당(未堂서정주(徐廷柱)시인은 1915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숱한 사연을 뿌리면서 한국 서정시의 토대를 구축한 명인이다그의 서정성에 흠뻑 빠지다 보면 친일, 독재찬양 등 흠과 티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그를  잊어하는 것은 그의 독창적인 서정성에 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워 부른 길마재의 노래를 들어보자

길마재의 노래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제, 질마제, 고향 질마제

 

소나무 바람 소리 피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음

 

지붕위에 바가지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하늘에 푸르릴리요. <서정주

 

 금년 가을에는 그의 명작 국화 옆에서 기리는 무명의 시인이 길마재를 1 송이의 황국으로 덮어서 화제다. 미당은 저승에서도 국화주를 들며 기뻐하겠다

 

 편운(片雲조병화(趙炳華시인은 1921 경기 안성에서 태어나 일본 고등사범에서 수학하였고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살다갔다. 그는 3천여 편의 시를 남기고 2003 3 어머님의 심부름을 왔다 어머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으로 꿈의 고향이란 시를 새겼다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의 심부름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 왔습니다. <조병화

 

  시를 남기고 한 조각 구름으로 다시 어머님께 돌아갔다

 

천상병(千祥炳시인은 1930 태어나서 고교학년  처녀  강물 등단했다

 

귀천(歸天)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잡고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박정희 독재가 칼날을 세우고 무소불위 날뛰던 어두움의 시절 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말로 형언할  없는 고문을 당하고 침묵을 하다가 그날은 내놓았다

 

이젠   이었는가

아이론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이었는가

무서운   창가에 여름 곤충  마리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천상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들면 어떻게 가느냐고 묻는 시인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당하고 아이도 낳을  없다  , 그가  손으로  세상을 떠나던 그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의금으로 모인 3 만원을  곳이 없어서 쩔쩔매던 장모가 아궁이에 넣어둔 것을 모르고 연탄불을 넣어 태워버리고 빈손으로 떠난 천상병 시인은 여비가 없어서 어떻게 저승에 갔을까? 인간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더니  수가 없는 신비의 세계일 뿐이다

 

경허 스님 열반송

1912425,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64, 법랍(法臘)56세였습니다.

 시적(示寂) 그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써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이 있습니다.

 

心月孤圓光呑萬像 光境俱忘復是何物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스님과 혜월(慧月)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습니다

 

 

6) 근세들의 유시

근세 작고하신 분들의 유언과 유시들을 여기에 옮겨 놓는다.

 

숭산(崇山) 스님은 20041130일 입적하셨다.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유수)니라 ,

다 걱정하지 마라, 아주 먼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萬古)  부처나 보살의 지혜의 빛은(光明),    본래의 모습 그대로여서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靑山流水. 고요하면 대지와 허공이 사라지고움직이면 그 모습 드러낸다 보고 듣는 모든것이 그러하여 .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대로의 모습들,    있는 그대로가 경이로움이니 .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순간)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되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순간의 지속성) ,. 알고 모르는것 일시에 사라져 일체의 차별 없으며도 아니요 도 아니면서 공,과 유 다 아우르고해탈이다 열반이다 이름 없고 그 대상 없음이요  . , "" ""이다 벽 허물어져나와 남을 묶었던 결박 동시에 풀어진다 . 사라지고 나타남이 걸림이 없어때로는 이름없는 들풀과 이야기 하며 쌀 한톨에서도 검게 그을린 농부의 모습을 본다    존재 하는 모든것 들과 한 몸인데어느것을 취하고 버릴것이 있는가  .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크거나 작은것작은 티끌부터 허공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에 두루 통하여. "평등" 하고 "평등하다 ,지혜의 빛은 자연스러운 몸짓을 하니 . 그것을 "자비" 라 할뿐, 불은 뜨겁고 물은 흐르듯이 성품이 본래 그러하다. 있는 그대로가 정각(正覺)임을 자각(自覺) 하는것 누구나 다 갖추고 있되차돌속에 불이 있으나 치지 않는다  . 다 걱정하지 마라, 이 지혜의 빛,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는 그대로 여서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 간다" .   오로지 정진, 또 정진만 할것이라 . 고요하고() 사라짐이() 둘이 아니어서 적멸(寂滅)이며보고 듣는 일체의 것은 생멸(生滅)이다 . 숨고(사라지고), 나타남이 걸림이 없어 은현무애(隱顯無碍)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여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적멸과 생멸을 다 아우르니, 적멸 밖에 생멸 따로 없고, 생멸 밖에 적멸 따로 없다 적멸은 생멸의 본체요 생멸은 적멸의 작용이니,본체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지고. 작용은 본체로 말미암아 생기느니"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다 걱정하지 마라,생멸(生滅)과 적멸(寂滅), 원적(圓寂) 이로다,"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

 

 설송(雪松) 스님은 수원 일광사에서 법화경(묘법연화경)을 깨친 뒤 대한불교 불승종(佛乘宗)을 창종(創宗)했고 종주가 되어 1980년대에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신리에 현불사를 세웠다. 09517일 현불사에서 91세를 일기로 입적해했다. 그는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될 것을 예언하여 많은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현대판 무학대사로 숭앙을 받았다. 그는 열반송으로 아래와 같은 법문을 남겼다.

 

내왕과거 지재몽(來往過去 只在夢)

인생도시 여화개(人生都是 如花介)

 

오고간 날들이 다만 꿈이로다.

산다는 건 모두 꽃 피고 짐 같다.“ <雪松 宗主>

 

함석헌옹의 자필 이력서를 본다. 1901313일생, 평북용천다사도 출생, 종교 퀘이커, 취미 화초, 자녀 25, 학력 평양고보중퇴·정주 오산학교 졸·동경사범문과 =. 경력 속에 조국수호 국민회의 대표위원·민주 수호위 대표위원을 길게 적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아호가 바보새인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함옹은 바보새 옆에 알바트로스라는 영문까지 적어 놓았다. 이 새는 바다에 살면서도 고기를 잡아먹을 줄 모른다. 하늘을 어슬렁어슬렁 날고 있다가 갈매기가 먹다 놓친 고기를 주워 먹는다. 중국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산다고 이 새를 신천옹이라고도 했다.작고한 장준하씨(사상계 사장)가 소개한 함옹의 별명도 있다. 평북 오산학교 재직시절 학생들은 함 선생을 함 도깨비라고 불렀다. 모르는 것 없이 신출귀몰한다는 뜻이다.

그는 남한은 북한보고 괴뢰라 하고 북한은 남한보고 괴뢰라 하면 바다 건너가 보면 두 놈 다 괴뢰지 하였다가 자유당 시절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살기도 하였다. 명저로 뜻으로 본 한국역사. 죽을 때 까지 이 걸음으로 등 다수가 있다.

장준하씨가 반독재 투쟁으로 인하여 투옥 되었을 때 함 옹은 감옥을 방문하여 준하는 바쁘니 내 놓고 내가 대신 들어가 앉지 하셔 세인들을 놀라게 하신 일도 있었다.

 

장준하(張俊河, 1918 827 ~ 1975 817)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 쓰가다 부대에 자원 입대[1][2] 하여 1944 1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되었으나 그해 7 장쑤 성 쑤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군 중앙군 준위가 되었다. 1945 쓰촨 성의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 2부터 한국 광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45 11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18 827 평북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로교 목사이던 장석인(張錫仁)과 김경문(金京文)5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형이 요절한 관계로 사실상의 장남이 되었으므로, 할아버지 장윤희(張潤熙)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이후 동생으로 장익하, 장명하(張明河)와 장창하(張昌河), 여동생 장영하(張英河) 등이 태어났다. 할아버지 장윤희는 일찍 개명한 개화 인사로서,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장로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한학에 밝아, 중국어 구사를 할 수 있었으며, 한의사와 한학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고향 의주에 양성학교(陽成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윤희는 상투를 틀지 않았다 하며 과거를 보기 위해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며, 신학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어, 가족까지 전도하여 기독교 가정을 이룩했다. 이후 깊은 신앙심으로 아들을 개신교 목사로 길러냈으며, 이는 아들 장석인과 손자 장준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개신교 장로파 집안이었지만 후에 아내가 된 김희숙을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고 루수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다.

아버지 장석인은 지식인으로 기독교 학교인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6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장로교 목사안수를 받았고, 숭실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았던 아버지 장석인은 숭실학교 교목 외에도 후에 원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5] 와 연희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6], 그리고 감천중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내의 가정교회)[7] 등에서 담임목사로, 장로교신학대학의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포천 약사봉에서 추락사 하였는데 죽여서 던졌다 하기도하고 떠 밀어 죽였다 하는 설도 있었다.

 

안병욱 교수(安秉煜, 1920626~ 2013107)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안병욱 전 흥사단 이사장이 향년 93세를 일기로 2013107일 오전 별세했다.192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암울한 냉전 시대 속에서 수많은 저술과 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간성 상실과 가치관 혼란 등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이바지했다.1960년대에는 월간 '사상계' 주간을 맡아 자유 언론 투쟁에도 앞장섰다.고인은 1985년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받았고, '현대사상''행복의 미학', '도산사상' 후회 없이 살아라. 5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선생님께서는 1982년 여름 로스엔젤레스 동쪽 온타리오에서 농장을 경영할 때 내 우거에서 하루 밤을 함께 지내시며 행복해 하셨다.

그는 내 첫 수필집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 ’서문에 성실의 모잘 쓰고, 정직의 허리띠를 두르고, 근면의 신발을 신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앞길에 맑은 빛이 항상 비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고 축복해 주셨다.

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대통령은 아래와 같은 유서를 남기고 그가 태어난 경남 김해시 봉하 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추락하여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09. 523일 오전 521)

 

민주주의를 완성하라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이다.

싸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고

하늘에서 감히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젠가는 온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하면

빨리 오고,

외면하면 늦게 온다.

 

나는 이기는 길이 무엇인지,

또 지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오른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요즘에 잘 때 내 아내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 민주주의와 민생 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잠을 잔다.

정치, 경제, 남북관계에 위기가 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10년 민주정부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급해졌다. 기가 막히다.

 

반드시 지는 길이 있다.

탄압을 해도 무섭다귀찮다‘ ’내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행동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고 망한다.

모든 사람이 나쁜 정치를 거부하면 나쁜 정치는 망한다.

보고만 있고 눈치만 살피면 악이 승리한다.

 

폭력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해도 결과가 나쁘다.

인도의 간디는 영국과 싸울 때 비폭력 투쟁으로 했다.

투쟁해야 하지만 폭력투쟁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투쟁을 안 하는 것이 났다.

 

간디는 집회에 나갔다가도 폭력을 쓰면 돌아왔다.

폭력을 쓰면 다수가 모이지 못하고 그 자체로서 도덕성이 없다.

영국이 인도 총독부를 통해 소금을 비싸게 팔자

그것에 반대해 해안가로 가서 직접 소금을 구어 자급자족하자

영국이 굴복했다.

 

이렇게 민심이 돌아가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비폭력으로 성공해 미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폭력을 쓰면 더 큰 폭력을 유발한다.

그 책임은 폭력을 쓴 사람이 지게 된다.

자기들 폭력은 적당히 넘기고

우리 쪽 폭력을 쓴 사람이 모두 뒤집어쓰게 된다.

그래서 폭력은 순리의 길도 아니고 계산상으로도 맞지 않다.

 

모두가 어떤 형태든 자기 위치에서 행동해서 악에 저항하면 이긴다.

적당히 하면 진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투쟁에는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비폭력 투쟁을 해야 한다.

많은 국민들을 동원하되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때리면 맞고 잡아가면 끌려가고,

여기저기서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최근 보수에서 중도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궁여지책으로 그런 것이다.

백성의 힘은 무한하고, 진 일이 없다.

저항하지 않고 굴복하면 안 된다.

농노들이 5-600년 동안 노예로 살았지만

노동자들은 2-300년 만에 정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이 각성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남북관계는 대화가 시작 될 것이다.

확고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민족끼리 절대 전쟁해선 안 된다는 것을 굳게 지켜야 한다.

정부와 여당 내에서 위험한 소리가 있는데

조상과 후손에 대해 죄를 짓는 일이다.

각별한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2009625일에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 30여명과 오찬을 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김 전 대통령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참석자들도 함께 울었고 그 후 입원한 후 서거하여 유언으로 남았다. 09.8.18일 서거 823일 국장. 국립 현충원 안장.>

 

상여소리

 

너와! 너허!

너와 넝차 너허와!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북망산천 멀다더니 내집 앞이 북망일세

가네 가네 나는 가네 북망산천 나는가네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돌아가네

이제가면 언제 오나 기약 없는 길이구나

이제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을 알려주오

 

너와! 너허!

너와 넝차 너허와!

 

잘있으오 잘사시오 모두모두 잘있으오

사랑하는 내 가족들 부디부디 잘있으오

천년만년 살자 약속 부질없는 꿈이었네

살아생전 많은 친구 어느 누가 동무될까

일가친척 많다 해도 어느 누가 대신할까

극락세계 좋다지만 이승보다 좋을손가

 

너와! 너허

너와 넝차 너와!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때 서편제 국악가수 오정해가 불렀음>“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무소유의 고귀한 삶 법정스님.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 <法頂스님>

 

그는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버렸다.

다비준비위 대변인 진화 스님은 “10일 밤 법정 스님이 모든 분께 감사한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했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군에서 태어나 전남대 상과대 3년을 수료한 뒤 22세 때인 1954년 경남 통영시 미래사에서 효봉(曉峰)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59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戒師) 계를 주는 스님)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경남 합천군 해인사, 경남 하동군 쌍계사, 송광사 등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송광사 수련원장 등종단 소임을 몇 차례 맡았을 뿐 수행자로서 본분에 충실했다. 19942003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회주(會主모임이나법회를 이끄는 사람)19972003년 서울 길상사 회주를 지냈다.

이 분이 머물던 곳 중 대표적인 장소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머물었던 송광사 불일암이다. 스님은 강원도 평창 모처로 옮기기 전까지 '무소유(1976)'등 많은 저서를  이곳에서 저서를 집필했다.

스님께서는 입적 하시기전 내가 입적 하여도 사리도 줍지마라. 헌 옷을 입혀라. 비석도 세우지말고 내 책들은 다시 펴내지 마라. 당부하셨다.

그는 무소유, 서있는 사람들, 버리고 떠나기, 산에는 꽃이 피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여라, 아름다운 마무리, 법문집, 일기일회는 주옥같은 30여편의 저서를 남겼다.

 

2010 313

송광사에서 봉행된 법정스님의 다비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객 25천여명(경찰 추산)이 운집했지만 단 1건의 안전사고도 없이 무사히 마무리됐다. 순천경찰서는 지원 인원 등을 포함해 모두 200여명의 경찰력을 송광사 주변 도로와 진입로 입구 다비장 등에 집중 배치해 교통통제와 안내, 안전사고를 포함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크게 긴장했으나 모든 행사가 무사히 종료되자 안도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 보자" 절벽 비탈도 '감수' 법정스님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려는 추모객들은 경사가 70도에 가까운 산비탈을 오르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송광사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3배를 한 스님의 법구를 따라 산속 깊은 다비장 까지 함께 올라온 추모객만 수천명. 30분간 산길을 걸었던 대규모 추모 행렬은 준비된 원형의 다비장이 협소해 보이자 다비장을 둘러싸고 있는 급경사의 산비탈을 올라타기 시작했다. 비탈 경사가 70도에 가까웠지만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까지도 "스님의 마지막길을 보고 싶다"며 나무와 풀에 의지해 위험천만한 비탈로 발걸음을 내디뎠다.다비장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싸게 된 추모객들은 서 있기조차 불편한 상황에서도 거화(炬火) 의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나무와 함께 법구가 활활 타오르자 추모객은 "!"하며 탄성을 내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큰 스님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 화창한 봄 날씨..스님 가시는 길 큰 부조

다비식이 봉행되는 13일 기상이 전형적인 화창한 봄 날씨를 보이자 추모객들은 날씨가 큰스님 마지막 가는 길에 큰 부조를 했다고 반겼다.이는 최근 지역의 날씨가 비나 눈이 오고 강풍이 부는 등 악천후가 수일 째 계속되다 지난 10일부터 개기 시작, 큰스님 입적일과 다비식이 봉행되는 이틀 동안은 쾌청한 날씨를 보였다.추모객들은 "사찰과 다비장이 산 속에 있어 길도 먼 데다 날씨까지 궂었다면 추모객들이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스님을 입적을 맞이하여 추모시를 올렸다.

 

<추모시>

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

秀峯 鄭用眞 拜

極樂世界 蓮花臺

往生의 축복을 누리시고

법정스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세속의 온갖 번뇌

아득히 잊으시고

一切衆生 皆苦

무거운 인생의 짐을

다 내려놓으시고

天上天下 唯我獨尊

황금빛 미소로

고요히 웃으시는

부처님의 품안에서

涅槃에 드시고

法悅을 들으시다

다시 幻生 하소서.

 

사리도 줍지 마라.

헌옷을 입혀라

비석도 세우지 말고

내 책들은 다시 펴내지 마라.

 

스님 불 들어갑니다.

뜨거워요 어서 나오세요

중생들의 오열 속에

 

無所有

빈 맘 빈손으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훌훌히 떠나가신 스님.

 

合掌하노니

無爲寂靜

寂滅의 세계에서

부디 極樂往生하소서.

 

피카소의 말처럼 인생은 짧지만 참되고 아름답게  살기에는 길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신 지관(智冠) 스님은 많은 불경 원서를 해역본(解譯本)으로 남기셨는데 그가 총무원장 직을 마치고 떠나실 때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내릴 정거장이 되어서 내리는 것뿐이다.” 담담하게 말씀하셔 인품의 무거우심을 단적으로 나타내신 분이다.

입적하실 때 임종게로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 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 팔십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를 남기고 합천 해인사에서 다비장(茶毘葬)을 끝으로 적멸에 드셨다.

 

7맺는 

철인 크라테스는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바로 사는 것이 문제다라고 역설하였다. 적어도 자신이 당당한 한민족이라면 이런 선인들의 유시와 유언을 접하면서 가슴에 찔리는바가 없었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는 지상에  한번 주어진 생이 세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빌어 말한 아래의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한가?  형상과 동작은 얼마나 명확하고 훌륭한가? 행동은 천사와 같고 이해력은 신과 같다.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다 

 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신곡 연옥편에서 단테가 설파한 생의 고난에 대한 격려를 살펴보자

 

 산을 오르려는   기슭에서  고난을 당할지나 오름에 따라 고난은 덜하리라. 너의 고난은 이제 차츰 즐거움이 되고 머지  않아 극히 오르기 쉬우며 쪽배로 빠른 강을 내려가듯 하리라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격려와 사랑과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고나면 이해득실을 가늠하면서 엇박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를 향하여 영원 불별의 유시를 남겨주고 있다.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거부하고 방황하다 그에 잡힌바 되어 죽도록 충성한  그가 떠날 때가 되었을  고백한 천추만대의  유언이다

 

나는 이제 이 논문을 끝내려한다. 그런데 우리 민족 현대사에서 전두환 정권시 5.18 민주항쟁의 비극을 잊을 수 가 없다. 그 당시 상황을 살아남은 자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너무나 처절하고 절절하게 읊은 시인의 노래가 있다.

바로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이시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

 

광주의 십자가와 부활을 노래함 -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 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은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을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김준태·시인)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비화 공개   80년 광주의 오월을 생생하게 표현한 김준태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시의 탄생 비화가 공개됐다. 이 시는, 당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취재한 전남 매일신문 편집국 기자들에 의해 극적으로 세상에 얼굴을 알렸다.

임영상(48·한국리더십개발원 연구위원)씨가 펴낸 부끄러운 탈출(푸른 미디어)에 따르면, 당시 전남매일신문(석간)198061일 신용호 편집국장 주재로 회의를 갖고, 다음날(2) 1면에 5.18을 표현할 수 있는 시를 싣기로 결정 했다.

전남매일신문은 2일 오전 편집회의에서 문순태 부국장이 추천한 모 시인의 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참석자 대부분의의견은 '내용은 좋으나 너무 밋밋하고 5.18 참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의견에 동의하며 다른 시인을 찾았다.

문 부국장이 두 번째로 추천한 시인이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이다.

김준태 시인은 오전 9시경 연락을 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기 시작한지 1시간 여, 광주의 아픔과 살육의 현장을 처절하게 표현한 '아아, 광주여! !'109행 장문의 시가 되어 태어났다.

김 시인이 시를 편집국에 전달하자, 신용호 국장과 김원욱 사회부장을 비롯한 편집국간부들은 "바로 이것이다. 5.18을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다"며 흡족해 했다.      하지만 계엄당국의 검열을 통과하기엔 시가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어서 계엄당국의 사전검열 통과와 신문 게재 이후 발생될 수 있는 사태가 우려됐다 .

하지만 김원욱 사회부장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김 부장은 "많은 시민들이 죽은 마당에 시 하나 싣는 게 뭐가 문제냐"면서게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마침내 편집회의는 시를 게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하지만 계엄군의 사전검열에 시 전문은 게재되지 못하고 33행으로 줄어버렸다.

이날 오후 신문이 시내에 배포됐다. 전남매일신문은 평소와는 달리 10만 부를 인쇄했다. 이 신문은 전남·북은 물론, 보급망을 통해 서울 등 수도권과 부산 대구 대전 등의 주요 기관에 배포됐다.

전남매일신문은 이렇게 광주의 참상을 알렸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국보위의 언론통폐합에 따라 폐간됐고, 김원욱 부장과 김준태 선생도 두달여 후 해직됐다.

김준태 시인은 "그 시는 내가 쓴 시가 아니었다. 시를 쓸 때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 내 몸 속에 들어와 신들린 듯 단숨에 써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편 '고교생 시민군의 5.18회상기'라는 부제를 단 부끄러운 탈출은 당시 서석고 3학년이었던 임영상 씨가 최초로시위에 가담했던 1980521일부터 계엄군이 도청진압작전을 펼친 27일 새벽까지의 과정을 지휘부가 아닌 이름 없는 시민군의입장에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딤후:7-8) < 사도 바울

 

*참고문헌 

이기문 역대시조선 황병국 한국 명인시선

김삿갓시집 황현 매천집

정휴  적멸의 즐거움 정휴 죽어서 시가 되는 삶이 있습니다

한국의 인간상(신구문화사)

 

정용진(鄭用眞) 詩人의 약력

(yong chin chong)

39. 경기 여주출생(아호 秀峯)

1971 년 도미. 지평선 시인동인

미주한국문인협회협 이사장. 회장 역임.

한국 크리스챤 시인협회. 민족문학 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행문회 회원.

Pen USA.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Poets VIP회원.

미주문학상. 한국 크리스챤문학상 대상.

Outstanding Achievement Award.(07.08)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Poetry)수상.

The Best Poems & Poets (05.07) 선정됨.(미국. 국제시협)

시집 : 강마을. 장미 밭에서. 빈 가슴은 고요로 채워두고. 금강산.

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한영). 설중매. (미래문화사)

에세이 :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 시인과 농부.

문예창작교본 : 시는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

샌디에고에서 에덴농장 경영. 샌디에고 문장교실 운영.

정용진(鄭用眞- Yong Chin Chong)

9109 Huntley Rd. Fallbrook, Ca 92028 U. S. A.

(760)723-7673(H) (760)799-2888(C)

E-mail yongchin.c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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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덕전 불로그에서 현재 1,300만 명이 들어와 읽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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