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 고마운 사람

2016.03.13 17:05

최미자 조회 수:332

지구는 말없이 돌고 돌건만 사람들은 새해니 묵은해이니 말을 붙인다. 우리 가족이 꽤 오래 떨어져 살았는데, 다시 함께 모였다. 고국으로 한국역사를 배우려고 역 유학을 갔던 딸이 과년한 나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내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 탓이었다. 좁은 집에 복닥거리니 조금 불편하고 때론 말로 찍고 받고 짜증내지만 사람 사는 것 같아 재미있다. 날마다 태평양을 건너야 했던 걱정하나 덜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 탓일까.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한해를 돌아보았다. 지난해 받았던 카드 상자를 열어 다시 읽으며 날마다 조금씩 새해 안부 인사말을 펜으로 쓰면서 12월을 보냈다. , 받는 사람이 답장을 쓰는 번거로움을 줄이려고 이메일과 전화로 새해인사를 보낼 분들은 제외했건만 그래도 40여 통의 카드를 마무리 했다.

미국 아니 서양에는 정말 좋은 풍습이 있다. 작은 선물을 받거나 도움을 받으면 즉각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탱큐 카드를 쓴다. 또 년 말에는 새해인사 카드를 쓴다. 요즈음은 분주하거나 젊은 사람들은 가족사진을 찍어 엽서로 만들어 이름만 달랑 써서 보내오는 것들도 많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가 없어서인지 받는 나도 별로 느낌이 오지 않는다. 반면 카드의 지면이 부족해 따로 종이 한 장 가득히 한해의 소식을 타자로 쳐서 보내오는 분도 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지내 온 안부를 적어 보내는 사람도 나처럼 행복하겠지만, 그런 카드를 받는 사람의 기쁨은 두 배인 것 같다. 오늘 나는 약 십여 년 전에 로스앤젤러스에서 만났던 문우이자 나의 글 사랑 친구 유경애씨가 보낸 카드를 받았다. 아마도 그녀는 분주한 12월을 보내고 새해에 책상 앞에 앉아 카드를 준비한 모양이다. 그녀가 프로 화가로 변신하여 그린 이탈리아 시골 투스카니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붙여서 만든 새해 카드다. 게다가 지난해 온 가족이 멕시코 칸 쿤에 여행가서 샀다는 게 모양의 귀여운 액세서리가 나를 또 놀라게 한다.

세 번째 나의 책을 선물했을 때는 손수 털실로 짠 양말 덧버선을 보내와 겨울이면 여태 따뜻하게 신고 있는데, 한참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녀의 고운 마음에 그리움 담아 조지아 주(Georgia)로 날아간다. 오래전 해변문학제 행사 때도 시미벨리의 자기 집에서 하루 밤 쉬고 다음날 떠나라며 초청해주던 분이었다. 같은 또래의 흔한 여인들의 시샘이나 질투가 전혀 없이 나의 글 펜이라며 다가온 그녀는 알고 보니 대학에서도 문학전공이었지만 무척 겸손하고 순수했다.

샌디에고 우리 집에도 부부가 찾아 오셨지만 저녁식사만 하고 시댁 어른들 뵈러 가야 한다며 떠나셨기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었다. 그 후 건강이 나빠 걱정했었는데, 가족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행복한 화가로 살고 있는 그녀가 보내오는 사랑은 나에게 매우 특별하다. 여러해 전에는 조지아 주의 불타는 가을을 그린 풍경카드를 보내며 놀러 오라고 초청해주었는데, 난 방문을 아직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행복해하는 우리는 분명히 서로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그리운 사람이자 고마운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은 나쁜 기억은 잊어버려라 또는 말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나는 모두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좋아한다. 그 때 그 때 일어나는 고통스러움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성숙해지고 싶어서일까. 때론 괴로움과 고통을 통해서 어리석은 마음을 돌아보며 한 줄기의 통쾌한 지혜를 깨우치는 기쁨도 있지 않은가.

 

긴 세월을 살다보면 불만보다는 크고 작은 은혜를 입은 시간들이 더 많아 감사함이 절로 우러나는 요즈음이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당장 물질적으로 갚지 못할지라도 이런 마음이 공기를 타고 진동하여 멀리멀리 전달해지기를 기원해 본다. 우리의 삶은 직접으로 또는 간접으로 돌고 돌아가는 윤회의 삶인 것 같아서다. 현재의 착한 삶으로 조금은 비껴갈 수는 있지만, 선과 악이 만나야 하는 필연적인 운명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어린 시절부터 정을 주신 집안의 어른들과 친척들이 세상을 떠나셨을지라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감사의 메시지를 띄우며 살아간다. 비록 저세상에 계실지라도 그리운 분, 또 고마운 분들이었다고 펜으로 쓴 마음의 카드를 전해드리고 싶다.

새해 첫날에는 가족이 집근처 산으로 산책했다. 여기저기에 담배도 피울 수 없고 금지 구역에는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팻말이 서있다. 법과 예의를 지키는 미국의 시민정신을 익히며 살아가야하는 자부심으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한 해가 더 해갈 때마다 나도 그리운 사람 또 고마운 사람이 되어보자고. 저 높이 총총 떠 있는 밝은 별처럼 아름답게---.( 새해를 맞으며 미주문학 2016년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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