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시 /고방/ 감상

2016.11.23 23:15

정국희 조회 수:741


 고방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찰쌀탁주

가 있어서

삼촌의 흉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촌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가에서 왕밤을 까고

싸리 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 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들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두둑히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 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하였다

 

                                                                                    사슴21p  

 


 

 

      세상의 모든 사물과 존재에는 그 나름의 내력이 있다고 한다. 내력이라 함은 일정한 과정을 거쳐 오면서 지내온 경로나 경력인데 백석의 시에는 내력이 참 많다. 따라서 백석 시인은 자신의 내력이나, 고향의 내력이나, 로맨스까지 줄줄이 내력이 넘친다. 하나같이 다 그를 대표하는 것들이지만 특히 백석의 고향인 평안북도의 정서나 문화는 남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그 지방에서 쓰는 방언이나 음식 같은 것은 어느 지방 못지않게 구수하고 토속적인 내력이 있다.

 

       여기 시 제목인 고방은 음식을 보관해 두는 장소로서 쌀가마니나 씨앗, 그리고 늙은 호박이며 주렁박은 물론 술도 담가두는 곳이다. 특히 제삿날 뒤에는 떡이며 생선, 그리고 고기산적들이 시렁에 나란히 널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런 정경을 마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시에 담았다. 낡은 질동이에는 송구떡이 있고,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고, 싸리 꼬치에 꼬인 산적도 있는데, 구석의 나무말쿠지에는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걸려있다. 고방의 정경을 이렇게 감칠맛 있게, 그리고 시큼털털하게 잘도 그려낸 작품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가에서 왕밤을 까고 싸리 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 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이 얼마나 평화스런 광경인가. 이런 장면은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시에는 날것을 그대로 실었을 뿐 어떤 형식과 내용에 대한 투쟁도 없다. 이런 것들은 가장 깊은 부분에 관여하고 있는 것들이면서 어릴 때는 몰랐던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다만 보여지는 사람의 풍경과 삶 자체인 음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백석의 시에는 유달리 음식이 많이 나온다.

 

       그의 시집 사슴에 실린 33편의 시에는 56개의 음식 이름이 나와 있다. 시마다 거의 음식이름이 등장 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고방에는 송구떡, 찹살탁주, 두부산적 밖에 없지만 가즈랑집에는 무려 17가지 음식이름이 나와 있고 여우난 곬7개의 음식이름이 나와 있다. <그 인간미 있는 생활 속에서 백석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식생활에 대한 것이다. 먹는 것이 일상인 산골의 아이들로서 맛있는 음식이 인상에 깊이 남아 있을 게 당연하다. 별다른 오락이 없는 산골의 유일한 기쁨이다. 그의 시는 그런 오락으로서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354p)>

 

       백석의 시는 다양한 세계가 그려져 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나 흰 바람벽이 있어는 비참한 자화상을 우울하게 그려내고 있는 반면 고방에서는 어둔 면이 전혀 없이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감각을 통해 편안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치 이 세계가 지금도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아슴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야말로 순수하고 때 묻지 않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고방, 한 시대의 풍경을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고 간결하게 내면을 비추고 있는 참 고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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