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는 계절

2019.09.27 05:05

김영문 조회 수:18

여름이 끝나는 계절

 

 

(1)

 

나는 그 날, 그 여자를 만난 날을 잊을 수 없다. 여름이 미처 다 지나간 것이 아닌 더운 날인데도 긴 코트를 입고 바람 몹시 부는 시카고의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 여자를 나는 뒤에서 눈치 안채이게 오랫동안 응시했다. 여자가 벤치 등받이에 걸쳐놓은 캔버스 가방은 영화 선전용으로 만들었던 것인지 그 영화의 주인공 미녀 여배우의 사진과 함께 몇 년 전에 한국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던 영화 제목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여름이 끝나는 계절

그렇다면 벤치에 조용히 앉아 뒤태를 보이며 움직임이 없는 그 여자는 한국에서 온 여자겠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 영화에 큰 감동을 받았거나 아니면 주인공 여배우의 열렬한 팬일지도 모른다. 그 영화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는 말괄량이 수지가 성화를 부려서 나도 가서 본 적이 있는데 영화 따위에 무관심한 나도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남아 있는 명화였다. 게다가 주인공 여배우의 미모와 가슴을 쏟아내는 듯 진지한 연기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으로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겨줬었다.

영화 여름이 끝나는 계절은 뒤태를 보이며 앉아 있는 저 여자에게 말을 걸 때 공통의 화제로 사용할 수 있는 미끼가 될 수 있다.

어깨를 덮으며 넘실거리는 검은 머리에 훌쩍 큰 키, 긴 다리를 포개고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이 여자는 일어서면 틀림없이 팔등신일 것이다. 나는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이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버릇대로 습관대로 내 멋대로 음험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나 조용히 여자에게 다가간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얼굴을 들어 나를 본다. , 이 세상 어떤 남자의 마음도 녹여놓을 것 같이 기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아름다운 얼굴.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미친다. 심장이 요동친다. 보석 같은 눈 뒤에 숨어 있는 교태를 본다. 여자의 벌거벗은 몸이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지나간다. 순발력 있게 아랫도리가 뿌듯하게 부풀어 오른다. 내 속에 욕망 섞여 뭉클 뭉클 꿈틀거리는 감정을 짐짓 감추고 정중하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놀라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좀 유치한 대로 우선 이렇게 시작한다. 아니,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여자는 수줍게 말하면서 눈을 차분히 내리깐다. 눈을 내리깐 여자는 어떤 여자건 예쁘게 보인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 , 그럼요. 여자는 말하면서 벤치의 끄트머리로 몸을 옮겨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준다. 나는 일단 좀 떨어진 곳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너무 성급하게 서둘면 여자의 경계심을 유발해서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침착하게, 천천히, 분위기 잡아가면서 참을성 있게 끌고 나가야한다. 내 페이스로 다그치지 않고 여자의 페이스로 서서히 부드럽게 끌고 나간다. 기다려라.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 호수가 참 아름답군요. 그 크기가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바람이 좀 덜 불었더라면 더 낭만적이지 않았을까요? 내 말을 받은 여자가 말한다. 아니예요. 바람이 이렇게 거세게 불기 때문에 더 멋이 있다고 생각해요. 폭풍의 언덕 읽어보셨겠지요? 그 음산하고 바람 휘몰아치는 곳에서 정신병적 편집광이 되어 집요하게 사랑에 매달리는 여자를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훔쳐보면서 그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나요. 해가 지고 있는 바람 거센 이 호수가가 나는 어쩐지 그 소설의 장면과 흡사하다고 생각해요. 여자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호수를 본다. , 그렇군요. 폭풍의 언덕.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군요. 그 소설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돼서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감성과 상상력이 풍부하시군요. 나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진정 감탄한 듯 말해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이런 곳에 바람 심한 날 에스코트하는 남자 없이 혼자 앉아 계시는지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면 듣고 싶군요. 사연이요? , , 그런 거 없어요. 이따금 그저 혼자 앉아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집에서 좀 멀기는 해도 이곳에 나와서 이렇게 호수를 보며 잠시 있다가 들어가곤 해요. 혼자 앉아있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요? 맞습니다. 외롭게 혼자 있는 시간은 진정 나를 알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시간이기도 하지요. , 그리고 그 가방에 프린트되어 있는 사진은 윤미란이라는 여배우 아닙니까? 그 영화가 나온 지 수 년 됐을 텐데 아직도 그 영화 가방을 가지고 있군요. 나는 영화 따위는 자주 보는 편이 아니지만 그 영화는 하도 매스컴에서 떠들어대서 호기심에 가봤지 뭡니까. 역시 감동적이었습니다. 흥행과 예술성 양쪽을 모두 성공시킨 영화라고 하더군요. , 아주 잘된 영화예요. 저는 세 번씩이나 봤죠. 마지막에 주인공 여자가 자살로 끝날 때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영화에서는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지만 자살할 것이라는 예감을 주면서 끝나지 않았어요? 주인공 여자가 주위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못된 남자들에게 강간까지 당하고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하는 작은 길을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으로 끝났어요. 그 걸어가는 뒷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안타까웠어요. 미인인데다 머리도 총명해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주위의 질투 속에서 따돌림 당하고 외톨이가 되어 괴로워했죠. 그나마 의지하고 사랑했던 남자에게서까지 버림받고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방황하다가 결국은 자살로 끝나버리고 말았지 않아요.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면서 영화는 끝났어요. 저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사실은 나도 울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런 미인을 버리는 남자가 있다니요. ? 순진하시군요. 남자들은 어떤 여자에게건 좀 시간이 지나면 싫증을 잘 낸다면서요? 항상 새 여자를 찾는 습성이 있다고 들었어요. 더구나 남자들은 너무 똑똑한 여자를 싫어한대요. 말하면서 여자는 짓궂은 눈으로 나를 본다. , , 그런 남자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여자가 포개고 있던 다리를 내리고 반대쪽 다리를 올려놓는다. 코트자락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하얗고 긴 다리가 무릎 위까지 드러난다. 맙소사. 여자가 내 눈을 의식했는지 옷자락을 끌어서 노출되어 있던 다리를 감춘다. 안타깝도록 잠깐만 보였던 그 다리가 눈을 아프게 파고들어 떠나지 않는다. 미쳐.

남자는 새 여자를 찾는 습성이 있다. 미인 아내를 둔 남자가 그보다 훨씬 못 생긴 여자와 바람피우는 것은 생긴 것과 관계없이 새롭기 때문이다. 이 시카고 근교의 어느 조그만 도시에 사창가가 하나 있는데 인구가 얼마 안 되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손님은 물론 일하는 여자도 모두 가면을 쓰고 파티를 하면서 기분에 맞는 파트너를 찾아서 방으로 들어가 즐긴다는 것이다. 어느 남자가 이렇게 기분에 맞는 새 여자를 만나서 십여 차례에 걸쳐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도록 흥분스러운 섹스를 즐겼는데 어느 날 우연히 가면이 벗겨져서 보니까 그 여자가 자기 아내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내인줄 알았다면 그렇게 흥분해서 맹렬한 행위를 했을 리가 없었겠지. 그 다음에 더 웃기는 일이 생겼는데 이 손님은 여자가 자기 아내이므로 지금까지 자기가 쓴 돈을 모두 돌려달라고 사창가 주인과 대판 싸움질을 했다고 한다. 새 여자라고 믿고 진이 빠지게 즐겼으면 됐지 뭘 환불까지 바라다니 멍청한 놈 아닌가 말이다.
남자는 나이와 직업과 교육수준에 관계없이 모두 바람기가 있다. 사회적 윤리와 규범에 묶여서 그 본능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목사시험에 합격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이 있다. 한국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름을 죤 러스킨이라고 붙이자. 삼십을 갓 넘은 젊은 나이라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목사가 된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어디에서건 목사 죤 러스킨이라고 자기 직함을 꼭 쓰곤 했다. 어느 날 깊은 밤에 혼자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간통을 알선해주는 웹사이트를 발견하고 거기 나열되어 있는 갖가지 입체적 체위의 성교장면을 관람하며 흥분했다. 남자 특유의 바람기가 발동한 이 젊은 목사는 신분비밀 절대보장이라는 문구에 안심하고 입회원서를 써서 보냈는데 자기도 모르게 습관대로 목사 죤 러스킨이라고 직함까지 써서 보냈다는 것이다.

시카고는 바람이 많이 부는 도시군요. ? 여기 사시는 분이 아닌가요?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시카고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 로스앤젤레스. 저도 거기서 살아보고 싶어요. 날씨가 그렇게 좋다더군요. 일 년 내내 아주 춥거나 덥지 않아서 마치 휴양지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렇게 편하다면서요? 아니, 로스앤젤레스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까? 오래 전에 시카고로 올 때 통과여객으로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렸던 것 이외에는 로스앤젤레스를 볼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이 여자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설정해야 가장 흥분스러운 상황이 될 것인지 상상해본다. 이 여자의 직업은 무엇이라고 해야 가장 어울릴까? 시인? 그림 그리는 화가? 오피스 걸? 하얀 유니폼의 천사 간호원? 아무래도 좋다. 나중으로 미루어두자. 우선 여자가 매력적이려면 미인이라야 한다. 마음씨 곱고 말재주 있고 모든 점이 다 합격선이라 해도 눈 안에 매끄럽게 들어오는 용모가 아니라면 어쩐지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뒷모습을 보며 내가 머릿속에서 만든 이 여자의 자태는 미인으로 만점이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아주 바보면 곤란하다. 감칠맛 나는 대화가 가능해야 매력이 배가되지 않겠는가. 대화에서 재치 있게 받아치는 매력을 빼놓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여자가 혼자 사는 독신녀라야 한다는 것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왔을 때 혼자 사는 아파트에 들어가 혼자서 벗고 샤워를 하고 차가운 침대에 혼자서 들어간다고 상상하면 이야말로 흥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운 물로 샤워하고 방금 나와 물기 가시지 않은 몸을 타월로 감싸고 고개를 약간 기울여 긴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 앞에 선다. 그 여자의 뜨거운 몸을 뒤에서 끌어안고 홍조 띈 얼굴에 키스한다. 타월을 떨어트리며 돌아서는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그 보들거리는 온몸에 나를 비비다가 번쩍 들어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덮친다. , 안돼요, 천천히, 천천히. 속삭이는 여자의 숨결이 가빠진다. 나는 헐떡거리면서 여자를 타고 눌러 온몸을 애무한다. 나만 좋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 행위에 여자가 즐거워야 내 즐거움이 배가된다. 나는 끈기 있게 여자의 온몸을 애무한다. 여자는

남자와 달라서 달아오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머리 터럭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온몸이 성감대다. 나는 여자의 귀뿌리를 빨고 목, 가슴, , 그리고 허벅지 안쪽으로 열심히 키스해댄다. 여자의 숨결이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지고 단말마적인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때는 왔다. 나는 여자의 위로 올라가 자세를 취한다. 여자의 뜨거운 숨결이 내 목덜미에 쏟아진다. 때는 왔다.

벤치에 앉아서 뒤태를 보이고 있는 여자는 그냥 그렇게 조용하고 움직임이 없다. 이 여자는 내 머릿속에 광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음험한 상상을 알 길이 없다. 나는 여자와 같이 벤치에 앉았다고 생각하며 계속 상상한다.

어쩐지 오늘 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은 친근감이 드는군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사람과 정감어린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마 천사가 내 마음을 헤아리고 당신을 내게 보내서 만나게 한 모양입니다. 여자는 수줍은 듯 고개를 꼬며 말한다. , 낭만적이시군요. 보잘 것 없는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마워요. 일은 잘 돼가고 있다. 오늘은 일이 쉽게 이루어지겠다고 내 마음속에 자신감이 죽순처럼 빠르게 돋아난다. 나는 눈치를 보며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은근히 여자의 어깨에 팔을 얹는다. 해가 지고 있는데 어디 가까운 곳에 가서 같이 와인이라도 한 잔 하실까요? 나는 아주 정중하고 또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알코올은 마음을 흩뜨려 놓고 조심성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 도구다. 처음 만난 여자가 알코올음료를 몇 잔 마실 수 있는 데까지 유도할 수 있다면 그날 밤은 거의 틀림없이 성공담으로 끝나게 된다. , 일어나시죠. 제가 아주 멋진 곳을 찾아서 모시겠습니다. 나는 여자를 부축해서 일으킨다. 여자 특유의 여리고 부드러운 몸이 나에게 무심히 부딪쳐 와서 내 욕망에 왈칵 더 큰 불을 붙인다. 바람에 나부끼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불려와서 차갑게 볼을 간지르며 불붙은 욕망에 부채질한다. 그러나 참아라, 천천히, 천천히 해야 한다. 나는 신참내기가 아니므로 때를 기다릴 줄 안다. 진득한 마음으로 서서히 끌고 나가서 분위기와 감성을 고조시키는 미덕을 잊지 말자.

나는 다소 비틀거리는 여자를 부축하며 스탠드 바를 나온다. , , 좀 취하신 것 같습니다. 알코올에 약한 모양이지요? 이대로 운전하는 것은 위험할 것 같습니다. 저도 사실은 좀 취하고 있습니다. 택시를 타고 여기에 왔기 때문에 운전 걱정은 없지만 어떨까요? 우선 가까운 호텔에서 오늘 밤을 쉬고..... , , 일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되고 있다. 일의 흐름이 이상적인 방향으로 흡족하게 가고 있다는 말이다. , , 제가 어떻게 처음 보는 남자분과 함께 호텔에 들어가요. 침대도 하나 밖에 없을 텐데.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저는 바닥에서 자도 됩니다. 침대가 하나라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불편하지 않겠냐구요? , ,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습니다. 미국 처음 왔을 때는 한 달 가량을 친구 집의 차고에서 자기도 했는데요, . 걱정하지 마십시오. , 가십시다.

대개의 경우 밖에서 호기부리던 남자도 일단 여자와 단 둘이서 호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면 꽤 어색하고 멋쩍어 하는데 이것은 여자와의 아기자기한 기교에 습관 되지 못한 한국 남자의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여자 옷 부터 벗기려드는 무식쟁이도 있겠지만 정감과 분위기 조성에 의한 여성만족도를 순서에 넣지 않는 이런 수준이하의 야만인은 빼놓고 이야기하자.

보통의 한국 남자는 아내의 생일이나 다른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꽃 사들고 들어가서 당신 축하해, 사랑해, 어쩌고 하면서 뽀뽀하고 끌어안아주는 것에 꽤 어색해 하거나 둔감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다분히 있어도 실제로는 잘 안 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러나 나는 강한 자의식으로 인위적인 노력을 해서 이 어색함을 고쳐나가려 하는 진취적인 사람이다. 내가 발견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음악 치유법이다. 처음 만난 여자와 천신만고 끝에 호텔방에 들어가면 우선 라디오를 틀어서 정감 있는 음악을 방안에 흘려라. 둘만 있는 방안의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은 분위기 조성의 적이다. 블루스나 스윙 따위의 음악이 좋다. 기분이 좀 고조되어 있다면 탱고도 괜찮다. 이렇게 음악을 틀어놓으면 갑자기 둘만의 세계가 된 어색함이 완화된다. 여자를 가볍게 안아서 침대에 앉히고 하이힐을 벗겨준다. 이렇게 예쁜 발을 본 적이 없군요. 여자의 발에 키스한다. 아니, 안돼요, 이러시면 안돼요. 이제부터는 말이 필요 없다. 행동으로 대신한다. 여자는 남자가 약간 강압적으로 유도하기를 기대한다. 여자가 안 된다고 할 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지 말라.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목덜미에 키스하고 거부하는 여자의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치면서 팬티 호스를 벗겨낸다. 침대가 하나기 때문에 나는 바닥에서 잔다고 했던가?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지?

 

(2)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이상한 노릇이다. 어째서 여자는 한 자리에 저렇게 같은 자세로 앉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미동도 안 하고 하염없이 호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상상을 접고 일어나서 여자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한국분이시지요? 뒤에서 보니까......”

여자가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 만들었던 내 상상의 세계는 그 순간 산산조각으로 깨어져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를 보는 여자의 눈에는 표독스런 적의가 서려있고 그 얼굴은 화상흉터로 괴물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흉한 얼굴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당황스럽게 서 있는 나를 쏘아보던 여자는 벤치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내게 등을 돌리고 캔버스 가방을 벤치 등받이에서 꺼내 들었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당황해서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사고를 당하셨군요. 얼마나 아팠을까.”

여자의 등에 대고 나는 미처 준비하지 않았던 말을 무심결에 했다. 걸어가려던 여자가 우뚝 멈추었다. 잠시 서있던 여자의 등이 가늘게 떨기 시작하자 나는 여자가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지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조용히 있는 시간을 방해해서.”

여자가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외면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여자의 목소리는 곱고 아름다웠다. 여자의 얼굴을 그렇게 태워놓은 무서운 불길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건드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말이 끝나자 여자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내게 등을 보이며 걷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서 있다가 황급히 여자의 뒤를 따랐다.

, 같이 좀 걸어도 될까요? 어쩐지 그냥 이렇게 보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마치 침묵의 허가를 얻은 것처럼 여자의 옆에서 같이 걸었다.

마침내 여자가 입을 열었다.

동정하시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렇게 그냥 보내드리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던 산보객 부부가 여자의 흉한 얼굴을 보자 얼굴을 찌푸리며 얼른 길 한쪽으로 물러섰다.

잠시 동안을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이따금 여자의 몸이 나에게 부딪쳐올 때마다 나는 돌덩어리처럼 딱딱한 여자의 상반신을 느끼며 얼마나 큰 사고를 당했기에 얼굴뿐만이 아니고 상반신에까지 그런 큰 화상을 입었을까 생각했다. 여자가 말한 것처럼 동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 사고도 당하지 않고 오늘까지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불행한 사고를 당한 사람을 동정할 수 있을까?

지금 지나간 사람들 보셨죠? 제 얼굴을 보고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 찡그리며 피해가지 않던가요?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했죠. 저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것에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은 얼마나 아팠겠느냐고 말했군요.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뜻밖에 듣는 말에 그만 저도 모르게 울음이 나왔지요.”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자의 화상 입은 얼굴을 보고 역시 얼굴 찡그리며 물러서서 지나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돌덩어리처럼 딱딱한 어깨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여자는 기대하지 않았던 내 행동에 움칠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제기랄, 뒷모습이 너무 요염하게 보여서 오늘은 운이 좋겠다고 달려들었는데 일이 엉뚱한 쪽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이 여자를 그냥 놓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무슨 사고를 어떻게 당했는지 모르지만 다만 얼굴의 화상 때문에 소외된 생활을 하고 있을 이 여자를 그냥 팽개치고 돌아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여자에 대한 무슨 의무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꽤 인정 있고 괜찮은 사람인 모양이다.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조그만 회사를 하나 만들어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말은 회사지만 직원도 없이 저 혼자서 하는 일이지요. 제가 컴퓨터 일을 해주고 있는 회사에서 시카고에 지점을 만들어서 그 지점과 본점 사이를 컴퓨터로 연결해주고 새로 생긴 그 회사 직원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서 여기 와 있습니다. 한 일주일쯤 더 있다가 돌아갈 예정입니다.”

나는 어색한 공간을 메우기 위해 필요 없는 설명을 장황하게 해댔다.

여자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 제 이름은 김현성입니다. 모두 저를 케이라고 부르지요. 어쩐지 미국이름 만들기가 어색해서 제 성의 첫 번째 글자를 따서 생각해낸 이름입니다.”

여자는 역시 아무 말 없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며 여자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여자는 역시 한사코 나를 외면한 채 대답했다.

영자라고 부르시면 돼요. 김영자.”

잠시 걷다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울퉁불퉁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돌렸다. 얼굴을 나에게 맡긴 채 여자의 눈이 두려움을 담고 나를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처음 보았을 때의 그 표독스러운 적의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그 핏발선 눈빛은 자기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전율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겼던 자기방어적인 것이었겠지.

김영자씨. 나를 보십시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김영자씨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놀라움이 지나가버렸지요. 얼굴에 화상이 생겨서 보기 흉하게 되었다고 마음까지 그렇게 흉하게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자의 눈이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김영자씨. 눈이 아름답군요. 몹쓸 일을 당하고도 두 눈은 그대로 다치지 않고 아름답게 남아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군요.”

여자의 입술이 떨리며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고여 나왔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안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를 어떻게 당해서 이렇게 큰 화상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다만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정신적 감옥에 가두고 유폐된 생활을 자초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는 내가 왜 얼굴이 괴물처럼 되어버린 이 여자에게 필요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여자를 그대로 놓아두고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까 벤치에 앉아 있는 이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상했던 그런 식의 육감적인 모험적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감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영자씨, 우리 이제부터 친구가 됩시다. 제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김영자라는 여자의 얼어붙은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다시 따뜻한 모습을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대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문제와 고민과 번민만 생각하고 괴로워하지요.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대로 그 사람의 문제와 고민과 번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 세상의 괴로움은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저마다 서로 다른 문제와 서로 다른 고민거리를 짊어지고 싸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김영자씨가 가진 그 정도의 문제는 어느 누구나가 다 가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물론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나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내게 어떤 시련이 왔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고 이것이 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진짜로 이 세상의 종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나는 죽었구나하고 생각하면 진짜 죽고 마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살려고 하는 집념과 의지를 버리지 않는 것은 실로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쓰는 그런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 추상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불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을 여자에게 그런 시련을 당해보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내 말이 이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나는 위선적인 말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 여자가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용기를 가지는 일이 나에게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알지 못해도 괜찮다. 알려고 하지 말자. 그냥 이 여자가 자기가 움츠리고 들어가 있는 구각 속에서 나오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자.

주차장으로 나오자 여자는 하얀 캠리 차 앞에 멈춰 섰다.

오늘 친절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작별을 고하고자하는 여자의 말에 나는 다소 다급해졌다.

내일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네 시면 일이 끝나는데 그 이후에는 아무 때라도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보여주신 호의만으로도 족합니다. 더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 여자를 놓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하룻밤을 즐기기 위해서 유혹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도 괜찮지만 이것은 좀 더 의미가 심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다시 만나기를 원하는 나의 부탁을 한사코 거부했다. 연락할 곳을 알려달라고 해도 그것도 사양하고 말았다.

진정 그러시면 제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도 저하고 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차가 없이 택시를 타고 여기 왔습니다.”

여자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다운타운의 홀리데이 인에서 묵는다고 말했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여자가 짤막하게 말하고 차에 올랐다. 나는 마치 여자가 차를 몰고 훌쩍 떠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듯 서둘러서 여자의 뒤를 따라 같이 차에 올랐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면서 운전했고 내가 무슨 말이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차는 호텔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홀리데이 인의 로비로 들어가는 회전문 앞에 차를 대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여자에게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연락처를 줄 수 없습니까?”

여자의 화상 입은 얼굴은 표정을 잃어버렸지만 나는 이 여자가 그저 쓸쓸히 미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 수 없군요.”

나는 대신 내 명함을 한 장 꺼내서 대쉬보드 위에 얹어놓았다.

혹시 마음이 변하시면 아무 때나 연락 주십시오. 거기 전화번호도 있고 이메일 주소도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김영자씨가 저를 잊지 않고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 아쉬움을 느끼며 차에서 내린 나는 여자의 차 꼬리등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호텔 로비 문 앞에 멍청히 서있었다.

(3)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대로 그 영화를 찾아서 한 번 더 보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잠시 사무실을 비운 사이에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어서 나는 밤을 새우며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면서 사실상 나는 그 영화와 여자, 김영자의 일을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리면서 시카고에서 일어난 일은 말하자면 그런 일도 있었지, 하는 정도의 조그만 과거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신으로 살기를 고집하고 있는 나에게는 낮에 하는 일 이외에도 관여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야행성 중년 독신자 모임에서 나는 꽤 인기가 있는 편이어서 다소 방탕하고 반쯤 미국화 되어 정조관념이 희박해진 한국여자들이 심심찮게 전화해 와서 독신 생활을 하면서도 이성에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런 야행성 생활이 바쁘게 이어지고 얼굴 예쁜 여자들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제공되고 있는데 구태여 시카고라는 먼 곳에 있는 괴물얼굴의 여자가 내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그 여자의 운명을 가슴 아파하지만 그것은 그 여자의 운명일 뿐 내 운명은 아니지 않는가.

시카고에 다녀온 지 한 달쯤 지난 때에는 나는 완전히 김영자를 잊고 있었고 그 여름이 끝나는 계절이라던가 하는 영화도 잊고 있었다.

케이 오빠, 나야, 수지야. 오늘 밤 뭐해?”

금요일 오후 마악 퇴근하려고 할 때 수지에게서 내 쎌폰으로 전화가 왔다. 이 말괄량이 수지는 한국에서 삼류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십여 년 전에 영어 연수교육을 받는답시고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영어학원에 다니다가 일 년을 미처 채우기 전에 그만두고 불법 체류자가 되어 여기 주저앉은 여자다. 얼마나 대단한 영어 연수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데다가 머리도 다소 둔치다. 그러나 도발적으로 예쁜 얼굴에 침대에서의 끝내주는 테크닉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여자다. 한국의 집은 가난해서 돈을 한 푼도 보내주지 못한다는데도 이 수지는 뭘 하는지 항상 돈이 많다. 이따금 전화호출이 오면 룸사롱에 나가서 호스테스 노릇도 하고 더러는 손님을 따라 나가 과외활동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물론 그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고 나는 그런데 대한 거추장스러운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묻지 않는데도 수지는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룸사롱 일은 돈이 잘 벌리는 괜찮은 직업이긴 하지만 달갑지 않은 이유는 손님들 거의가 매너가 없고 멋대가리 없는 녀석들이어서 아주 배고플 때는 참고 할 수 있었지만 더러 궁핍을 벗어난 후에는 도무지 구역질나는 녀석들에게 몸 맡기고 같이 앉아 있기가 힘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 팔을 물컹거리는 젖가슴 사이에 안고 킬킬거리고 웃으면서 말했었다. 케이 오빠 같은 손님만 계속 받으라고 하면 매일이라도 나가서 앉아있지.

그 금요일 밤에 나는 수지를 데리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새벽 두 시까지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발광을 하다가 동시 픽업이라고 부르는 택시 서비스로 수지의 아파트로 갔다.

오빠, 오빠를 위해서 내가 춤을 출게.”

수지는 스타 더스트 음악을 틀어놓고 술기운에 어지러운 내 눈앞에서 하나씩 옷을 벗으며 스트립 티스를 했다. 마지막 팬티까지 벗어 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 수지는 정말 볼만했다. 요염한 자태로 허리를 비트는 수지를 끌어안고 우리는 침대에 깊이 파묻혔다.

그날 밤새도록 나는 수지와 엎치락뒤치락하며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토요일 오후 한 시쯤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 번 더 해줘.”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붙잡고 수지는 살살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또 한 번의 뜨거움이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수지에게서 벗어나 아파트를 나올 수 있었다. 광란의 밤이 지나고 나면 빨리 헤어져 나오는 것이 똑똑한 짓이다. 서로 헝클어진 모습에 피곤한 얼굴을 보이는 것은 관계가 빨리 식을 수 있는 큰 요인이 되는 것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중국 음식점에 들려서 기름기 있는 소고기와 닭고기로 만든 음식을 주문해서 싸들고 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거의 오후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음식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컴퓨터 스위치를 올리고 인터넷을 열었다. 젓가락으로 큼직한 고기 덩어리를 하나 집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던 나는 이메일 창구에 뜬 메시지 하나를 보고 우뚝 멎었다.

 

- 시카고에 오셨을 때 보여주셨던 호의를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김영자.

 

비로소 나는 시카고에서 일어났던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화상입어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 있던 김영자가 생각났다.

나는 입을 우물거려 음식을 먹으며 컴퓨터에 한글로 한국영화”, “여름이 끝나는 계절하고 타자해 넣었다. 잠시 화면이 깜빡거리다가 영화화면이 나왔다. 시카고에서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영화 선전용 가방에 인쇄되어 있던 미녀 여주인공 윤미란의 빠져 들어갈 것 같이 매력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보기 드물도록 미끈하게 잘 빠진 몸매. 나는 잠시 영화장면 몇 개를 훑어보다가 그 웹사이트에서 빠져나왔다.

 

- 반갑습니다. 열심히 살고 계시지요? 케이.

 

나는 김영자에게 간단한 답신을 하고 컴퓨터를 껐다. 영화를 보기는커녕 피곤해서 지금은 우선 잠부터 자야했다.

 

내가 혼수상태와 같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일요일 새벽 세 시였다. 온몸이 격심한 운동을 한 것처럼 뻐근했다. 금요일 밤 오래 만에 침대에서 만난 수지는 역시 만만치 않은 적수였던 것이다.

나는 잠옷 바람에 컴퓨터 앞으로 가 앉아서 스위치를 눌렀다. 하품을 하며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에 깜빡거리던 컴퓨터가 작동을 시작하고 잡동사니 스팸 메일을 한참이나 걸려서 모두 삭제한 후 나는 김영자의 이메일과 나의 답신을 다시 읽었다.

 

- 시카고에 오셨을 때 보여주셨던 호의를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김영자.

- 반갑습니다. 열심히 살고 계시지요? 케이.

 

나는 잠시 괴물얼굴의 김영자를 생각하다가 일어나서 어제 먹다 남아 식탁 위에 그대로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중국음식을 대충 꾸려서 마이크로오븐에 넣고 덥혔다. 다시 컴퓨터 앞에 가서 앉아 음식을 먹으며 나는 그 영화 여름이 끝나는 계절을 찾아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안락의자에 길게 눕다시피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아 집중이 잘 안 되는 눈으로 무심히 보기 시작했는데 잠시 보는 사이에 나는 그 영화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출중한 미모의 주연 여배우 윤미란은 연기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며 주위 뭇사람의 가시 돋친 질투와 따돌림을 이겨내고 자기의 길을 가려는 안타까운 노력이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다. 보통 사람보다 용모가 출중하다던가, 개성이 있다던가, 두뇌가 평균 이상으로 명석하다던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집념이 강하다던가, 이렇게 보편적인 일반인과 다른 면을 가진 사람은 대중 속에 섞여 들어가서 살기가 힘들다. 게다가 이 주인공 여자는 남자의 눈을 피할 수 없는 미모를 가지고 있다. 여자를 자기와 대등한 인격체로 존경할 줄 모르는 무뢰한 같은 남자들의 집요한 성적공세 속에서 괴로워하며 자기의 길을 가고 자기가 가진 꿈을 성취하려는 치열한 열망을 불태우는 여자의 애타는 노력이 나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대중은 이런 사람을 질투하고 모함하고 따돌리고 험담한다. 이런 사람들을 배척하고 따돌리고 위해하려 하는 대중은 사악하다. 보통사람들의 보통사회에 적응해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이 대중화 평준화의 사회 속에 묻혀서 생존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주인공 여배우의 처절한 연기 뒤에 숨어서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야만적 남성위주의 규격화, 비인간화, 비개성화 사회에 대한 소리 없는 분노다. 이 영화에서 압권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그 마지막 장면, 낙엽 떨어지기 시작하는 길을 주인공 여자가 결국 그 두터운 인습의 벽을 뚫지 못하고 몇 번에 걸친 강간까지 당한 후 자기를 받아주지 않았던 사회를 등지고 죽음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 나는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여자처럼 다만 여자라는 이유로, 아니면 다만 대중과 다르다는 이유로 꿈을 펴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 침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을까.

 

- 김영자씨. 지금 일요일. 밤이 지나가고 다시 빛이 찾아오면서 새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잠들어 조용한 시간에 일어나 인터넷에서 김영자씨가 좋아하는 영화 여름이 끝나는 계절을 또 한 번 봤습니다. 두 번째 봐도 역시 가슴을 울려주는 좋은 영화군요. 영화를 보면서 김영자씨가 왜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제 생각을 있는 대로 말해 볼까요?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모르지만 얼굴의 화상 때문에 일반사회를 떠나고 타인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하는 김영자씨가 이 영화에서 다른 이유로 역시 소외되어 괴로워하다가 종국에는 그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걸어가는 주인공을 자기의 운명과 같이 보고 공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맞을까요? 그런데 저는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카고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서로 형태는 다르지만 삶에 따라오는 필연적인 짐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죽음이 와서 우리의 숨을 거두어가기 전에는 벗어버릴 수 없는 그런 짐을 지고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삶의 노예일지도 모릅니다. 견디기 힘들다 하더라도 아무쪼록 시련을 겪는 것은 김영자씨 혼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써놓은 이메일을 몇 번 읽어보고 여기저기 고친 다음 전송했다. 이상한 노릇이지만 그 흉물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이 나에게는 더 이상 끔찍스럽거나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뜻밖의 사고를 당하고 화상으로 흉칙해진 얼굴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남들의 눈을 피하며 숨듯이 살아야 하는 김영자의 처지에 연민의 정이 가기까지 했다.

그렇게 이메일을 보내고 이틀이 지난 오후에 사무실에서 나는 김영자의 답신을 받았다.

 

- 화상에 일그러진 제 얼굴을 보고 놀라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이제 더 이상 감당하기가 힘들군요. 용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 짧은 이메일 메시지는 나의 마음을 흔들며 와 닿았다. 괴로울 테지. 몹시 괴로울 테지.

그 바람 심한 미시간 호수에서 보았던 팔등신 여자의 뒤태에서 느꼈던 매력이 다시 생각났다.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지지만 않았더라면 이 여자는 뭇 남자들의 시선을 독점하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가슴 설레도록 기묘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던 그 뒷모습이 너무나도 아깝고 안타까웠다.

나는 잠시 그때 보았던 뒷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며 생각하다가 김영자의 이메일에 더 이상 답신을 안 하기로 작정했다. 이러다가는 진짜 소득도 없는 일에 빠져 들어가서 그 여자의 불행이 마치 내 불행인 것처럼 같이 괴로워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들었다. 인생은 짧다. 즐거운 일만 생각하면서 살기도 바쁜데 내가 왜 남의 짐을 함께 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괴로움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내가 뭐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남의 불행에 휘말려 들어가서 같이 괴로워해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나는 퇴근하기 전에 쎌폰에 수지의 전화번호를 찍어 넣었다.

뭘 해? 시간 있니? 오늘은 안 돼. 밤일이 있어. 짜식. 알았다.

이 수지는 도발적인 얼굴 생김새와 잘 빠진 몸매가 재산이고 생계의 수단이다. 못 이기는 척, 뿌리치는 척하면서 꽤 높은 서비스료를 받고 이따금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모양인데 그것이 이제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 버렸다.

수지와 만나서 한바탕 격전을 치룰 생각을 했었는데 틀렸다. 일찌감치 집에 들어온 나는 샤워를 하고 헐렁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메일 프로그램을 열자 첫 번째 눈에 들어온 것은 사무실에서 읽었던 김영자의 메시지였다.

 

- 화상에 일그러진 제 얼굴을 보고 놀라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이제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군요. 용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애써 이 메시지에서 시선을 돌렸다. 없었던 일로 해두자. 나는 나 나름대로 내가 가진 문제가 있다. 이 여자가 가진 문제 따위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

별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또 그 영화를 찾아서 화면에 떠올렸다.

여름이 끝나는 계절”. 주인공 윤미란.

나는 컴퓨터에 영화의 주인공 윤미란의 이름을 타자해 넣었다.

1982년 서울 생. 꼭 한 편의 영화에 출연. “여름이 끝나는 계절”. 현주소 미상.

그런 신상사항에서 시작된 윤미란의 이야기를 나는 그날 저녁 부터 자정이 지날 때까지 컴퓨터에 매달려서 관련된 정보와 신문기사를 모두 찾아서 읽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영화배우 윤미란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 두 시가 거의 다 되어갈 때 나는 시카고의 괴물얼굴 여자에게 이메일을 썼다.

 

- 김영자씨. 로스앤젤레스보다 두 시간 앞서는 그 곳은 이제 조금 지나면 동이 트고 새벽이 오겠군요. 어둠의 끝에는 항상 빛이 있다는 사실은 실로 희망적인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시련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도 반드시 새벽과 같은 빛이 온다는 사실을 나는 김영자씨와 함께 믿고 싶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굳게 딛고 서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김영자씨도 그렇게 역경에 강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마침 지난 번 마무리 짓지 못한 제 고객 회사의 일로 또 시카고에 출장갈 일이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이메일을 보내고 미처 10분이 지나기 전에 답신이 들어왔다.


- 보여주시는 관심 고맙습니다.

 

시카고의 새벽 시간에 김영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서 삶을 괴로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4)

 

바다처럼 거대한 호수는 또 그만큼이나 큰 파도를 만들어 하얀 거품을 뿜어내며 육지를 때렸다.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호수가의 바람은 자는 날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때 내가 앉았던 벤치를 찾아서 앉았다. 김영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잠시 그 자리를 응시하고 있자 내 눈에는 그날 보았던 김영자가 거기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등받이에 걸려있던 여름이 끝나는 계절선전용 가방도 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기묘하게 매력을 풍기던 김영자의 뒷모습이 내 기억에 안타깝도록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화상흉터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등줄기로 지나가던 전율.

김영자씨, 당신의 화상당한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다른 모든 사람처럼 놀랐습니다. 미안합니다. 사고를 당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고 마음까지 일그러진 것은 아닐 텐데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군요. 나는 그래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어서 남이 당한 불행을 그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이해하고 어려움의 일부분이라도 같이 느끼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내가 김영자씨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날 그렇게 오랫동안을 움직임 없이 벤치에 앉아 있던 김영자씨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그 영화의 뭇 남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영자씨를 성욕의 대상으로 상상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늘은 다릅니다. 오늘 나는 김영자씨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있습니다. 나는 내가 김영자씨와 친구라는 사실을 오늘 다시 한 번 확인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나도 다른 많은 보통사람들처럼 김영자씨의 불행을 외면하고 지나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나름대로 삶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짐이 있지만 그 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무겁고 힘겨운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착한 사람이 되어 김영자에게 사죄하는 마음이었다.

얼마만한 시간이 흘렀을까, 혼자 생각에 깊이 빠졌다가 문득 눈을 뜨니 그 벤치에 김영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언제 왔을까? 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환상인가?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가 일어나서 다가갔다.

벤치에 앉아 있는 김영자는 환상이 아니었다.

나는 김영자와 거리를 띄우고 벤치 끝에 앉았다. 화상흉터로 일그러진 그 얼굴이 이제는 이상하게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얼굴을 돌리고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잘 계셨지요?”

나는 손을 들어 돌덩어리 같은 여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여자는 눈을 내리깐 채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묵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김영자씨가 씩씩하고 용기 있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바람소리 속에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여자가 말했다.

시카고에 일이 있어서 오신 것이 아니군요?”

사실은......”

나는 여자를 보며 미소했다.

김영자씨를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온다고 하면 못 오게 할 것 같아서 핑계를 댔습니다.”

지나치던 산보객이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외면하면서 지나갔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따위 생각 짧은 사람들의 행동을 개의치 않기로 했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간 후 나는 김영자씨를 생각하면서 그 영화를 두 번이나 봤습니다.”

여자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 여주인공 윤미란에 대해서도 컴퓨터에 남아 있는 기록을 모두 찾아서 다 알아봤습니다.”

여자는 침묵했다.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영화에는 꼭 한 편 여름이 끝나는 계절에만 출연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여자는 침묵했다.

나도 한참 동안 호수를 내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그 여배우는 선풍적인 인기에 휩싸이고 영화 출연 교섭도 쇄도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하고 있을 때 어떤 재벌회사 회장의 장남이 나타나서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처했다는군요.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믿고 따르면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암암리에 결혼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라고 씌어져 있더군요.”

여자는 침묵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출연교섭은 쇄도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회장의 장남과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회장의 장남은 다친 곳 없이 빠져나왔지만 윤미란은 미처 안전벨트를 벗겨내지 못해서 불타는 차안에서 발버둥치다가 의식을 잃었답니다.”

바람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여자는 침묵했다.

회장아들은 불타는 차에서 멀찌감치로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무 관계도 없는 품팔이 노동자 하나가 뛰어들어 그 여배우를 차에서 끄집어내서 들쳐 업고 구해냈습니다. 슬프게도 그 때는 이미 그 여배우의 얼굴과 상반신이 처참하게 불타버린 후였다는 겁니다.”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자가 충격에 비틀거리며 돌아서서 급하게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등에 대고 다급히 불렀다.

김영자씨!”

서둘러 일어나 여자의 뒤를 따라가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 손 안에서 여자의 온몸이 화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김영자씨! 아니, 윤미란씨!”

나는 떨고 있는 여자의 몸을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나를 놓아주세요. 나를 가게 해주세요.”

여자는 거세게 울고 있었다.

윤미란씨. 나하고 이야기합시다. 나하고 조금만 더 이야기합시다. 나는 윤미란씨와 친구가 되기로 약속한 사람입니다.”

여자는 나의 손을 완강히 뿌리쳤다.

나는 윤미란이 아니에요. 오늘은 나를 놓아주세요.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

여자는 한사코 나를 거부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완강했기에 나는 단념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이 자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일 만나서 더 긴 이야기를 나누기로 합시다.”

나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내 목소리도 떨고 있었다. 인터넷에 있는 모든 정보를 찾아서 읽은 후 이 김영자라는 여자가 윤미란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시카고로 되돌아와서 만났는데 이제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뛰다시피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서 급히 차를 몰고 멀어져갔다.

나는 쿵쾅거리고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가 시야에서 없어진 후에도 갈 곳을 잃어버린 바보처럼 한참이나 거기 서있었다.

 

그 후 삼 일 동안을 나는 여자를 만났던 자리에 매일 아침부터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여자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5)

 

- 김영자씨, 아니, 윤미란씨. 윤미란씨와 헤어지고 나서 삼 일 동안을 그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단념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도 결국은 자기 삶의 길을 자기 혼자서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기는 합니다. 그렇게 혼자서 가는 길이라도 이따금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서로의 외로움을 덜 수 있는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대개의 사람들은 만났다가 헤어지면 다시 타인이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는 숨 쉬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나는 윤미란씨와 더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보낸 이메일에 답신은 오지 않았다.

 

- 윤미란씨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속으로만 침잠해 들어가서 자학하고 울면서 고통을 더 크게 만들지 말기 바랍니다.

윤미란을 생각하고 답을 기다리면서 나는 나 스스로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산다는 것은 즐거움이었고 향락이었고 여자와의 관계는 가벼운 스포츠 게임과 같은 것이었다. 삶에 따라오는 내 몫의 짐을 버거워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지금 윤미란을 보면서 느끼는 삶의 중압감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가벼운 것에 불과했다. 고통은 인간을 성숙시킨다. 역경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나는 윤미란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서 거의 반년이 지나 안타까운 기다림이 희석되어 가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윤미란에게서 답신을 받았다.

 

- 따뜻한 말씀에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는 것이 두려워 답신 드리지 못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답신을 읽는 순간 내 가슴은 이 김영자라는 여자가 사실은 윤미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한 생명이 사그라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무력감에 더욱 가슴이 뛰고 온몸이 떨렸다.

윤미란에게서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몇 번 애타는 이메일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또 시간이 지나 여자를 처음 만났던 계절이 되돌아왔다. 여름이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꽤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부딪쳐오는 계절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나는 단념하지 못하고 이제 아마 영원히 듣지 못할 윤미란에게서 올 소식을 허망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안타까운 마음을 뒤에 놓아두고 여자는 그저 그렇게 영겁의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무심히 내다본 창밖에는 초록빛을 잃어가는 나뭇잎들 사이로 마악 떨어지고 있는 해가 마지막 빨간 빛을 뿌리고 있었다.

 

(2016108)

미주문학 2016년 겨울 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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