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수진아 (제 2 회)

2012.08.08 06:23

김영문 조회 수:253 추천:28





                          수진아, 수진아 (제 2 회)

(3)

  뉴먼 앤드 하딩 회사 뉴욕 본점으로 전근 발령을 받고 한국을 떠날 때 나는 검정색 홀대 바지와 색갈 낡은 셔츠를, 그리고 온갖 반항심과 이지러진 기억들을 모두 뒤로 남긴 채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나의 나라와 작별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날 때 나는 쓰레기 통에 던져 넣은 헌 옷가지와 구멍 뚫린 신발들처럼 윤수진과의 추억도 그렇게 쓰레기 통에 던져 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녀석과의 온갖 추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석되기는 커녕 도리어 더욱 안타깝도록 생생해지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걸려온 윤수진의 전화는 일상의 안일함에 젖어서 몽유병자처럼 살던 나를 맹렬히 흔들어 깨우고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내가 가슴앓이하고 있었듯이 이 녀석 또한 나를 생각하며 똑같이 아픈 십 년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뜨겁게 달아 올랐다.
  “기억할 수 있겠어? 윤수진이야.”
  그 목소리는 얄미울 정도로 차분했다.
  “기억해?”
  그러나 그 담담한 것처럼 들리는 윤수진의 목소리 뒤에서 그 녀석도 역시 나처럼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윤수진을 기억하느냐구?"
  나는 가빠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윤수진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게 시간이 좀 필요했다.
  "윤수진. 윤수진이라는 말이지? 내가 그 동안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이름도 윤수진이야."
  전화기 저쪽에서 녀석은 그 때처럼 후후하고 작게 웃었다. 그 웃음  소리를 들으며 나의 가슴 속으로 검정 홀대바지 시절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하얗게 부서졌다. 이상하도록 치장하기 싫어하고 장신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녀석의 얼굴이 그 포말 속에 떠올랐다.
  “어디야? 어디 있어?”
  다급하게 묻는 나에 비해서 짜식은 여유가 있어보였다. 최소한 겉으로는 말이다.
  “너는 잘 모르는 데야. 아이다호 주에 있는 샬리스라는 아주 작은 도시야. 인구가 천명 밖에 안 돼.”
  “샬리스? 그런 덴 왜 갔어? 아니, 어떻게 갔어?”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돼?”
  “만나서?”
  “그래. 나 뉴욕으로 이사가. 이곳을 떠나기로 했어.”
  맙소사. 윤수진이 뉴욕으로 온다는 말이지? 나는 괴상한 기대감에 더욱 흥분했다. 그러다 갑자기 나는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 가족은?”
  “가족? 나 혼자야.”
  “혼자?”
  “응. 남편이 있었는데 죽었어.”
                                                                
  공항에서 만난 윤수진은 내가 한국에서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뾰족뾰족한 느낌을 주는 얼굴하며 길고 살이 별로 없는 몸이 까만 홀대바지와 셔츠를 입혀놓으면 쉽게 그 때로 되돌아갈 것 같았다.
  한국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아서 곰탕이 그리웠다는 수진을 태우고 나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곰탕 전문집으로 가서 앉았다.
  “야, 천천히 먹어, 천천히.”
  문자 그대로 허겁지겁 깍두기며 김치며 닥치는 대로 입으로 가져가는 수진을 보며 내가 말했지만 녀석은 그저 씨익 웃곤 식탁 위에 놓인 그릇을 모두 바닥내 버린 것이다.
  “어떻게 살았기에 한국 음식을 그렇게 못 먹었다는 말이야?”
  내가 어처구니 없어서 보고 있다가 물었다. 먹고 싶었던 것을 먹어서 이제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윤수진이 환하게 웃었다.
  "내 전화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미국에 온 후에 최명도에게 전화해서 알아냈지. 네가 뉴먼 앤드 하딩이라는 회사에 취직해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어. 최근에 전화해 보니까 네가 오래 전에 뉴욕 본점으로 전근 갔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알아냈어. 한국에 있는 뉴먼 앤드 하딩이라는 회사에서 전화 받은 사람이 나보고 참 운이 좋다고 했어. 내가 전화한 날이 바로 그 회사가 문을 닫는 날이었다는 거야. 모두 해고당했으니까 하루만 늦게 전화했어도 너를 아는 직원이 없었을지도 몰랐던 거야."
  뉴먼 앤드 하딩의 근간이 되는 고객들인 백화점 체인이 대형화하면서 자체 내에서 지점을 만들어 뉴먼 앤드 하딩이 하던 일을 인수 받아 독자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고객이 하나씩 둘씩 줄어들어 회사가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를 미국으로 오게 만들어준 한국 지점이 문을 닫았다는 것은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내가 그 뉴먼 앤드 하딩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던 최명도는 우리 네 명중에서는 그래도 집안이 꽤 괜찮아서 그 때 우리가 쓰고 다니던 용돈을 거의 전부 공급하다시피 했었다.
  "한국 지점이 문을 닫았다는 말이지?"
  나는 그 회사가 설립될 때 이력서를 들고 부사장과 인터뷰하던 때를 생각하며 되물었다. 나를 인터뷰하고 고용해 줬던 그 부사장도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뉴욕 본점으로 전근 와서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위층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회사, 여기는 괜찮니?"
  윤수진이 물었다.
  "나쁜 소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지점 문을 닫을 정도로 어려워졌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지."
  나는 속으로 은근히 또 무직자가 될 것을 걱정하며 대답했다.
  “너는 내가 어떻게 미국에 왔는지 모르지?”
  윤수진이 물었다.
  “몰라. 떠나기 전에 네가 보낸 편지는 받았지만 말이야.”
  “아, 편지. 떠나기 전에 어쩐지 슬픈 생각이 들어서 편지를 썼어. 갑자기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은 거야.”
  “나는 아직도 그 편지를 가지고 있어.”
  윤수진이 멋쩍게 미소했다.
  “유치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나는 좀 더 길었으면 하고 아쉽게 생각했지. 아직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다 안 썼다는 느낌이었어.”
  “그랬을지도 몰라.”
  “이따금 그 편지를 꺼내 읽으면서 나는 그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알아내려고 애쓰곤 했어.”
  윤수진이 어깨 끈이 달린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날 아무데나 호텔에 집어넣어 줘. 좀 자고 싶어.”
  나는 수진에게서 가방을 빼앗았다.
  "호텔은 무슨 호텔이야, 수진아. 내 아파트로 가는 거야.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봐야 할 것 아니야."
  윤수진이 묻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눈을 찡긋하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한 번도 결혼해본 적이 없는 독신 남성이야. 가족 같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건 가져본 적이 없어.”
  그 말을 듣는 윤수진의 눈에 어쩐지 안도와 기대감이 반짝했다고 나는 생각하며 그 것이 혹시 나만의 잘못 된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그 느낌을 즐기기로 했다.

  “들여다보지 말어. 알았지?”
  밤 열시가 좀 넘어서 아파트에 도착하자 윤수진은 말 한 마디하고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욕실에서 새어 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담요도 새것으로 바꿔서 덮어 놓았다. 여기 저기 널려 있던 옷가지도 치우고 대충 집안을 정리했다. 침실 하나짜리 나의 작은  아파트에 여자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기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것이 더구나 윤수진이라니. 이곳은 여자는 커녕 나 이외에 살아서 숨 쉬는 포유동물이 한 번도 나와 함께 있어보지 않았던 곳이었다.
  나는 언젠가 샀다가 몇 번 입어보고 팽개쳐 두었던 잠옷 생각이 나서 얼른 꺼내 들고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던져 넣었다.
  “내 잠옷 거기 있으니까 그거 입고 나와.”
  잠시 후 젖은 머리를 말리며 헐렁한 잠옷을 입고 나온 윤수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더운 물에 얼굴에는 홍조가 뜨고 제대로 말리지 않은 몸 이 곳 저 곳에 얇은 잠옷이 물기를 먹고 들러붙어서 차라리 벗은 것보다 더 도발적인 자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게 네가 사는 데야?”
  윤수진이 실내를 신기한 듯 둘러보며 물었다.
  “왜? 초라해 보여?”
  “천만에. 문을 닫아걸면 이것이 나 혼자만의 세계구나 하고 마음 놓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면 그 건 사치스러운 노릇이야.”
  방안을 둘러보는 윤수진의 눈은 언제나와 같이 천진스러워 보였다.
  “참, 너 이거 아니? 나 부자 됐어.”
  “뭐? 부자가 되다니?”
  다소 장난기를 담은 윤수진이 눈으로 웃었다.
  “한국에서 미술 전시회에 갔다가 어떤 노인을 만났어. 미국계 유태인이야. 계속 나만 쫓고 있어서 일 벌어지겠구나 했는데 사실 그렇게 된 거야.”
  “그렇게 되다니?”
  “돈이 많은 사람인데 미술품 수집가래. 같이 말을 하기 시작했어. 그 후에 만났을 때 내 그림을 몇 점 보여줬더니 눈을 크게 뜨며 놀라서 진짜 내가 그린 그림이냐고 여러 번 물었지. 결국 그 노인하고 결혼해서 미국에 오게 된 거야.”
  나는 나의 마음 속에 기묘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짐짓 감추려 했지만 윤수진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죽으면서 많은 재산을 남겨놓아서 부자가 됐다 이거지?”
  “바보 같이 생각하지 마. 나는 그 노인과 십 년을 살면서 얼마나 사납게 그림 공부를 했는지 몰라. 그 노인은 미술품을 감상하는 눈이 천재에 가까웠어. 내가 그린 그림을 조목조목 살펴보고 모진 비판을 해주곤 했어. 내가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림을 못 그리면 광기를 부리면서 살인이라도 할 것처럼 달려들기도 했어.”
  “그래서 아이다호 주에 가게 된 것이란 말이지? 그 노인의 집이 거기에 있어서.”
  “보고 있으면 온 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야. 그 것도 계절마다 풍광이 다 달라. 나는 그 곳에서 풍경화를 천 장도 넘게 그렸을 거야.”
  “고마운 노인이로군. 더구나 죽으면서 재산까지 남겨주고 말이야.”
  나의 목소리에 약간 빈정거리는 냄새가 배어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으므로 당연히 윤수진이 못 느꼈을 리 없었겠지. 그러나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쳐 폐인 같이 된 아들이 하나 있었어. 나보다 나이가 네 살 위였어.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그 아들과 후견인에게 넘겨주고 나에게는 상속세를 다 낸 후 현금 구좌에서 이백 만 불을 꺼내주라고 유언장을 남긴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이백 만 불을 가진 부자가 되어 버렸어.”
  “이백 만 불. 대단하군. 실감이 안 나는 액수야.”
  "그림 공부를 계속하라고 유언했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그 할아버지는 나를 격려해 줬어. 한국에 있을 때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그림들이었는데 그 할아버지는 나를 유명한 화가로 만들어 줬어. 그리고 내 그림을 여러 사람에게 팔았어. 그렇게 팔려나간 내 그림들이 미국 여러 곳에 있는 거야."
  "성공했군. 대단히 성공했어. 이제 내가 곧 위대한 화가의 친구라고 소문나게 생겼어."
  놀랍게도 나의 속물적 마음 속에 질투 섞인 감정이 번져 나왔다.  
  “빈정거리지 마. 샬리스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편안했던 것만은 아니야."
  윤수진의 얼굴이 잠시 괴롭게 이지러졌다.
  “또 다른 무슨 사연이 있었어?”
  수진이 방을 둘러보았다.
  “나, 어디서 자? 침대는 하난데.”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질투심으로 이지러졌던 마음을 후딱 털어버리고 얼른 일어나서 침실을 가리켰다.
  “침대에서 자. 나는 소파에서 잘 테니까.”
  윤수진은 침실로 들어가다 말고 돌아보면서 말했다.
  “고마워. 가슴이 빈 것처럼 느껴질 때면 언제나 네 생각을 하곤 했어. 이건 진짜야.”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으므로 나는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윤수진은 얼마나 피곤했던지 아침 열시가 되도록 일어나지 않아서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 깨워야 했다. 이불 바깥으로 드러난 다리와 발가락이 가지런한 발을 보고 갑자기 불끈거리며 일어나는 충동을 나는 짐짓 억누르며 녀석을 깨웠다.
  “야, 수진아. 웬 잠을 그렇게 자니? 일어나.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응, 하며 돌아눕던 윤수진이 화닥 놀라서 일어났다.  
  “돈 터치 미. 돈 캄 클로스. (건드리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비명 같은 소리에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왜 그래? 나야. 철수야.”
  정신이 든 윤수진은 나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니, 아니야. 나쁜 꿈을 꾼 것 같아.”
  그 당황해 하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 녀석이 아이다호엔가 있을 때 그 유태인 노인의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물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므로 나는 덮고 넘어가기로 했다.
  “배고프다. 빨리 세수하고 나와. 밥 먹으러 가자.”
  어제 밤에 들렸던 같은 곰탕 집에서 역시 윤수진은 어제와 똑같이 허겁지겁 곰탕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딴 사람들 볼까 봐 창피하다, 임마. 너 어떻게 살았기에 그렇게 굶주렸니?”
  녀석은 멋쩍은 표정으로 종지에 하나 남아있던 김치조각 마저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한국을 떠날 때는 그 인습적인 나라와 인연을 끊겠다고 생각했어. 개성과 개인의 자유가 유린된 채 보편화되어야만 살 수 있는 그 사회를 탈출할 수 있게 된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꼭 하나 버릴 수 없었던 게 있었단 말이야. 아이다호로 가기 전에는 그걸 몰랐지.”
  녀석은 계면쩍은 얼굴로 후후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뭔지 알겠어. 음식. 먹는 것. 김치, 깍두기, 곰탕.”
  “빈대떡, 갈비, 불고기, 짜장면.”
  “무교동 감자탕, 명동 돈까스, 종로 3 가 군고구마.”
  내가 말하고 나자 우리 둘은 서로 마주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갑자기 나는 녀석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불현듯 나의 머리 속에 그 때가 되돌아오고 또 그 때 가지고 있다가 승화시키지 못하고 중간에서 재가 되어 버린 꿈과 그 높았던 야망들이 생각나서 잠시 말을 잃었다. 녀석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잠잠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깊게 감정이 배어 있는 그 눈에는 놀랍게도 물기가 반짝 보였다. 녀석이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가 감정으로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나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했다. 녀석의 깊은 눈이 마치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믿을 수 있다는 듯, 마치 어머니의 눈처럼, 누이동생의 눈처럼, 누님의 눈처럼, 그리고 마침내는 가장 친한 친구의 눈이 되어 나를 보았다.
  “너하고 이제 며칠 동안 할 말이 많이 있을 것 같아.”
  우리는 곰탕 집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한국 마켓에 들려서 소주를 다섯 병 샀다.
  “얘, 더 사. 다섯 병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야?”
  녀석의 말에 우리는 마주 보고 낄낄거리고 웃었다. 아예 스물 네 병들이 상자를 통째로 사 들고 나와 트렁크에 실었다. 아파트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내가  말했다.
  “야, 너, 손 한 번 만져볼 수 있니?”
  내 말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얼른 손을 내 주었다. 한 손으로 운전하며 다른 손으로 잡은 녀석의 손은 역시 이 짜식이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주고 있었다. 그 보드라운 손을 만지면서 나는 생각해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그 때 설악산에서 다른 두 녀석에게 유린당한 후에도 그렇게 침착했던 윤수진을 생각했다. 갑자기 나는 그 때 보았던 윤수진의 벗은 알몸을 생각하고 본의 아니게 아랫도리가 뿌듯하게 부풀어 올라 당황했다. 그 때 나의 성기를 잡았던 그 따뜻한 손을 나는 지금 녀석의 손에서 다시 느끼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잠잠해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예민한 녀석이 이미 알아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멋쩍어져서 얼른 녀석의 손을 놓았다.
  힐끗 나를 훔쳐본 윤수진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나의 곁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짜식이 짓궂게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니?”
  나는 괜스레 화난 얼굴이 되어 생각은 무슨 생각, 어쩌고 하면서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우리는 문을 안에서 닫아걸고 소주를 하나씩 따서 병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그랬듯이 윤수진은 알코올에 강해서 내가 한 병을 비울 때에 벌써 두 병째를 치워내고 있었다.
  “야, 천천히 마셔. 오늘 하루 종일 마실 건데.”
  윤수진이 너무 빨리 취해 버리면 대화의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아서 내가 말했다. 더구나 이 녀석은 알코올 기가 적정선을 넘게 되면 독기를 품고 냉소적으로 되는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윤수진은 대답 없이 세 번째의 소주 병을 따고 있었다.
  “네가 봉급쟁이를 그렇게 오랫동안 착실하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 재능이 있는지를 몰랐어.”
  “비꼬는 거냐?”
  윤수진의 말에 내가 다소 반항기를 담고 말했다. 윤수진이 내 마음을 꿰뜷어 보고 있다는 듯 나를 보며 미소했다. 나는 윤수진의 눈을 피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자조감을 가지고 자신 없게 말했다.
  "빈정거려도 괜찮고 비꽈도 괜찮아. 네게서 존경 받을만한 가치 있는 생활을 해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아니. 그런 뜻은 아니야. 어쩌면 네가 선택한 길이 최선의 길이었는지도 몰라. 열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가고 꿈은 우리가 나이 들면서 현실에서 자꾸 멀어지게 되어 있는 거니까."
  나는 왠지 이 녀석에게 정신적으로 눌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지나고 보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런 철없는 생각만 가지고는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 반항과 비판과 기성 사회에 대한 경멸만 가지고는 안 돼. 혼자서 반대 쪽에 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배운 거야. 무리 속에서 떨어져서 혼자 서는 것이 이제는 무서워지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나는 고집덩어리의 외톨백이 너를 몹시 걱정했는데 사회에 잘 묻어 들어 가서 살고 있는 것을 보니까 안심이 돼.”
  윤수진은 마치 보호자나 되는 것처럼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경멸스럽다 이거냐?”
  “아니.”
  짧게 대답하고 녀석은 새로 딴 소주 병을 들어 절반 정도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너, 글은 전연 안 쓰고 있어?”
  윤수진의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글? 그랬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떠들어대던 패기만만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목적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정거장에 내려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서성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아, 그거 다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 버렸어.”
  윤수진은 또 소주 병을 들어 두어 모금 꿀꺽거리며 마셨다.
  “그럼 너는 바보야. 네가 그렇게 경멸하던 보통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바보야. 바보에다 위선자야. 바보이면서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바보들을 경멸했으니까 말이야.”
  어? 이 짜식이 시비를 걸어 오고 있어. 나는 가슴 한 구석에 뜨끔하게 찔리는 느낌을 받으며 생각했다.
  “너, 오랜만에 만나서 내 아픈 데를 찌르는 거냐?”
  “아퍼? 그럼 다시 글을 쓰면 될 거 아냐?”
  나는 꽝, 하고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다시 글을 쓴다고? 윤수진이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 말을 소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나는 네가 뭔가 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너는 그런대로 좀 괜찮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
   뜻하지 않은 충격 속에서 나는 그 때 그렇게 맹렬히 매달려서 밤잠을 설치며 써대던 정열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 그 모든 것이 없어지고 이렇게 되었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갑자기 잠잠해져서 손에 잡은 소주병을 만지작거렸다.
  윤수진도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따금 나의 눈치를 보던 윤수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해볼 생각 없니? 나는 네가 멋진 걸 만들어낼 수 있다고 틀림없이 믿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야.”
  죽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불꽃이 마음 속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그렇게 어떤 목적을 위해 도전하던 활화산 같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났다. 나는 혼란스런 마음으로 어지럽게 빙빙 도는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보통 사람처럼 사는 것도 재능이야. 돈을 벌고 지위가 올라가고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고, 이 모든 것이 다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너는 그런 재능이 없어. 너는 글을 안 쓰면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야.”
  말을 마치면서 윤수진은 자리를 옮겨 나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남자들 끼리 처럼 나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고 나를 보았다.
  “우리 다시 하자. 다시 또 해 보는 거야. 남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그냥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야.”
  녀석의 뜨거운 입김이 죽었던 그 시절을 부활시키고 나의 잿더미 속에서 불씨를 찾아 다시 살려놓기 시작했다.
  “짜식, 물귀신처럼 없어지지도 않고 나타나서 이따위 괴로운 소리를 하고 있어.”
  나는 신음하듯 말했다. 녀석이 위로하듯 나의 팔을 자기 가슴에 안았다.
  “너하고 나는 같은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해. 우리는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재능을 가지지 못한 거야.”
  우리 둘은 잠시 그냥 앉아서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녀석이 작게 그리고 괴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나는 죽을 때 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
  녀석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수진아, 너, 우는 거냐? 너 취했어?”
  윤수진이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갑자기 어릴 때 일이 생각나. 시골에서 자랐거든. 가난하게 말이야. 손수레에 과일을 싣고 돌아다니는 행상이 왔어. 사과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웠던지 나는 그 행상이 가는 데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 유난히도 빨간 사과만 보고 있었지. 그 행상이 나중에는 불쌍하게 생각했던지 사과를 하나 줬던 거야. 나는 그걸 받아 들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집으로 뛰었어. 엄마에게 보여주려고 말이야. 그런데 그만 중간에 떨어트려서 퇴비를 만드는 구덩이 속에 빠트려버리고 말았지 뭐야. 거기 쪼그리고 앉아서 사과가 빠져 들어간 곳을 보며 해가 질 때 까지 울고 또 울었던 생각이 나.”
  수진의 두 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도 한 물 갔구나. 그렇게 쉽게 울고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나도 울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엄마는 인텔리였던 것 같아. 초등학교 일학년 때 그린 그림을 보고 엄마는 내가 아주 유명한 화가가 될 거라고 좋아했어.”
  “그 엄마는 지금 어디 있어?”
  “내가 여덟 살 때 병으로 죽었어. 무슨 병인지 진단도 받아보지 못하고 말이야.”
  “아버지는?”
  “몰라. 기억이 안 나. 난 아버지가 없었나 봐.”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수진을 위해서 나는 가슴으로 울었다. 그리고 방향을 잃고 낯선 곳에서 서성거리며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울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내 마음속의 고통 때문에 나는 그림을 그려야 돼. 나는 그래서 너도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팔을 뻗어 윤수진의 어깨를 안았다.
  “엄마가 죽고 나서 어떻게 했어?”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갔어. 그런데 그 할머니도 일 년이 채 되기 전에 돌아가셨어. 그 때부터 나는 혼자가 된 거야. 그래서 나는 고아원에서 컸어.”
  “너는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그 전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나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커야 했던 윤수진을 생각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술이 취하면 암사자처럼 표독스러워지던 녀석이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 나의 품 안에서 울고 있는 윤수진은 그저 가냘픈 하나의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
  녀석의 젖은 눈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는 없었어.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원해.”
  나는 잠시 그 말의 뜻을 되새기다가 가슴 속으로 아프도록 파고드는 정을 느끼고 윤수진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아주 길게 키스했다. 이제 여자가 된 녀석의 온몸이 열병에 걸린 것처럼 달아 있었다. 나의 귀뿌리에 와 닿는 숨결이 뜨겁고 거칠었다.
  우리 둘은 숨 가쁘게 부둥켜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벗겨내고 카펫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져 하나가 되었다.
  나는 녀석의 몸을 부서질 것처럼 부둥켜안고 녀석의 안으로 깊이 들어가 몸부림치며 신음하듯 말했다.
  “짜식, 너는 나를 울게 만들고 있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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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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