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수진아 (제 4 회)

2013.03.26 03:31

김영문 조회 수:207 추천:28

                                       수진아, 수진아 (제 4 회)

(6)

윤수진은 열 여덟 시간이나 타고 온 비행기의 여독과 새로 전개되는 생활에 대한 긴장감에 지쳐 곤하게 자고 늦은 아침에 깨어났다. 밖에는 어젯밤의 눈보라와 태풍이 언제 그랬더냐는 듯 깨끗하게 멎어 있었다. 생전 처음 으리으리한 침대에서 자고 눈을 뜬 윤수진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나왔다. 창문으로 가서 커튼을 활짝 걷어내자 거의 벽 전체를 차지한 두터운 이중 유리 창문을 통하여 커튼 밖에 붙잡혀 있던 눈부신 햇살이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그 창문 밖에는 백색의 눈으로 덮인 광활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 평원의 끝에는 역시 어지럽도록 햇살을 반사하며 하얀 산이 밋밋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윤수진은 자기도 모르게 아아, 하고 경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 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윤수진의 온몸으로 고압선에 감전된 것 같은 전율이 지나갔다.
한참을 그 풍경에 도취되어 넋을 잃고 보던 윤수진이 정신을 차리고 마악 창문에서 돌아서려는데 어제 보았던 그 키 큰 개 버디가 눈밭 위로 껑충 껑충 춤추듯 뛰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죠세프의 아들 제이콥도 역시 춤추듯 버디의 뒤를 따라 뛰어서 윤수진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윤수진은 다시 창문으로 다가가서 눈 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그 둘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둘은 마치 철 모르는 어린아이들처럼 뛰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눈 위에 쓰러지기도 하고 또 일어나서 뛰며 한참을 즐겁게 놀았다.
똑, 똑, 똑.
그 모습에 취해서 정신 놓고 창 밖을 내다보던 윤수진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흠칫 놀라서 돌아섰다.
“디스 이스 마리아. 마리아예요.”
윤수진은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쓸어 내리며 문으로 가서 어제 밤 마리아가 시킨 대로 잠갔던 이중 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밖에는 마리아가 은 쟁반에 오렌지 주스가 담긴 유리 잔을 들고 서 있었다.
“디드 유 슬립 웰? 잘 잤어요?”
은 쟁반을 창가의 탁자에 내려 놓은 마리아는 창 밖으로 보이는 제이콥과 버디의 모습을 발견하고 잠시 내다 보다가 돌아섰다.
“저렇게 착하고 어린아이 같은 제이콥이 왜 이따금 그런 ……”
마리아는 말하다 말고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윤수진이 서툰 영어로 물었다.
“홧? 홧 이스 디스? 텔 미. 뭐예요. 내게 말해 줘요.”
그러나 마리아는 대답을 회피하고 돌아섰다.
“아래 층에 스타인버그 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싶대요.”
마리아는 윤수진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눈짓하고 나갔다.
윤수진은 서둘러 몸단장을 하고 방을 나왔다. 모두들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인데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식탁에는 이미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고 죠세프 스타인버그는 식탁을 등지고 창문에 서서 뒷짐을 지고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윤수진이 계단을 내려오는 기척에 죠세프가 창문에서 돌아섰다.
윤수진은 마주친 죠세프의 눈이 어쩐지 차분하고 감상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잘 잤나? 침실은 마음에 들었나?”
죠세프가 물었다.
“굿. 잇 워스 베리 굿.”
윤수진이 다소 쑥스러움을 느끼며 짧은 영어로 대답했다.
“씻 다운. 앉아.”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대형 식탁의 한 쪽에 앉았다.
“안에서 내다보면 화창하고 좋은 날씨인 것 같지만 실제로 밖에 나가면 매섭게 추워. 여기는 추운 땅이야. 디스 이스 어 콜드 랜드.”
윤수진은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익숙치 않은 음식들을 어색하게 훔쳐 보았다.
죠세프가 먹으라고 손짓을 할 때에야 비로소 윤수진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죠세프는 익숙한 솜씨로 베이콘과 후라이 된 계란을 베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이 곳은 날씨가 사나워서 나 같은 노인이 살기에 적당치 않지만 내가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곳이야. 소련에서 유태인 박해가 심할 때 아버지와 탈출해서 무일푼으로 정착했던 곳이 여기니까. 아버지가 미국 땅에 아는 사람이 꼭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여기에서 살았지. 우리는 그 집에서 그 사람 사업도 돕고 농장 일도 하고 집안 일도 하면서 마치 하인처럼 얹혀서 살았어. 그 친구라는 사람은 어찌나 못 된 사람이었는지 내 아버지를 개 취급했지. 아버지는 그래도 성실하게 그 사람 일을 해주며 묵묵하게 아무 불평하지 않고 살다가 한 번도 마음 편한 생활을 해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어. 그렇게 죽은 아버지가 살던 고장이니까 나는 여기를 떠날 수 없어. 아버지의 묘소도 이 집 뒤뜰에 모시고 있어.”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었는데 죠세프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엄청난 갑부가 되었을까? 윤수진은 알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윤수진의 마음을 죠세프는 읽은 모양이었다.  
"조그만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아버지와 소련을 탈출해 나와서 여러 곳을 돌다 마침내 여기 와서 아버지 친구의 집에 얹혀 살았는데 이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모양이로군. 당연히 호기심이 나겠지. 나중에 시간이 나고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해주기로 하지."
윤수진은 호기심으로 남의 방을 몰래 훔쳐 보다가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을 붉혔다.
“나는 오늘 밤 뉴저지로 떠나. 당분간 거기서 있게 될 거야. 식사가 끝나면 아틀리에를 열어줄 테니까 마음에 드는 대로 정리하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해. 그 전에 이 아틀리에를 쓰던 젊은 녀석은 시카고의 미술 대학 출신인데 아무리 알려주고 가르쳐 줘도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아서 쫓아내 버렸지. 아직 그 녀석이 그렸던 그림들이 아틀리에 안에 많이 남아 있어. 아무 데도 쓸 수 없는 쓰레기들이지. 수진이는 한국을 떠날 때 내가 약속한 것처럼 다른 걱정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릴 수 있도록 해 줄 테니까 좋은 작품을 많이 창작해내도록 해. 한국에서 내가 본 수진의 그림들은 틀림없이 걸작이 나올 것이라고 내게 예고해 줬어. 수진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수진하고의 결혼 서약서에 도장 찍고 미국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겠지.”
죠세프는 결혼을 마치 물건을 사고 파는 흥정인 것처럼 쉽게 말하고 있었다. 윤수진은 그러나 어쨌든 상관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림만 계속 그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어찌 되었건 아무 관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식사가 끝나자 죠세프는 윤수진을 데리고 집 안의 긴 복도를 앞장 서 그 끝에 있는 방으로 가서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수진에게 주었다.
“여기야. 여기가 수진이 작업실이야.”
높은 천정은 지붕을 따라 비스듬히 경사져 있었고 한쪽 벽은 거의 전부가 유리로 된 창문이었다. 그 창문으로 바깥의 흰 눈에 반사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죠세프는 윤수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벽에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전등 스위치를 차례로 올렸다.
“피사체를 놓고 그림을 그릴 때 조명을 제대로 받게 하기 위해서 뉴져지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특별히 설계해서 만든 시설이야.”
스위치를 다 올리자 아틀리에 안은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전등 빛이 어우러져 눈 부시게 밝아졌다. 죠세프는 고개를 돌리며 조명등을 확인하다가 높은 곳 한쪽 구석에 여러 개의 전구 중 하나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자 얼굴을 찡그렸다.
“칼로스.”
방안이 찌렁찌렁 울리는 큰 목소리로 칼로스를 불렀다.
“네, 스타인버그씨.”
먼 곳에서 칼로스의 답이 소리쳐 들려왔고 순식간에 칼로스가 방문에 나타났다.
죠세프는 찡그린 얼굴로 천정 구석의 죽은 전구를 보며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전구가 죽어 있는 것이 보이겠지?”
“보입니다. 곧 갈아 끼우겠습니다.”
황망히 대답하는 칼로스를 죠세프가 손짓해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갑자기 윤수진은 아틀리에 바깥쪽 어디엔가에서 들려오는 기타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느꼈다. 죠세프도 귀를 기울였다.
“저건 제이콥이야. 예술 감각이 예민하고 아주 좋은 아이였는데 그만………”
끊어질 것처럼 이어지며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의 기타 소리를 들으며 윤수진은 제이콥의 기타 솜씨에 놀랐다.
죠세프는 아틀리에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 속에서 스트레쳐에 붙여놓은 오일 페인팅을 한 점 집어서 가슴 앞에 들어 보였다. 윤수진이 보기에 그 그림은 첫눈에는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원근법도 맞지 않고 색깔의 배합도 몹시 서툰 그림이었다.
“여기서 한 일 년 동안 내가 데리고 있던 녀석의 그림이야. 아무리 가르쳐줘도 발전이 없어서 포기하고 내보냈지. 내 고객 아무도 이 녀석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어.”
말하면서 죠세프가 하나씩 들어서 보여주는 그림들은 모두 구상화들이었는데 죠세프의 설명처럼 한 점도 마음이 끌리는 그림이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자세히 들여다보고 혹시라도 쓸만한 그림이 발견되면 나에게 보여줘. 왜 그 그림이 괜찮다고 생각되는지 서로 의견을 나누는 사이에 수진은 내가 원하는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알게 될 것이고 또 나는 수진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지도 알게 될 테니까 말이야.”
죠세프는 이번에는 여자의 나상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나무 상자 안에서 꺼내 들고 윤수진에게 보여 주었다. 벌거벗고 비스듬히 앉은 여자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역시 구도가 맞지 않고 머리 크기에 비해서 손과 발이 너무 작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 그림의 모델이 됐던 여자는 이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 눈이 맞아서 내게서 쫓겨나자 둘이서 뉴욕으로 갔다고 소문을 들었지.”
윤수진은 죠세프의 설명을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귀를 기울이니 어느 사이엔가 제이콥의 기타 소리가 멎어 있었다. 그 창백하고 섬세해 보이는 제이콥의 얼굴이 생각났다. 뜻밖에도 따뜻하고 남자의 것 답지 않게 보드라웠던 손.
“제이콥. 들어와도 돼.”
죠세프가 그림 사이를 뒤적이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윤수진은 놀라서 문쪽을 보았다. 어느 사이에 제이콥이 문간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그 옆에는 버디가 같이 서 있었다.
윤수진은 다소 당황스런 기분이 되어 제이콥이 언제부터 거기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생각했다.
“하이, 수진.”
어제처럼 멈칫거리며 제이콥이 안으로 들어왔다. 잘 훈련된 버디가 점잖은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하이, 제이콥.”
윤수진도 제이콥에게 미소하며 답했다. 버디가 이제 서로 아는 친구가 되었다는 듯 윤수진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와서 킁, 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윤수진은 어제 제이콥이 가르쳐 준대로 버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버디는 또 킁, 킁거리고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제이콥, 내가 없는 사이에도 수진하고 잘 친하고 혹시 수진이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잘 도와줘야 해. 그리고 수진이 그림 작업을 할 때는 절대 방해해서는 안 돼. 알았지?”
“오우 케이.”
죠세프의 말에 제이콥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윤수진을 보며 대답했다. 윤수진은 그 것이 천진스럽고 티 없는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윤수진은 아틀리에에서 전에 있던 사람이 그렸던 그림을 차례로 꺼내 보기도 하고 물감과 캔버스 따위를 정리하기도 하면서 오후 내내 시간을 보냈다. 죠세프의 말 대로 그 그림들은 어느 것도 윤수진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오후가 되자 죠세프가 아틀리에에 들어와서 휘이 둘러보고 미소했다.
“정리가 잘 되어 가고 있군. 빨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야지.”
그리고는 윤수진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 방은 나갔다. 뉴져지로 가기 위해서 칼로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비행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같이 죠세프의 뒤를 따라 나갔던 버디가 큰 키에 껑충거리면서 아틀리에로 되돌아와 윤수진의 옆에 앉았다. 윤수진이 손을 내밀자 버디는 꽤 듬직하게 보이는 앞 발을 하나 들어 악수하듯 윤수진의 손 위에 올려 놓았다. 버디가 보여주는 그 친근감에 윤수진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뒤따라 제이콥이 들어왔다. 역시 죠세프가 했던 것처럼 아틀리에 안을 휘이 둘러 보고 말했다.
“많이 달라지고 있어요. 혹시 내가 도와 줄 일이 없을까요?”
윤수진은 어쩐지 제이콥이 자기 옆에 있을 수 있는 구실을 찾기 위해서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예스, 아이 니드 유어 헬프. 도울 일이 있어요.”
제이콥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홧 이스 잇? 텔미. 뭐예요? 말해요.”
같이 일할 수 있다는데 신이 난 제이콥을 데리고 윤수진은 밤이 늦을 때 까지 아틀리에를 정리하고 청소했다. 해가 떨어지고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윤수진은 아까 죠세프가 보여준 여러 개의 전등 스위치를 이 것 저 것 올렸다 내렸다 하며 찾아서 알맞게 은은한 불로 실내를 밝혔다.
윤수진과 제이콥은 반나절 동안의 일에 지쳐서 손을 씻고 마리아가 준비해서 갖다 준 햄버거 저녁을 아틀리에 의자에 앉아서 같이 먹었다. 잠시 햄버거를 먹던 윤수진이 물었다.
“제이콥, 제이콥은 하루 종일 뭘 해요? 직업이 뭐예요?”
물어 놓고서 윤수진은 아차, 쓸데없는 걸 물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제이콥이 먹던 햄버거를 놓고 당황한 표정이 된 것이다.
머뭇거리던 제이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해요. 아버지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 하고 물으려다가 윤수진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제이콥은 순진스럽게도 윤수진이 알고 싶은 것을 말해주었다.
“팔년 전에 교통사고가 났거든요. 여름이었어요. 엄마를 태우고 내가 운전하고 가고 있었어요. 별로 빨리 달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차가 내리막 길에서 미끄러지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졌어요.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어요. 나는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까 병원이었어요.”
“어머니는?”
제이콥은 버디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 보았다.
“죽었어요.”
윤수진은 훅, 하고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쏘리 투 히어 댓.”
둘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이해라도 하는 듯 버디가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제이콥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때 머리를 다쳐서 수술을 받으면서 병원에서 한 반 년 동안을 지냈어요. 그러고부터 나는 잘 생각할 수가 없어요. 이따금 무서운 생각이 날 때도 있고 내가 뭘 했는지 기억 못 할 때도 있어요.”
윤수진은 연민의 정을 느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내가 아무데도 나가지 말고 집에서만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제이콥은 어두워진 창 밖을 내다보던 눈을 돌려 버디의 목을 끌어 안았다.
“나는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밖에도 나가고, 일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요.”
윤수진은 제이콥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고통과 고민을 같이 느끼고 있었다.
“수술을 한 번 더 받으면 정상이 될 수도 있대요. 그런데 그 수술이 위험해서 잘못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해서 아버지는 수술을 더 안 받겠다고 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윤수진은 일어나 창문으로 가서 더욱 캄캄해져 가고 있는 창 밖을 가리기 위해서 두터운 커튼을 치려고 했다.
“그건 여기서 하면 돼요.”
제이콥이 얼른 일어나서 말하고 전등 스위치가 있는 벽으로 가서 거기 한 무더기 있는 스위치들 중에서 “CLOSE”라고 씌어진 커튼 스위치를 눌렀다. 천정에 붙어 있는 레일을 타고 전기 작동하게 되어 있는 커튼이 양쪽에서 소리없이 미끄러져 닫혔다.
아, 하며 윤수진은 닫히는 커튼을 보다가 다시 돌아와 앉았다.
“이제부터 우리 같이 친구가 되어서 지내면 좋겠어요.”
제이콥의 얼굴이 환해져서 윤수진을 보았다.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세요?”
제이콥이 갑자기 뜻밖의 질문을 했다. 미처 생각 못했던 질문에 윤수진은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미워하다니요? 누구를? 제이콥을?”
제이콥이 시선을 피하며 침묵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제이콥은 누구나가 다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윤수진은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말했다.
제이콥은 여전히 윤수진의 눈을 피하며 버디의 목을 쓰다듬었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처음에는.”
말을 마치고 잠시 윤수진의 시선을 피하며 앉아 있던 제이콥이 일어나서 버디에게 나가자고 고갯짓했다.
“버디, 레츠 고우. 수진, 잘 자요. 내일 또 만나요. 굿 나잇.”
“그래. 제이콥, 굿 나잇. 도와줘서 고마워요.”
버디가 수진에게 다가와 작게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고 제이콥을 따라 나갔다.
윤수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제이콥은 내가 자기를 미워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7)

  "샬리스에서의 생활을 나는 그렇게 시작했어. 죠세프하고 결혼한 것은 행정상의 절차였을 뿐이지 나는 그 사람을 일 년에 서너 번 밖에 볼 수가 없었어. 만날 때마다 아틀리에에서 그 동안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죠세프는 맹렬히 비판하고 난도질하곤 했었지. 그림을 보는 눈이 날카롭고 집념이 대단한 사람이었어. 좀 변태적이라고 할 만큼 집념이 강했어."
  의자 위에서 자기 무릎을 안고 쪼그리고 앉은 윤수진은 말하면서 부수수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나는 팔베개하고 누운 채 윤수진을 보며 내 기억에 남아 있던 사내아이 같기만 하던 녀석의 모습과 다르게 성숙하고 매력적으로 변해서 내 앞에 나타난 이 완전한 여자를 보며 신기한 느낌을 느끼고 있었다. 치렁거리며 어깨까지 흘러 내린 검은 머리가 짜식을 더 여성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피스닉(PEACENIK)이라고 자칭하며 그렇게 반항적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몰랐었는데 짜식이 이 정도의 매력 있는 여자였다면 화장 좀 하고 옷도 여자답게 입고 다녔다면 꽤 괜찮은 남자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것이 과연 윤수진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길이었을까?
  "죠세프의 아들 제이콥은 한없이 착한 사람이었어. 하루 종일 상대해 줄 사람이 칼로스와 마리아 뿐이고 친구라고는 그 키 큰 개 버디 뿐이었는데 내가 나타나니까 그렇게 좋았던 거야."
  나는 듣고만 있다가 충동적으로 덧붙였다.
  "나이도 너보다 네 살인가 위였다면서 혹시 그 제이콥이 너에게 연정을 느낀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윤수진의 볼에 희미하게 홍조가 지나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잡아낼 수 있었다.
  "이상하게 되어 버렸겠군. 너는 그 제이콥의 아버지와 결혼한 걸로 되어 있는데 말이야. 아무리 형식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어디 나가서 밥 먹자. 배고프지 않니, 너는?"
  윤수진은 나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딴 말을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또 곰탕 먹으러 갈까?"
  "딴 건 없어?"
  짜식이 곰탕 두 번 먹더니 벌써 싫증이 난 모양이었다.
  "짜장면?"
  윤수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짜장면. 그래.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가자. 시청 앞 중국 골목에서 먹던 그런 짜장면 있을까?"
  우리는 대충 세수하고 머리 빗어 넘긴 후 내가 이따금 들리곤 하던 34번 가에 있는 중국 집을 찾아갔다. 대개 작은 비지니스를 하는 소수 민족들이 그렇듯이 일요일에도 그 중국 집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주인 내외가 밤낮없이 같이 일하면서 운영하는 집이었는데 짜장면이 아주  맛있는 것으로 소문 나 있었다. 이 내외는 한국에서 이민 온 화교였는데 한국이라는 나라에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언젠가 아는 사람 몇 명이서 그 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빼갈을 마시며 미국의 이민 정책이라든가 인종 차별등에 대해서 잡담하듯이 떠들었는데 이 집 주인 여자가 먼 발치에서 듣고 느닷없이 달려 들어서 한국 사람들이 인종 차별에 대해서 뭐 불평할 자격이 있느냐고 따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여자는 오랜 세월 가슴 속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는 듯 죄없는 우리에게 속사포 쏘아대듯 한국을 맹렬히 비판해 대었다.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천정으로 치닫던 시절 설렁탕 값은 올려 줬지만 정부 고시 가격이랍시고 짜장면 값은 묶어 놓았다던가,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이 짱꼴라라고 놀려대서 자기네 아이들이 수업을 못 받고 울면서 집에 도망쳐 들어왔다던가, 밀가루 파동이 일어났을 때 딴 한국 사람들에게는 밀가루를 팔면서 자기네에게는 안 팔아서 며칠 동안이나 가게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던가, 끝도 없이 계속 튀어 나왔었다. 그 남편이 뛰어와서 말리고 우리에게 사과하면서 간신히 무마가 되었지만 나와 같이 갔던 한국 사람들은 기분이 나쁘다면서 젓가락 팽개치고 음식 놓아둔 채 돈도 안 내고 나가 버리고 말았었다.
  "그 때 짱꼴라라고 놀려서 울고 들어왔던 우리 아이들이 지금은 미국에서 하나는 의사 해. 볼티모아 죤스 홉킨스 대학 병원 내과 의사야. 그 아이 여동생은 지금 의상 디자이너야. 인종 차별이 미국에도 있지만 한국에서 보다는 여기 괜찮아 해. 우리 아이들 다 잘 됐어. 짱꼴라 아이들 다 잘 됐어. 돈도 많이 벌어 해."
  나와 같이 왔던 한국 사람들은 나가 버렸지만 나는 그렇게 무책임하게 자리를 뜰 수가 없어서 숙연한 자세로 그 여자의 맹공격을 다 듣고 있었다. 그러자 여자는 흥분이 가라 앉으며 다소 미안했던지 덧붙였다.
  "물론 당신이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인종 차별 얘기를 하니까 한 마디 한 것 뿐이야."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다 수긍한다는 자세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잘못 된 일들이 많이 있었지요. 아마 지금도 또 많은 나쁜 점들이 있을 겁니다. 어쩌는 수가 없지요. 인간이 가진 더러운 속성인 걸요. 대개 못난 사람들이 더 잘났다고 으스대고 싶어하는 것 아닙니까?"
  그 남편이 와서 백배 사과하면서 자기 아내를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일이 있었어, 이 집에서. 그 이후부터 나는 이 집을 잊지 않을 만큼에 한 번씩 찾아와서 식사를 하곤 했지."
  윤수진에게 설명을 하면서 그 중국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그 여자 주인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한국에서의 나빴던 시절을 용광로처럼 달아서 떠들었을 때 수긍하고 가만히 듣고 이해해 줬던 나는 여자 주인의 마음 속에서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짜장면을 둘 시키자 남자 주인이 잠시 후 작은 빼갈 한 병을 들고 와서 식탁에 놓았다.
  "이건 우리가 내는 겁니다."
  짜장면을 시키면 꼭 작은 빼갈 한 병을 시켜서 반주하는 내 습관을 알아준 것만도 고마운데 돈을 안 받겠다는 것이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윤수진과 한 잔씩 마셨다.
  "한국에 사는 중국 화교가 한국 사람에게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면 중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중국 사람에게서 차별 대우를 받겠지. 백인 우월 주의자들은 우리 모두를 싸잡아서 열등 민족이라고 멸시하고, 히틀러는 유태인을 전멸시키고 싶어했고 말이야."
  "짜장면 맛있다."
  내가 스을슬 열 받아서 흥분할 기색이 보이자 윤수진이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눈웃음을 치며 말하고 또 젓가락으로 큼직하게 짜장면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야, 윤수진, 너 내 말 듣는 거냐?"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자. 그런 심각한 화제는 짜장면하고 잘 어울리지 안 잖아."
  짜식의 말이 맞기도 했지만 가만히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짜장면하고 안 어울리는 대화는 없어, 임마. 더구나 빼갈이 곁들여 있는데 말이야."
  윤수진은 내 말을 들으며 또 젓가락으로 크게 짜장면을 떠서 입에 넣었다. 입가에 짜장이 묻어서 까맣게 반질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입을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더니 앞에 놓여 있던 작은 잔의 빼갈을 들어서 훌쩍 마셨다.
  "야, 이철수. 인종 차별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 없어질 수 없는 영원한 문제야. 인종과 종교 분쟁이 바닥에 깔려 있는 전쟁은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오래 가는 전쟁이 되는 거야."
  "알고 있어. 그런 인간 속성에 반기를 들고 평화를 사랑하자고 맹세했던 것 기억 나? 인종과 종교와 국경을 넘어서 모두를 항상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했던 것을 말이야.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나와 다른 종교를 신봉하며 나와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나와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다른 인생관, 다른 철학,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지성이라고 부른다고 말했지. 그래서 우리는 피스닉 (PEACENIK)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이름 붙이지 않았어? 평화족이라고 말이야."
  말하면서 나는 그 십년 전이 생각나자 갑자기 가슴이 허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때는 그런 인간에 대한 분노감 때문에 맹렬하게 글을 쓰고 싶어 했었다. 절대 그 보통 속물들과 똑같이 살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하지 않았었는가.
  윤수진이 작은 병에 든 술을 스스로 자작해서 훌쩍 마시고 말했다.
  "나는 그 때 네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해. 자유, 평등, 평화. 너는 이 듣기에 감동스러운 모든 말들이 인간 사회에 진정으로 뿌리 깊게 존재해 본 적이 없다고 그랬어. 저 높은 곳에서 하느님이 하강해서 이 인간 사회를 통치하지 않는 이상 그런 것들은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영원한 이념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어."
  나는 윤수진의 말을 들으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느꼈던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분노감도 다시 떠올랐다.
  "그 때 너는 이 인간 사회를 혐오하고 이기적이고 투쟁적인 인간들에게 분노하고 있었어. 그래서 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었어. 그런 너의 생각과 분노를 글로 표현하겠다고 했어. 글을 쓰겠다는 사람마다 그 동기가 다 다른데 너는 그 분노감 때문에 글을 쓰고 싶다고 했어. 내가 읽었던 네가 쓴 소설 중에는 꽤 괜찮은 것들이 있었거든. 그 때 나는 네가 좋은 작가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네가 글을 쓰지 않고도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은 뜻밖의 발견이야. 나는 네가 글을 쓰지 않으면 죽어 버릴 줄 알았어. 빼갈 한 병 더 하자."
  말하고 윤수진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또 한 병을 주문해 버렸다.
  나는 어쩐지 주눅이 들어서 눈을 내리깔고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술병이 오자 윤수진은 내 잔을 채우고 자기 잔에도 자작했다.
  "마셔."
  윤수진은 자기 잔을 들어서 훌쩍 마시고 또 자작했다.
  "너 그 때 썼던 원고들은 다 가지고 있니?"
  "아니."
  "거봐. 너는 네 팔 다리를 잘라서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네가 쓴 글은 너의 생명이야. 네 몸의 한 부분이나 마찬가지야. 어떻게 그렇게 허술하게 버릴 수 있어?"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것은 너밖에 없었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뭐? 그래서라니?"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버렸다는 거야?"
  나는 녀석의 기세에 눌려서 입을 다물었다.
  "너답지 않은 소리야.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버렸다면 그 건 잘못이야. 꼭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어야만 좋은 작품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는 거야. 네 작품이 안 읽히는 것은 글을 쓴 네가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안 읽는 바보들의 이해력이 부족하고 정신 능력이 뒤져 있기 때문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해 볼 수 없겠어? 남보다 높은 곳에 우뚝 서려면 그 정도는 오만하고 건방져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써놓고 보니까 숙성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된다면 묻어두고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읽어서 고치고 보완해서 더 좋게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던져버리고도 괜찮을 수 있었다면 네가 가졌다는 그 분노가 가짜 분노였다는 뜻 밖에는 안 되는 거야."
  녀석의 기세에 눌려서 잠잠하던 내 속에 은근히 반발심이 밀고 올라왔다. 녀석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더 화가 났다. 나는 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이치에 잘 맞는다고 생각되면 더 화가 나는 기질이 있었다.
  "야, 윤수진."
  "왜?"
  "이론과 현실의 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있지."
  "그렇다면 말처럼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들, 대중들을 무시하고 나만의 생각으로, 내 오기로만 이 세상을 독뿔 장군 식으로 살 수 없다는 현실적 진리도 알고 있겠군."
  내 말에 윤수진이 다소 누그러지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짜장면 마지막 몇 오라기를 젓가락으로 긁어서 입에 넣더니 나프킨으로 입가를 쓰윽 닦고 윤수진은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다는 다소 조용해진 목소리였다.
  "현실적 진리? 그런 진리는 없어. 그건 진리가 아니야. 십년 전 날이 파랗게 섰던 시절보다 우리가 무디어 진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그 근본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본 자체가 없어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 살다 보니까 나도 강의 이쪽에 동떨어져서 혼자 서는 것이 두려워진 것은 사실이야. 맹렬한 비평과 반항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사실이야. 그러나 그건 약간의 타협이야. 현명한 수정일 뿐이야.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 근본 생각의 소멸이 아니라는 말이야."
  나는 비뚤어진 마음으로 침묵했다.
  중국 집을 나오니 일 월 뉴욕의 바람이 매서웠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윤수진은 나를 맹타하던 독수리에서 다시 여자로 변해갔다. 침묵하는 나의 눈치를 보다가 윤수진은 내 팔을 가슴에 안고 매달리며 말했다.
  "이철수, 화났어?"
  나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아니."
  "너 글 다시 쓰게 만들기 위해서 해보는 소리야. 화내지 마. 알았지?"
  "동기부여를 해주겠다는 그 거룩하고 갸륵한 뜻을 알고 있어."
  "그럼 됐어. 나는 네가 꽤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될 거라고 틀림없이 믿고 있었어. 나는 지금도 네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어."
  나는 차의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바닷가에 가보자. 바다를 보고 싶어."
  윤수진의 말에 나는 리버티 스테이트 파크로 차를 몰았다.
  차에서 내린 윤수진은 시야가 터진 바다를 내려다 보며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깊은 눈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자유의 여신상과 엘리스 섬이 멀리 내려다 보였다.
  "저 것이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민 수속을 밟았던 유명한 엘리스 섬이야. 그 안에 이민 박물관이 있어."
  가난하고 박해 받던 사람들이 자유와 번영과 희망을 꿈꾸며 찾아왔던 기회의 나라 미국. 그러나 그 것은 유럽에서 이민 오는 백인의 역사일 뿐 나 같은 동양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역사였다. 적어도 1965년 동양인에게도 이민 문호가 개방되도록 법이 통과될 때 까지는 말이다.
  "자유와 평등과 희망을 부르짖으면서도 또 인종 차별과 노예 제도의 오점과 침략성과 영토 확장 주의 등 온갖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도 가지고 있는 모순의 나라야. 평화와 인도 주의를 주창하지만 미국이 개입된 전쟁은 전 세계에서 하루도 끊일 날이 없어. 원인이야 어찌 되었건 원자 폭탄을 실제 전쟁에 사용했던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 또한 미국이야."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윤수진은 말없이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육지로 막힌 곳에서 십 년을 살다가 왔으니 바다가 주는 인상이 강렬할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윤수진과 나는 그 날 오후 반나절을 꽁꽁 얼은 공원에서 보낸 후 아파트로 되돌아왔다. 다음 날은 월요일이었으므로 나는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윤수진이 혼자서 드나들 수 있도록 나는 여분의 아파트 열쇠를 주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 동네에는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당분간 내 차로 아침에 나를 출근시킨 후 윤수진이 하루 종일 그 차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샬리스에서 내 이삿짐이 와. 거의 모두 그림하고 그림 그리는 도구들이야. 일단 자리가 잡힐 때 까지 보관해둘 창고가 필요해."
  그래서 나는 윤수진이 원하는 대로 전화 번호부 책을 뒤져서 쎌프 스토리지 회사 몇 군데를 찾아서 알려 주었다.
  "여기 뉴욕에서는 빨간 불에서 우회전을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돼."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자 나는 주위의 직원 몇 명에게 한국 지점 폐쇄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었다. 모두 모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한국에서 나를 고용했던 부사장이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어디서 들었습니까? 한국 사무실이 폐쇄된다는 것을?"
  그러더니 부사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국 업무가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나도 곧 해고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알려 주며 미리 준비했던 메모지를 나에게 건네 주었다.
  "여기 적힌 회사는 우리가 한국과 하던 일을 인수 맡아서 하게 된 회사입니다. 우리 회사에서의 경력을 이야기하면 인정 받아 쉽게 취직될 겁니다."
  친절한 배려에 감사하고 부사장 사무실을 나온 나는 그날 오후 내내를 뒤숭숭한 마음으로 보내고 퇴근했다.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부사장이 말한 대로 나는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그 한 달 사이에 윤수진이 샬리스에서 붙였다는 이삿짐은 모두 잘 도착해서 3개월 계약하고 쓰기로 되어 있는 퍼블릭 스토리지 창고에 들여 놓았고 윤수진은 뉴욕에선 보기 힘든 마당 딸린 단독 주택을 임대해서 나갔다. 창고에 들어간 이삿짐은 윤수진이 말했던 대로 거의 모두 그림이거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 등이었다. 그리고 이백만 불을 상속 받았다고 하더니 자동차도 도요타 캠리를 덜컥 전액 현금을 내고 사버렸다. 하루 종일 퍼블릭 스토리지 창고와 아파트를 왔다갔다하면서 물건을 나르고 정리하고 또 더러는 버리기도 하면서 맹렬한 기세로 일하는 그 윤수진의 강인한 의지와 꺾이지 않는 집념이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녀석은 역시 독을 품은 전갈 같은 무서운 데가 있었다.
  "너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니?"
  해고당한 날 저녁에 예고도 없이 내 아파트로 찾아온 윤수진이 혼자서 불도 안 킨 방에서 우두커니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나를 보고 멈칫하며 물었다.
  "나 해고 당했어. 무직자가 되어 버린 거야."
  이미 꽤 취해가고 있던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나가는 말투로 뱉았다. 그런 어투를 써야만 그래도 내 자존심이 좀 살아 남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고?"
  윤수진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직장에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지? 이철수. 좋게 생각해. 하늘이 너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있어. 이제부터는 시간이 많아서 글을 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거라고 말이야."
  "뭐? 기회?"
  나는 자조적으로 낄낄거리고 웃었다.
  "글을 쓸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 너는 내가 아주 폐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글은 그렇게 아무나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니야. 나는 이제 열등한 쓰레기야."
  "네가 자기 자신을 열등한 쓰레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만으로도 너는 다른 바보들하고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야. 진짜 멍텅구리들은 자기가 멍텅구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거든. 이 세상은 그런 먹통들로 가득 차 있어. 그런데 너는 자기가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똑똑한 거냐?"
  "야, 윤수진. 너 지금 나를 놀리는 거냐?"
  이 번에는 윤수진이 정색을 하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나는 너를 지금 놀리는 게 아니야. 나는 너를 지금 화나게 만들려고 애쓰는 거야. 너는 네가 분노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했으니까."
  나는 어쩐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술김에 마음이 느슨해져서 그런지 이 녀석이 진정으로 나를 위해주는 영혼의 동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녀석하고 이렇게 입씨름하다 보면 진짜로 다시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수진이 박스 속에 몇 병 남지 않은 소주를 하나 들어서 마개를 따고 꿀꺽거리며 마셨다. 그 것은 윤수진이 뉴욕에 온 후 두 번째 사온 박스였다.
  "분노. 미칠 것 같은 분노감. 그 것이 네가 글을 쓰고자 하는 동력이라고 했지 않아.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것도 그 분노감 때문이야. 인간에 대한 분노, 인간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에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야. 이기심. 투쟁성, 정복 심리, 우월감, 인간에게 존재하는 이런 모든 것이 나는 싫어. 나는 그 모든 인간의 더러운 속성이 싫어. 그래서 화나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거야."
  의자가 있는데도 윤수진은 카펫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주 한 병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고 윤수진은 두 번째 병을 땄다.
  "아주 회복이 불가능한 멍청이들이 더 우월감을 가지는 거야. 더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거야. 나는 그런 사람들이 싫어. 그런데 이 인간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너저분하게 깔려서 우리를 짓누르려 하고 있거든. 싸우고 쟁취하고 정복해서 우월감을 과시하고 모두를 밟고 일어나서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그 더러운 무리들이 싫은 거야."
  "부라보. 너는 아직도 진정 피스닉 (PEACENIK)의 자격을 갖춘 용사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나는 술잔을 높이 들며 반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사실 나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십년 전 그렇게 기존 질서 속에서 사는 속물의 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반항하며 우리만의 낙원을 만들려고 투쟁하던 시절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윤수진은 아직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창작에의 야망이 나의 가슴 속으로 소리없이 밀물처럼 부풀어 올라왔다.
  "윤수진."
  "응?"
  뿌우옇게 조금 남아서 방안으로 들어오던 해가 떨어지면서 가로등이 켜지고 흘러 들어오는 빛의 색갈이 달라졌다.
  "나는 네가 좋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윤수진의 얼굴이 멋쩍게 미소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이 때 만큼은 윤수진이 여자같이 보였다.
  "너 최명도 기억나지?"
  "글 쓰던 친구. 나는 걔를 싫어했어."
  "왜?"
  "입으로는 뭔가를 많이 떠들어 댔지만 역시 속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저 겉 멋에 반항하고 기성의 질서에 분노한다고 떠들어 댔을 뿐이라고 생각해."
  "같은 생각이야. 우리 네 명 중에서는 가장 썩기 쉬운 놈이었어."
  "너를 찾기 위해서 걔한테 전화했을 때 자기도 미국에 오고 싶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
  "연극 배우하겠다던 김현석이는?"
  "몰라. 그렇게 헤어진 후로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
  "좀 괴짜였지만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는데. 또 가장 순수하고."
  "그래서 사는 것을 가장 괴로워했지. 내가 하는 그림이나 네가 쓰는 글은 모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현석이가 원했던 연극 배우는 단체 활동이잖아. 자기 마음대로 자기 표현을 할 수 없는 그 많은 제약을 싫어 했어. 여러 명이 같이 일해야 하는 것을 괴로워 했었지."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미칠 것처럼 무엇인가를 성취하겠다는 열망과 꿈을 가졌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실지로 어느 정도라도 목표점 근처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불과 몇 안 되지 않는가.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의 나 같은 멍청이는 그저 그런 때도 있었다는 추억 정도를 가지고 별 소리도 내어 보지 못하고 살다가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이따금 윤수진 같이 돌연변이 현상이 일어나서 되던 안 되던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파고 드는 녀석도 생기고 말이다. 녀석의 말마따나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윤수진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 앉자 윤수진에게서 향긋한 여자 냄새가 났다. 나는 팔을 뻗어 그 가느다란 허리를 껴안고 힘을 주었다. 불끈거리며 성욕이 솟구치고 바지 속에서 나의 성기가 부풀어 올라 윤수진의 둔부를 압박했다.  
  "남자라는 동물은 이상하다. 아무 때나 아무 분위기에서나 섹스 할 생각이 나는 모양이야. 너도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니?"
  녀석의 말 한 마디가 나의 감흥을 깨버렸다. 나는 슬그머니 허리를 감았던 팔을 거둬들였다.
  "짜식, 통나무 같이 굴고 있어."
  그제서야 윤수진은 기묘한 미소를 띄우며 나의 목에 그 가느다란 팔을 얹었다. 녀석이 그렇게 미소할 때면 어느 누구의 가슴도 녹여버릴 것 같은 마력이 있었다.
  "우리 더 이야기하자. 나는 너하고 이야기하는 게 좋아."
  나는 윤수진을 안고 바닥에 쓰러졌다.  
  "샬리스에서 살던 이야기를 더 해줘."
  "듣고 싶어?"
  "응."
  "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야."
  "알아. 뭐든지 너에게 생긴 일은 다 알고 싶어."
나의 팔을 베고 누운 윤수진의 얼굴을 창백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제이콥. 제이콥의 이야기를 해줄게. 나는 그 불쌍한 제이콥의 비밀을 알게 됐어.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집에서만 갇혀서 살아야 하는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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