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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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울 아부지

2012.08.09 08:25

최영숙 조회 수:849 추천:180


“이제 아부지 얘기는 고만 좀 하시지!”
  한국에 사는 남동생이 화상 통화를 하다가 날 향해 툭 던진 말이다. 나는 순간 말문이 콱 막혔다.
그러고 보니 등단한 소설에서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많이 언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칠남매의 장녀이다.
여동생이 다섯에다 마지막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다.
빨랫줄에 기저귀가 늘 널려있던 우리 집에서 나는, 새벽 네 시면 일어나 빨래부터 하고 밥을 안치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얼마 전, 다시 인생 살라면 똑같은 생을 살겠어? 라는 내 질문에 활기차게 그럼! 하고 대답한 엄마는 나로서는 흉내도 못 낼 만큼 힘을 다해 세상을 살아온 분이다.

정치판에 발을 디딘 아부지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엄마 얼굴에서는 기미가 사라질 날이 거의 없었다.
그 고단한 삶을 말하자면 소설 몇 권이 될 텐데도 웬일인지 나는 주로 “아버지”를 소설 속에 등장시킨다.

  우선 울아부지는 칠남매를 고아로 안 만들고 지금까지 살아와 준 일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제 건강이 안 좋은 엄마를 위해 뒤늦게 배운 살림 실력이 후배 노인들에게 가르쳐 줄만큼 대단하다는 사실도 자부심 목록에 올라가 있으며,
아부지 컴퓨터를 쓰기 위해 아부지보다  젊은 노인 분이 당신을 찾아오고, 웬만한 서류는 직접 타이프 하고 출력을 한다는 일을 내게 전화로 알려주곤 한다.

  딸만 여섯을 내리 낳은 엄마를, 그 일로 해서 곁눈질 하거나 구박하는 일이 없었고, 끝으로 낳은 아들에 대해서도 유별나게 대하는 법이 없다.

엄마가 섭섭해할까봐 “계집애”라는 말을 아부지가 전혀 쓰지 않은 바람에 그 말을 배우지 못한 우리 자매들은 대신에 이놈 저놈이란 말을 하면서 자랐고, 그 때문에 나는 지금도 그 말을 머리가 허연 남편에게 내뱉는 사고를 친다.
이건 순전히 아부지 탓이다.

  내 돌 반지를 팔아서까지 책을 샀다는 아부지 덕분에 나는 일찍부터 책을 가지고 놀면서 자랐다.
그중에서도 일본 신조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전집을 좋아했는데, 무엇보다도 책 표지가 단단하고 또 당초무늬가 들어간 고급스런 장정이 여러모로 쓸모 있기 때문이었다.

그 책은 울타리가 딸린 이층집이 되기도 하고, 죽 늘어놓으면 침상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훌륭한 밥상으로 변신하기도 하면서 소꿉놀이에 빠진 나와 동생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담임선생님 고집으로 하루에 다섯 자씩 한문을 읽고 써야만 했던 적이 있었다.
손바닥을 제법 맞아가며 배운 그 결과로 나는 아부지의 세계문학전집을 소꿉장난의 도구가 아니라, 책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심심했던 나는 그래도 알아볼 수 있는 한자가 있다는 사실이 신이 나서 책을 뒤적거렸다.
암굴 왕, 신곡, 실낙원, 그런 책들의 책장을 열어보면 어느 때는 대충 뜻을 알 수 있는 문장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곳에서부터 스토리에 대한 상상이 시작되었고, 아무래도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에는 아부지에게 물어 본 다음 나머지를 꿰맞추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법학을 전공한 아부지는 내가 묻는 소설의 줄거리를 권선징악적인 부분을 상당히 강조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실제 사건이라고 하면서 즉흥적으로 지어낸 부분을 다시 덧붙여 잠자리에 누운 동생들에게 들려주었고, 침을 삼키면서 듣던 동생들은 무섭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다음 날이면 또 들려달라고 보채기도 했다.
  
  엄마보다 더 애잔한 얼굴을 가진 아부지가 어느 때부터인가 대머리가 되었다. 진행이 서서히 되었던 탓인지 나는 아부지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아부지가 언짢은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니, 중학생 여자 애들 몇이 뒤에 오면서 킥킥 대잖아. 대머리 까졌다고 수군대면서 말야. 대머리란 말 자체가 머리가 까졌다는 말인데 거기다가 뭘 까졌다는 말을 덧붙이는 거냐? 중학생이면서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냐고 한바탕 야단쳤다.”  

  나는 울아부지의 큰 딸이다. 아부지의 성정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뜻이다. 매사를 그렇게 짚어가는 버릇은 아부지에게서 왔다. 한가지 더, 울아부지는 정직하다 못해 딱 부러지는 성격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무던하게 지내지 못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도 아부지를 빼닮았다. 문제는 아부지보다 내가 훨씬 더 진화된 버전이라는 것이다.

내 글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첩을 들이고 그 사이에 자식도 낳고, 재산을 말아먹거나 술주정뱅이가 될 때도 있고 이기적이고 냉랭한 사람일 때도 있으며, 세상살이에 무능하기도 하다.

마치 퍼즐을 맞춰 놓은 것 같은 인물 속에 아부지가 들어가 있기도 하고 “아버지” 모습 속에 내가 그리고 싶은 인물이 숨어있기도 하다.

아무튼 “아버지”를 요상하게 그린 소설로 상을 받는 바람에 아부지의 노여움을 탄 적도 있다. 아부지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글이 써지면 세상에서 그걸 아부지의 실제 모습으로 알게 될까봐 그게 더 걱정인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버지”는 내 글 속에서 “울아부지”가 아니다. 그야말로 소설을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아버지”는 갈등을 심화시키기 위한 밀착의 도구이면서 주인공을 대신해서 말해주는 수단인 것이다.

  울아부지가 머리숱이 많던 시절에, 웃는 얼굴이 엄마보다 훨씬 예뻤던 시절에, 나를 등에 업고 암굴 왕을 읽던 시절에, 우산도 없이 비 오는 들녘을 걸으며, 개울 너머 짙게 깔리는 노을을 바라보며, 코스모스 씨를 손에 받으며, 포플러가 노랗게 물든 길을 걸으며, 달밤에 뽀득 거리는 눈을 밟으며...그리고 이제는 세상을 떠난, 둘도 없는 그 친구를 찾아가곤 했을 때를 그려본다.

총총하던 아부지의 젊은 날.
생각도 많고 꿈도 많고,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텐데....그러다가 얻은 칠남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흘러가는 세월을, 아부지의 애창곡 “황포돛대” 가사처럼 기폭에 걸어 어딘가로 떠나보낸 허전함과 막막함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도 나는 60여년 내 곁에 있어 준 울아부지를 딱히 이런 분이라고 잘라서 말할 수 없다. 아직까지도 나는 아부지를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언젠가 아부지가 세상을 떠나서 나이가 정지되고 내가 그 나이를 따라잡을 때서야 아부지가 이런 분이었구나, 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왜 내가 글 속에 “아버지”를 계속 등장시키는 지도 그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