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주의 유유자적, 11월에 내리는 비

정용주

 

11월이 지나가고 있다. 하늘은 며칠째 우울하다. 검은 구름은 거대한 붕새가 느린 날개를 펴는 듯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곳을 회색 그림자로 덮었다. 슬픔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즐거움도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날들 위로 11월의 비가 내린다.

바람도 없이 몸에 지닌 무게만큼의 속도로 내려와 제 자리를 찾아 스며드는 비를 바라본다. 링거의 수액처럼 뚝뚝 떨어지는 비의 자리마다 제 시간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땅 위의 목숨들이 알몸이 되어 들뜨고 부풀고 과장된 희로애락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다.

늙은 사과나무는 생각한다. 나는 철조망 쳐진 이 비탈진 과원에 어린 묘목으로 심어져 일생을 살았다. 첫 꽃을 피우던 봄을 기억한다. 그 때 내 몸이 키워낸 순정의 사과는 어린 손녀의 손에 따졌다. 옥수수 알갱이 같던 손녀의 입안에 시고 단 과즙으로 스미며 나는 아이를 소녀로 키워냈다. 내 몸의 가지들은 사과를 따기 좋게 밑을 향해 잘려졌다. 잘린 몸통을 굵고 튼튼하게 키우며 나는 해마다 많은 사과를 붉게 매달았다. 이제 구불구불한 내 몸은 나와 함께 늙은 주인이 새처럼 앉아서 사과를 따도 휘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의 일로써 농부를 이롭게 했다. 농부의 굴뚝엔 장작 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는 땅 위의 일을 잊고 뿌리에 목숨을 모아 휴식하러 돌아간다.

밑동이 잘려나간 배추밭 위로 비가 내린다. 배추밭에는 잘려나간 배추 잎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뽑혀나가지 못한 배추들이 울다가 지친 딸들처럼 머리에 지푸라기 끈을 매고 허허로운 몸을 지탱하고 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아련하다. 평화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 풍경은 어느 한 쪽으로 감정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땟국에 절은 육신을 맨땅에 맞대고 손을 모으는 저 먼 티베트의 여인들처럼 그저 묵묵하다. 삶의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않음으로 크게 요동치지 않는 묵묵함을 추수가 끝난 저 가을 밭에서 배운다.

빈들에 드러난 흙의 맨살을 바라보면 세상의 어떤 은총도 저를 따라갈 수 없고 어떤 수고로움도 저 흙의 수고로움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꽃을 심으면 꽃을 키워내고 나무를 심으면 나무를 키워내고 제 품에 안겨진 씨앗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살려내 돌려주는 사랑을 어디서 배울 것인가. 그래서 다시 또 대지는 어머니 중의 어머니인 것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고 거인의 숨처럼 안개를 뿜어내며 휴식에 들어가는 빈들을 산책하고 돌아온다.

문득, 대상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수첩이 한 권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곳저곳을 뒤적거려도 없다. 연탄창고 구석에 자질구레한 것을 모아놓은 박스에서 찾았다. 겉표지는 떨어져나가고 여기저기 지운 흔적이 있는 수첩에서 전화번호 하나를 찾았다. 전화번호 옆에는 이메일 주소가 있었다. 컴퓨터를 켰다. 나는 지금 겸손해지고 싶어 무례할지 모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첫 산문집을 내고 쑥스러워하는 내게 연재 원고를 청탁했던 잡지의 발행인이었다. 부끄럽게 원고를 보내면 잡지 속에는 고마움을 전하는 깨알 같은 손 글씨가 적힌 작은 엽서가 꼭 들어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첫 원고료를 받았을 때인데 작은 고료를 보내드리니 달빛과 함께 전기세를 나누어내세요라고 적어 보내주셨다. 사람이 이렇게 멋지게 자신을 가꿀 수 있다는 것에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그러나 검은 포장을 두른 러시아의 삼두마차가 자작나무 숲이 우거진 설원의 시간을 향해 우리를 끌고 가는 것 같은 이런 계절이 오면 함께 쓸쓸함을 느낄 것 같은 존재로 불현듯 생각이 난다.

11월이 지나가고 있다. 하늘은 며칠째 우울하다. 검은 구름은 거대한 붕새가 느린 날개를 펴는 듯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곳을 회색 그림자로 덮었다. 슬픔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즐거움도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날들 위로 11월의 비가 내린다.

바람도 없이 몸에 지닌 무게만큼의 속도로 내려와 제 자리를 찾아 스며드는 비를 바라본다. 링거의 수액처럼 뚝뚝 떨어지는 비의 자리마다 제 시간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땅 위의 목숨들이 알몸이 되어 들뜨고 부풀고 과장된 희로애락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다.

늙은 사과나무는 생각한다. 나는 철조망 쳐진 이 비탈진 과원에 어린 묘목으로 심어져 일생을 살았다. 첫 꽃을 피우던 봄을 기억한다. 그 때 내 몸이 키워낸 순정의 사과는 어린 손녀의 손에 따졌다. 옥수수 알갱이 같던 손녀의 입안에 시고 단 과즙으로 스미며 나는 아이를 소녀로 키워냈다. 내 몸의 가지들은 사과를 따기 좋게 밑을 향해 잘려졌다. 잘린 몸통을 굵고 튼튼하게 키우며 나는 해마다 많은 사과를 붉게 매달았다. 이제 구불구불한 내 몸은 나와 함께 늙은 주인이 새처럼 앉아서 사과를 따도 휘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의 일로써 농부를 이롭게 했다. 농부의 굴뚝엔 장작 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는 땅 위의 일을 잊고 뿌리에 목숨을 모아 휴식하러 돌아간다.

밑동이 잘려나간 배추밭 위로 비가 내린다. 배추밭에는 잘려나간 배추 잎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뽑혀나가지 못한 배추들이 울다가 지친 딸들처럼 머리에 지푸라기 끈을 매고 허허로운 몸을 지탱하고 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아련하다. 평화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 풍경은 어느 한 쪽으로 감정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땟국에 절은 육신을 맨땅에 맞대고 손을 모으는 저 먼 티베트의 여인들처럼 그저 묵묵하다. 삶의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않음으로 크게 요동치지 않는 묵묵함을 추수가 끝난 저 가을 밭에서 배운다.

빈들에 드러난 흙의 맨살을 바라보면 세상의 어떤 은총도 저를 따라갈 수 없고 어떤 수고로움도 저 흙의 수고로움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꽃을 심으면 꽃을 키워내고 나무를 심으면 나무를 키워내고 제 품에 안겨진 씨앗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살려내 돌려주는 사랑을 어디서 배울 것인가. 그래서 다시 또 대지는 어머니 중의 어머니인 것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고 거인의 숨처럼 안개를 뿜어내며 휴식에 들어가는 빈들을 산책하고 돌아온다.

문득, 대상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수첩이 한 권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곳저곳을 뒤적거려도 없다. 연탄창고 구석에 자질구레한 것을 모아놓은 박스에서 찾았다. 겉표지는 떨어져나가고 여기저기 지운 흔적이 있는 수첩에서 전화번호 하나를 찾았다. 전화번호 옆에는 이메일 주소가 있었다. 컴퓨터를 켰다. 나는 지금 겸손해지고 싶어 무례할지 모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첫 산문집을 내고 쑥스러워하는 내게 연재 원고를 청탁했던 잡지의 발행인이었다. 부끄럽게 원고를 보내면 잡지 속에는 고마움을 전하는 깨알 같은 손 글씨가 적힌 작은 엽서가 꼭 들어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첫 원고료를 받았을 때인데 작은 고료를 보내드리니 달빛과 함께 전기세를 나누어내세요라고 적어 보내주셨다. 사람이 이렇게 멋지게 자신을 가꿀 수 있다는 것에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그러나 검은 포장을 두른 러시아의 삼두마차가 자작나무 숲이 우거진 설원의 시간을 향해 우리를 끌고 가는 것 같은 이런 계절이 오면 함께 쓸쓸함을 느낄 것 같은 존재로 불현듯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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