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마술사 비두리

2010.01.09 11:15

정해정 조회 수:1471 추천:146



   나는  하얀색 몸집이 조그만 비둘기입니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변두리 재개발한다는 어느 낡은 한옥 문간방입니다. 혼자 사냐구요? 아니지요. 늙고 가난한 마술사 아저씨랑 같이 살아요. 이 아저씨는 결혼도 해본 적이 없고, 부모도 가족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랍니다. 육이오 전쟁 직전 북한에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작은아버지를 찾아왔는데 찾지도 못하고 길거리를 헤매다가 고아원에서 살았대요. 아저씨는 젊었을 때 우연히 마술을 배워 마술로 천직을 삼아 지금까지 가난하게 살고 있답니다. 나는 아저씨가 가장 아끼는 가족이요, 동반자랍니다.

   우리의 공연장은 무대가 아니라 동네 호숫가 잔디밭입니다. 산책 나온 사람들과 동네 아이들이 몇 명만 모여도 우리는 공연을 시작합니다. 쭈그러진 낡은 냄비를 돈통으로 놓고, 접었다 폈다 하는 녹이 슨 상 위에 아저씨는 낡은 카드를 부채처럼 쫘-악 펴고 구경꾼들에게 한 장을 뽑으라 합니다. 뽑은 카드를 귀신처럼 맞추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소릴 지르지요. 손님을 모으는 작전이기도 합니다. 아저씨는 사이다 병에서 장미꽃을 뽑아내기도 하며, 입속에서 무지개 색깔 손수건을 줄줄 이 한없이 뽑아내기도 한답니다. 신문지를 찢어 가루로 눈가루를 만들기도 하고, 다시 부쳐 오늘 뉴스를 큰 소리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연의 하일 라이트는 물론 나이지요.

   비둘기는 원래 천성이 순한 동물이기도 하지만 나는 몸집이 작아 아저씨의 소매 속이나 모자 속에 구겨져 들어 있다가 손바닥으로 나오기도 하고, 푸드듯 날아가기도 합니다. 특히 아이들 손님은 이럴 때마다 입을 벌리고,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친답니다. 아저씨는 날마다 공연 한 가지, 한 가지를 할 때마다 얼마나 진지하고 열심인지 이곳이 <예술의 전당> 무대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해님이 어스름하게 넘어갈 때쯤 우리도 공연을 접습니다. 돈통을 정리하고, 나는 새장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짐을 챙겨 호숫가 포장마차로 갑니다. 아저씨는 소주가 밥이요, 낙이랍니다. 아차! 아저씨한테는 낙이 또 하나 있어요. 뒷주머니에 분신처럼 넣고 다니는 낡은 ‘하모니카’. 술이 곤드레가 되면 호숫가에 앉아 하모니카를 멋들어지게 불어요. 어떤 때 내가 새장 속에서 잠이 와 꾸벅꾸벅 졸 때는 자장가로도 들리지요.

   나는 아저씨가 제일 멋이 있고 존경스러울 때가 바로 마술 공연할 때와, 하모니카 연주할 때랍니다. 아저씨는 중학교 때 교내 악단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답니다. 아저씨는 말합니다. 비둘아, 비둘아. 니가 내 밥줄이다. 고맙다 고마워. 너랑 나랑 오래오래 함께 살자. 엉! 이 아저씨는 돈이 없어도, 너랑 나랑 만 있으면 행복하단다. 엉!
   아저씨는 곤드레가 되어 비틀거리면서도 새장은 보물처럼 들고 집에 옵니다. 썰렁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라면을 끓여 꼬불꼬불한 라면 발을 새장에 넣어주기도 하고 식은 밥풀을 넣어주기도 합니다. 나는 비둘기의 사료보 다 이런 것 들이 훨씬 좋고, 아저씨와 한 식구임을 끈끈하게 느낀답니다.

   비둘아 너 '라스베이거스' 라는 데 들어봤어? 그래그래 니가 알 리가 없지. 그곳은 미국에 있는 도시고 세계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도박 도시인데 말야. 쇼 무대가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상상도 못 한단다. 나도 아직 못 가 봤지만 소문만 들었어. 나는 이제 가망이 없고, 너라도 그런 무대에 서 봤으면 원이 없겠다. 흐흐흐... 아저씨는 술김에인지 울고 있습니다.
   뒷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냅니다. ‘동구 밖 과수원길...아카시아 꽃이 활짝 펴었네’...... 나는 하도 많이 들어서 외우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다시 다른 곡을 연주 합니다. 야! 임마. 비둘아, 이 곡이 뭔 줄 알아? 자알 들어봐. 이건 ‘이태리’민요인데 이곡이 너무 좋아 세계 사람들이 다 자기나라 말로 부른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영남이란 가수가 불렀어. 제목은 “제비”..... 이태리는 또 뭐냐고? 나라 이름이야. 유럽에 있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큰 나라란다.
   아저씨는 그 후부터는 하모니카만 들면 ‘제비’를 연주하고 또 연주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여러 번. 이상하게도 ‘제비’는 가슴 저리게 슬프기도 하고, 의외로 잔잔하고 편안한 행복을 주기도 하네요.

   어느새 여름이 가고 하늘은 한길이나 높아지고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날도 우리는 누렇게 변해가는 잔디밭 무대에서 공연을 마치고 포장마차로 갔지요. 어머나! 거기서 아저씨가 마술 배울 때 친했던 친구를 만났어요. 둘은 얼싸안고 한참을 반가워하더니 소주병을 갖다놓고 얘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친구 아저씨가 말을 하고 우리 아저씨는 흥미롭게 듣고 있었지요. 그 아저씨는 보따리 장사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모양이에요. 아는 것도 많아 중국에서부터, 일본 얘기, 미국, 카나다 얘기......
   미국 얘기 중에 ‘라스베이거스’ 이름이 나와 아저씨와 나는 숨이 콱 멈추는 기분이었어요. 그때부터 내 작은 가슴도 마구 뛰고, 뭔지는 몰라도 화려한 쇼 무대가 상상이 돼 머리가 어질어질 하네요. 두 아 저씨들은 얼마나 술이 취했는지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입니다. 우리 아저씨는 혀 꼬부라진 말로 친구 아저씨에게 말합니다. 이번 주말에 미국에 간다고? 라스베이거스에도 갈 거라고? 아저씨는 물 컵에다 소주를 따라 마시더니, 그래, 좋아 아저씨는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한 듯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봅니다.
   이 녀석, 내가 자식처럼 아끼는 이 녀석을 데리고 가줘. 색깔도 좋고 몸집도 작고, 특히 사람 말을 잘 들어... 거기 가서 팔아 먹든지 맘대로 해. 그 담에는 지 운명이니까. 나는 첨에는 의아해 하다가 또 가슴이 방망이질 칩니다. 새장이 이쪽으로 옮겨지고 술값은 친구 아저씨가 냈습니다. 아저씨는 나를 보고 비둘아, 비둘아 너라도 한번 살아봐라. 나는 이제 글렀다. 희망이 없어. 너라도... 내 걱정일랑 말고...... 아저씨는 자식을 해외에 입양이라도 보내는 것처럼 울면서 비틀거리며 걸어갑니다.
   나는 아저씨 없으면 한시도 못 살 것같이 의지하고 살았지만, 의리 없게도 한편으로는 이곳을 벗어난다는 사실이, 또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뭔가 모르는 ‘자유’, 새로운 세계에서의 꿈...... 내 일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넓고도 부자인 나라에서 수천 명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마술을 하며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커다랗고 야무진꿈. 꿈. 꿈.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는 박수 소리가 요란합니다. 와~와~.짝~짝~짝~......

   드디어 새 아저씨와 나는 비행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늦가을인데도 로스앤젤레스는 따가운 햇빛이 넘쳐나는 커다란 도시네요. 많은 사람들, 많은 빌딩들, 많은 자동차들, 수많은 하얀 사람과 까만 사람들, 섞인 사람들. 이런 것들만 봐도 기가 죽어요. 새 아저씨의 친구가 마중 나왔네요. 우리 셋은 그 길로 라스베이거스로 간답니다. 두 아저씨들은 그동안의 경위를, 그리고 나를 데리고 온 설명을 길게 늘어놓고 있어요.
   나는 뒷좌석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허전함에 울고 있을 아저씨 생각이 퍼뜻퍼뜻 나지만 아이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아저씨의 영상을 덮고 마네요. 참, 의리도 없이 말예요. 도시가 지나고 막막한 사막으로 들어섰습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탔고, 또 자동차를 타고 끝도 없이 달리니 잠이 쏟아져 견딜 수가 없네요. 자다가 깨면 아직 사막이고, 또 자다가 깨면 또 사막이고...
   새 아저씨도 지쳤는지 잠이 들었어요. 얼마나 갔을까요. 야! 일어나. 다 왔어. 저기 저 산만 넘으면 돼. 그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차창 밖은 깜깜해졌습니다. 그런데 저 건너 멀리 보이는 산. 그 산은 노을이 지지 않은 것처럼, 아니면 산 뒤편에서 불이 난 것처럼 빠알갛게 보이니 산 모 양은 까맣고 더 뚜렷합니다. 아저씨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고, 나도 잠이 달아나 말똥말똥 합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것에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와!!! 와!!!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라스베이거스’란 말인가. 하늘의 별들은 죄다 내려와 있는 듯, 정말 별천지 세상이네요. 별들로 가득 찬 커다란 건물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이 화려한 도시. 별들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넘실거리는 도시. 낮보다 더 밝은 도시 ‘라스베이거스’. 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아까 산 너머 붉은 빛이 바로 이 별들 때문이었어요.
   아저씨들은 어느 커다란 호텔로 들어갑니다. 차에서 내릴 때 내 새장은 버리고 나만 들고 왔지요.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안개 같은 짙은 연기에, 불이 번쩍 번쩍... 쟈르륵, 쟈르륵 소리로 가득하네요. 나중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도박 기계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친구 아저씨는 새 아저씨랑 나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별처럼 많은 사람들, 담배 냄새, 술 냄새... 쟈르륵. 쟈르륵. 쟈르륵... 친구 아저씨가 왔습니다.
   야. 이 병신 같은 놈아. 내가 뭐라디?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구닥다리 비둘기냐? 무대에서 홍수가 나고, 불이 나고. 백호가 쇼를 하는 판국에 백호, 하얀 호랑이 말야... 쓸개 빠진 놈! 원 창피해서 말도 안 나오네. 두 아저씨는 길가 나무 밑에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나와는 만난 적도 없었다는 듯이...
   첨에는 홍수처럼 밀리는 사람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갔을까요. 희미하게 사방이 보이자 거리에 사람도 줄고 별빛도 하나씩 꺼져가니 갑자기 무서움이 몰려오며 한기가 오네요. 새벽이 오나 봅니다.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와 종이 조각들... 바람 에 날리는 나뭇잎들... 차가운 먼지 바람......
   나는 날개 밑에 머리를 박고 최소한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고 있었지요. 어린이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박수를 받고. 이런 꿈은, 꿈이 아니었나 봅니다. 서서히 아침이 오는 듯 싶은데 이 도시는 유령의 도시처럼 불도 없고, 사람도 없어요. 다, 다 죽었나 봐요. 나도 죽은 듯 이 먼지 바람 속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지요.

   그때 어느 작은 손이 나를 훌쩍 들고 길가에 있는 자동차로 갔어요. 차를 타자마자 아빠 빨리 가요. 빨리 빨리. 여섯 살 정도 보이는 이 백인 아이는 나를 훔쳤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휴~~살았다. 이 가족은 휴가차 이곳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래요. 알고 보니 ‘로스앤젤레스’로 간답니다. 나는 나처럼 하얀 친구도 생겼고, 더구나 로스앤젤레스로 간다니 뭔가 다시 태어난 기분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도 잠시, 아이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장난감처럼 주물러대는 건 참을 수 있겠는데, 억지로 내 입을 쩌억 벌리고 먹던 껌을 넣어주는가 하면 날개를 쫙 펴서 부채질도 합니다. 눈을 까뒤집고 눈알에 침을 뱉는가 하면 자기 손가락에 내 발가락을 걸고 돌리기도 합니다. 나는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갔을까 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말합니다. 아빠. 엘에이 다 왔어. 어? 다운타운이네. 뭐 좀 먹어요. 배고파 죽겠어. 일행은 어느 가게 앞에 차를 세웁니다. 창문을 약간 열어놓고 모두 내립니다. 나는 내가 살길은 지금이다. 도망치자. 빨리-- 자동차 창문을 통해 도망치는 것을 몇 번이나 실패하고 겨우 빠져 나왔습니다.
   뒤뚱거리며, 푸덕거리며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갔지요. 될 수 있으면 자동차와 멀리~~ 겨우 길가 쓰레기통 옆에 다다라서 지쳐 쓰러졌습니다. 쓰러지는 순간 엉뚱하게 아저씨 생각이 간절하게 났습니다. 마지막 나를 친구에게 맡기고 돌아서서 울던 그 앙상하고 초라한 등. 그 뒷모습이 가슴을 후벼팝니다.

   여기를 온 것이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 다음 정신을 잃었어요. 몇 날, 몇 밤을 잤을까요. 내가 죽었을까요. 야!! 임마 비둘아, 일어나. 어서... 일하러 나가자. 임마, 정신 차려!!! 아! 아저씨다. 우리 아저씨... 나를 데리러 왔다. 눈을 번쩍 떴지요. 사방은 눈을 감은 것처럼 깜깜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악 소리가 아스라하니 들려옵니다. “제비”. 그래요. 제비. 저건 분명 아저씨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예요. 하모니카.
   아저씨입니다. 분명 나를 데리러온 내 아저씨였어요. 나는 죽을힘을 다해 하모니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깜깜한 속을 겁도 없이 다리를 끌며. 딩굴며 푸덕거리며 갑니다. 아저씨. 가지 마. 가지 마. 조금만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아저씨. 우린 이제 절대로 떨어지지 말자. 아저씨. 내가 잘못했어.
   나는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 무작정 갔습니다. 아! 밤보다 더 검은 집채 같은 커다란 물체가 벽에다 등을 기대고 길거리에 다리를 쭉 뻗고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다시 그의 무릎 위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라! 이게 뭐야. 요놈 봐라. 꼼지락거리는 걸 보니 살았네. 나는 그 소리에 깨어났지요. 집채만한 그의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 색깔에, 커다랗게 쌍꺼풀 된 눈. 짙은 콧수염이 얼굴 반은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콧수염 아저씨는 느리게 푸시시 일어나 나를 들고 어디론가 갑니다. 공중 화장실이었지요. 세계에서 젤 크고 부자 나라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은 거리마다 낙서투성이고 더럽기 짝이 없어요. 길가 전깃줄에는 별별것이 다 걸리고, 새 운동화도 걸렸어요. 나중 안 일이지만 모두가 갱들의 암호라고 해요. 나를 화장실에 있는 샴푸로 여러 번 행구고 행구고 합니다. 에이 더러워, 어디서 이렇게 고생을 했니? 하면서요.
   나는 오랜만에 개운하게 목욕을 했네요, 콧수염 아저씨가 말합니다. 야. 흙빛이던 털이 이렇게 하얀 털이 됐네. 은빛이 나는구먼. 고놈 참 예쁘네. 하는 소리를 들으며 또 스르르 잠이 옵니다. 콧수염 아저씨는 멕시코 사람으로 길거리에서 떠돌며 사는 거지랍니다.
   콧수염 아저씨는 덩치가 크기도 했지만 헌 옷 들과 헌 담요를 겹겹이 둘러메고 다녀서 집채만큼 크게 보였던 겁니다.

   로스앤젤레스의 새벽은 왁자지껄한 생동감으로 시작합니다. 밤과  낮이 바뀐 라스베이거스의 유령의 도시와는 는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유난히 많은 비둘기와 바쁘게 달리는 사람들, 그리고 빵빵거리는 수많은 자동차들...
   나는 콧수염 아저씨와 이 도시에서 새 희망을 갖는 새 생활을 또다시 꿈꾸었습니다. 개운한 몸으로 콧수염 아저씨 손바닥에 앉아 거리를 할 일 없이 왔다 갔다 합니다. 끼니때면 콧수염아저씨가 먹다 남은 햄버거나 타코 같은 것을 주니, 배도 고프지 않고 아저씨 품에서 잠자리도 편안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콧수염 아저씨는 몹시 심심한가 봅니다. 날마다 길을 걸으면서 나를 입안에 통째로 넣고 질겅질겅 씹기도 하고, 하늘 높이 던졌다가 입으로 받아요. 콧수염 아저씨는 멕시코에서 젊었을 때 야구 선수였답니다. 아저씨의 입안에서 나는 냄새는 견딜 수가 없어요.

   이곳은 어둠이 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와는 반대로 이곳도 유령의 도시로 변합니다. 강아지만한 쥐들과, 고양이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집 없는 노숙자들만 사는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다운타운은 밤과 낮이 바뀐 라스베이거스와 정반대지요. 나는 또다시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이 나라에 온 목적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그날도 길을 가고 있다가 아저씨가 나를 높이 던졌어요. 그런데 그만 신호등에 걸렸어요. 나는 옳다 됐다 싶어 동그란 신호등 안으로 몸을 피했어요. 아저씨는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지 한참을 위를 쳐다보고 있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치 나를 만난 적도 없었다는 듯이 어슬렁거리며 가버렸답니다.
   나는 한참은 따뜻한 신호등 안에서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편안하니까 또 고향 생각, 아저씨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 나라에 오지 말 걸 후회가 막심했지요. 가난하지만 아저씨랑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는 생각뿐입니다. 신호등과 가로수 사이에 전깃줄이 하나 있습니다. 비둘기들이 줄줄이 모여 있어요. 다운타운의 모든 새들의 쉼터라 할까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이곳의 비둘기 대부분이 발가락이 뭉그러졌어요. 발가락이 하나 있는 놈, 두 개 있는 놈, 뭉그러져 붙어 있는 놈. 그중 회색 비둘기가 말합니다. 쳇! 나는 말야 저쪽 아파트 베란다 구석에 알을 품었는데 오늘 아침에 주인이 물을 끼얹고 빗자루로 싹싹 쓸어버려 알도 잃고 쫓겨났지 뭐니. 사람들도 너무 해. 자주색비둘기가 받습니다. 근데 말야, 맘씨 좋은 사람도 있어. 시청 앞 광장에서 어느 할머니가 오후 세 시만 되면 팝콘을 준대. 거기 가볼래?

   어느 날, 나도 그 줄 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비둘기 중에 대장격인가 봅니다. 밤색비둘기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야, 꼬마야. 첨 보는데 넌 어디서 왔니? 응 나? 서울에서 왔단다. 올림픽을 한 서울 알아? 코리아라고 중국 밑에 있는 나라야. 나는 마술사야. 아이들 을 기쁘게 해주는 마술사. 하하 우습다. 네까짓 게 무슨. 어디 한번 해 봐. 어디? 벼엉신... 다른 비둘기들도 까르르 웃네요. 나는 기가 죽어 다시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리라 맘먹습니다.
   바로 그때였어요. 아래서 끼이익--하며 자동차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내려다보니 자동차 밑에 비둘기 한 마리가 죽어 있어요. 아아. 저렇게도 죽는구나. 희망도 없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바에야 나도 저렇게 죽어버릴까? 마음을 먹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가 없습니다. 그래 죽어버리자. 이 세상 흔적도 없이 떠나버리자. 정말 마음이 편합니다. 왜 내가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런데 배가 고픕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모양도 좋다고, 일단 시청 앞 광장에 가서 팝콘을 얻어먹기로 했어요. 줄줄이 날아가는 비둘기들을 따라 시청 앞으로 갔지요. 정말이었어요. 허리가 굽은 어떤 백인 할머니가 빵 부스러기와 팝콘을 뿌려주고 있었습니다.
   언제 소문을 들었는지 몇 백 마린지 모르게 많은 비둘기들이 종종종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중에 끼어 먹이를 먹고 있는데, 참 희한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어요. 내 바로 옆에 있는 비둘기는 장님 비둘기였고쉼 없이 먹이를 날라다 주는 녀석은 한쪽 발가락이 모두 없어 꼭 목발을 짚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때 내게 번개처럼 퍼뜩 지나는 생각...... 나는 보기 드문 하얀 색깔로 여기 모인 모든 비둘기들 중에 제일 아름답고, 더구나 발가락도 모두 성하고, 남들이 못 가진 특별한 재주를 가졌고... 그런데 스스로 죽어버리다니? 말도 안 돼. 그럼, 그럼 말도 안 되지. 말도 안 되고 말고.
   나는 옆으로 살짝 빠져 나와 날개를 부채처럼 쫘악 펴고 연하고 빠알간 발가락으로 땅을 집고 빙 돌아 봤습니다. 발레리나처럼요. 어머! 되네요.
   나는 돌아와 전깃줄에 앉아서 발가락을 줄에 걸고 빙 돌아봤습니다. 어머! 되네요. 나도 얼마나 신기한지요. 빙빙빙. 꼭 바람개비 같습니다. 함께 있던 비둘기들도 놀라서 쳐다보고, 길 가던 아이들 몇 명도 멍하니 위를 쳐다봅니다.
   그래요.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마음이 드니 행복해서 이 작은 새 가슴이 터 질것 만 같습니다. 나는 잠을 잘 수 가 없습니다. 묘기를 생각하느라구요. 다음날 아침 근처 초등학교 앞을 갔지요. 거기도 전깃줄이 있으니까요.

   전깃줄에는 누군가 운동화를 걸어 놓았어요. 첨에는 그 운동화 속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고 그네를 탓지요. 그러나 그네 타기는 사람들이 많이 봐주지를 않아서 별로 재미도 없어요. 그래서 맨몸으로 날개를 쫘악 펴고 돌고... 길가에 버려진 헝겊을 물고 돌고... 아이들이 버리고 간 장난감긴 칼을 물고 돌고... 돌고... 아저씨처럼 시들지 않은 장미꽃이 한 송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점점 아이들 관객이 모이기 시작 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러 온 어른들도 하나 씩 끼어 있어요. 빙빙빙 돌고.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근데요. 발레리나는 안 되겠어요. 왜냐면 바닥 위에서는 아이들이 붙잡아 불안해서요.

   그 날부터 나는 정말 새로운 꿈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며 꿈을 꿉니다. 아저씨의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 천사같이 하늘을 훨훨 날아 아저씨를 만납니다. 아저씨는 웃으며 나를 칭찬해 줍니다. 그래! 비둘아. 잘 했다. 잘 했어. 나는 너를 믿었단다. 잘 했고말고. 내 아기 비둘아~~~.

   해님도 빙그레 웃고, 구름도 빙그레 웃고, 지나가는 바람도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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