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천사

2010.06.07 07:24

정해정 조회 수:1012 추천:126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간간이 나이를 짚어본다. 조그맣던 우리 아이들이 언제 커서 시집 장가를 들고, 거기다가 손자까지 낳아서 커 가는 것을 본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가 생각보다 늙어 있을 때. ‘아! 벌써 세월이 이렇게 지났구나.’ 하면서 황혼에 머물러 있는 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래진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더 자주 거울을 보면서도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 정확하게 실감을 못 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것은 마음과 몸이 균형을 맞추어 함께 늙어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오래전에 에미상을 탄 ‘콜린 멕컬로우’의 ‘가시나무 새’에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오스트렐리아 대 부호인 노인네가 서른 살도 더 어린, 자기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가톨릭 신부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 성사되지 않자  나중에는 절규하면서 기도를 한다. “하느님은 왜 나를 몸하고 마음을 함께 늙게 해주시지......” 하면서 몇천 송이의 빨간 장미꽃을 흩뿌리면서 자살을 한다

   이 글을 쓰는데 느닷없이 어렸을 적 일이 생각난다. 주일학교 수녀님이 그날은 <수호천사>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다. 수호천사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느님이 한 사람에게 하나씩 주신 선물이라 했다. 수호천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위험에서 보호해 주며 착한 일을 하면 기뻐하고, 나쁜 일을 하면 뒤에서 울고 있다고 했다. 우리들도 누구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때, 어린 마음에 한 사람에게 하나씩 주어진 잡히지 않은 그림자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 있을 수호천사를 생각하고 착하게 살고 싶었다.


  나는 <노인>이라는 호칭을 싫어한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동화와 동시를 쓴다. 비록 몸은 세월 따라 늙더라도 마음은 언제나 젊고 싶고, 언제나 철없고 싶다.

  다 큰 딸 아이가 “아이고! 울 엄마는 언제 철이 들꺼나!” 하는 핀잔도 과히 듣기 싫지는 않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50대 초반에 생리가 끊겼을 때, 야릇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하느님의 축복이었는지 오십견이란 통증은 없었고 갱년기라는 몸살도 쉽게 그럭저럭 그냥 지나갔다.

  어느 날 비교적 가격이 싸다는 옷집 ‘ROSS'에 갔더니 점원이 나를 힐끗 보더니 오늘은 화요일이니 시니어 10% 디스카운트 해준다고 한다. 나는 고맙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국에 살면서 국가에 별 공헌도 안 했는데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웰 페어와 노인 아파트를 준다거나 병원 치료비와 약을 공짜로 준다는 것, 멕도널에서 시니어 커피도 같은 맥락이다.

  또 있다. 성당에서 해마다 사순절이면 금식, 금육날을 지키는데 60세가 넘으면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학켐프를 가면 완전히 노인네 취급이다. “아이구! 가만히 계세요. 젊은 저희들이 할께요. 가만히 계세요” 하면서 앉아 있으라고 한다. 기억력이 자기네들보다 좀 떨어지는 것만 빼면 다른 기능은 아직은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이런 것들이 어른 대우도 받고 편하고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은 어디에선가 밀려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약간은 씁쓸하다.

  며칠 전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내 뒤통수를 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아침나절에 신문을 훑다가 심심풀이로 ‘오늘의 운세’를 봤다.
  어쩌나!!!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운세는 없는 것이었다. 어린이와 노인들은 거기에서도 해당이 안 된 것을 보고 갑자기 기운이 스르르 빠짐을 느꼈다. 뭐랄까. 이 기분은 어디에선가 밀려난 기분하고는 또 달리,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인정받지도 못한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면 맞는 표현일는지.  

  우리 모두는 언제까지나 이 땅에 발을 묻고 살아 있을는지는 그분밖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세월 따라 몸이 늙어갈 때 마음도 함께 늙어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는 어쩌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렸을 적 주일학교 수녀님 생각이 난다. 나도 수호천사가 되리라.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이 너무나 많다.
  아무도 눈여겨봐주지 않고, 쓸모없다고 밀어내도 스스로라도 ‘나 홀로’ 내 자리를 지키며 살고 싶다.
‘나이는 숫자에 불가하다’는 연상연하 연애할 때 주로 쓰는 유치한 말을 우겨본다.

  어린이 맘으로 어린이 눈으로 세상을 보며, 더 열심히 영혼이 맑은 동화와 동시를 쓰며 살리라.
  
  정말 사랑하는 모든 이웃에게 숨을 쉬는 날까지 손에 잡히지 않은 그림자 같은 착한 <수호천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해본다.

  이 투명한 유월의 초여름날 아침에......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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