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웅시인의 시 감상

2017.10.09 10:20

정국희 조회 수:99


 

                                     낭만적 질서의 정직한 목소리

                              배정웅시집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에서

                                                                                                 정국희

 

 

고백

 

 

 

어릴 때는 물새똥 섞인 낙동강물 마시고

머리 커진 한동안을 베트남 화약 냄새 속 야잣닢 뜨는

메콩강 그 강물로 갈증을 풀었다

토사빛깔로 흐른 *라 뿔라따 강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저만치 강물처럼 뒤돌아 흘러가는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내가 마시고 가까이 한 강물들은 내 속에 흘러들어

뒤섞이어 부딪치고 때로는 부서지고 출렁이어

어찌할 수 없는 내 존재의 음계들을 빚었지만

나는 지금도 온전한 소리꾼 하나 되지 못했다

어줍잖은 세상살이 풀잎 같은 자잘한 슬픔조차도

추스르지 못하는 까닭은

오로지 나와 더불어 살아온 여러 강물의

시도 때도 없이 내 생의 물관을 차고 오르는

그 출렁거림 아아, 그 출렁거림 때문이려나

<P, 82>

 

 

 

     시론에서 일반적으로 반복되는 테제 중의 하나는 보편적 진실이라는 것이다. 문학에서 보편적 진실이라는 것은 사실성을 초월한 것에서 만들어 진다.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시학 9P62>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하고 있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함은, 시인은 개연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배정웅시인의 시는 이 두 가지 본질을 다 중점에 두고 있다.

 

     청년시절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시인은 동남아에서 가장 큰 메콩강 물로 갈증을 풀기도 했지만 부산에서 태어났으므로 남한에서는 제일 길다는 낙동강 물을 먹고 자랐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강 라뿔라따 강은 또 어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보았던 그 강이야 말로 정말 바다처럼 넓은 곳이었다. 이 시는 이 세 강물을 상징하지 않고는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시인이 이러한 강물을 먹고 또 바라보기도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것으로 해석된다. 오히려 보편의 의미를 넘어 운명의 의미를 띤다는 게 더 옳겠다.

 

     이 시는 시인의 지나온 과거가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개별적인 특성을 풍요롭게 설명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것으로 끌고 간다. , 사실 자체는 개별성에 머무르지만 이 시의 본질은 보편성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겠다. 보편성이라는 말은 또한 추구 가능함이라는 말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시의 내용은 언제나 타당성을 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성에 지나치게 충실하면 문학적 호기심을 유발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시인은 재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놓고 상상력을 확대화 시켰다. 그러므로 문학적 상상력을 문맥화하기 위해 주체와 정념, 혹은 시간과 공간의 실재적인 순간을 강을 통해 열어젖혔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자연적 시간은 경험적 시간의 바탕이 되고, 경험적 시간은 자연적 시간에 의미를 부여했다.

 

내가 마시고 가까이 한 강물들은 내 속에 흘러들어

뒤섞이어 부딪치고 때로는 부서지고 출렁이어

어찌할 수 없는 내 존재의 음계들을 빚었지만

나는 지금도 온전한 소리꾼 하나 되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온전한 소리꾼 하나 되지 못했다는 뜻은 후회의 뜻이 있기 이전에 불안, 혹은 미완의 현재가 들어있다. 불안은 개인적인 문제이면서, 그 근본적인 원인이 바깥에 있다는 점도 있다. 그러므로 불안이란 보편적인 근대적 정서로서 근대인의 자유라는 달콤한 역설로 표현될 수도 있다. 물새똥 섞인 낙동강 물과 야잣닢 뜬 메콩강물, 그리고 토사빛 라뿔라따 강물이 몸속에 흘러들어 자신의 삶을 살았다지만 개인적으로는 불안으로 귀결된 시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의 음계는 보편적 불안의 실존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자잘한 슬픔조차도 추스르지 못하는 시인은 그런 자연적 시간을 참회에 가까운 경험적 시간으로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로, 시인은 자기슬픔 내지는 현재의 필연적 시간의 단계를 강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끌어들였다. 이런 현상은 그 자체가 자기라는 히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참회록>p,83)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승에서 빚지지 않았으면서도 갚아야 하는/이상한 보이지 않은 빚의 존재를 알고서부터/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놓고/ 나는 하늘의 기색을 살피는 날이 잦아졌다>> 이처럼 여러 시에서 시인은 겸손과 참회의 마음을 고백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시마다에 삶의 진정성과 체취가 그대로 들어있다고 하겠다.

 

     그의 또 다른 시 <개미론>을 보면 나도 저처럼 흙 구멍의 검은 침묵 속으로 숨고 싶다 개미는 아니지만 천지간에 부끄러운 사람이기에라고 말하고 있다. 이토록 쪼그만 사물에 입체감을 불어넣는 감성체계는 그 이유가 고향을 떠나와서이든, 부유하게 살지 못해서이든, 처자식을 호강시켜주지 못해서이든 그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다만 자신의 꿈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의 진짜 맛은 여러 강물이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생의 물관을 차고 오르는 그 출렁거림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황당함에 있다. 여기에선 시인의 독창성만큼이나 이해의 보편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유하자면, 시인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모종의 면역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마치 인식과 행위의 근간에 명확한 자기라는 주체가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이 자기란, 일종의 불안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다소 파격적인 전언을 들려줬다고 할 수 있다. 즉 출렁거림이란 잔잔하지 않다는 뜻으로서, 언어와 문화차이에서 오는 신산스러운 경계면이 아직 몸 안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회개의 방식으로 씌어졌다는 것은 여전히 그 주체의 영역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화자는 오랜 타향 생활에서 오는 이질감을 생의 낯섦과 낯익음으로 극대화 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시하며 또한 떠도는 바람을 다 받아낸 사람의 실루엣을 제시했다.(참고로 시인은 스스로 바람시인이라는 칭호를 즐겨 썼다) 그러면서 화자는 한 움큼의 슬픔을 삼켜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정웅시인의 싸인이 들어있는 시집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를 다시 정독하면서 내 눈도 한참 붉었었다.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의 익살스럽고 품위 있는 해학적인 표현은 울다가도 웃게 만드는 맛깔스러움이 있었다. 어쩌면 시집 전체의 시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다 좋은지... 그야말로 한 편도 그저 그런 것이 없었다. 고향을 향한 그의 그리움은 넋두리에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민생활의 체험과 풍속을 한국설화에 접목하는 방법은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분은 백퍼센트 타고난 시인이셨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 겸손하고 마음이 따뜻한 시인이셨다. 이제 다시 그분을 볼 수 없다는 게 그지없이 안타깝고 슬플 따름이다


                                                                                                        2017년 "미주시학" 여름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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