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 (고사목) 감상

2019.02.09 17:05

정국희 조회 수:154

고사목 지대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 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사라져가고

숨져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유지를 받들듯

산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는 생사의 양상이 바뀌어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맺혔으니,

 

죽은 나무들도 산 나무들을 깊이

인정해주고 있었다

 

나는 높고 외로운 곳이라면 경배해야 할 뜨거운 이유가 있지만

구름 낀 생사의 혼합림에는

지워 없앨 경계도 캄캄한 일도양단도 없다

 

판도는 변해도 생사는 상봉에서도 쉼 없이 상봉주인 것

여기까지 삶인 것

 

죽지 않는 몸을 다시 받아서도 더 오를 수 없는

이곳 너머의 곳, 저 영구 동천에 대하여

내가 더 이상 네 숨결을 만져 너를 알 수 없는 곳에 대하여

무슨 의혹 무슨 신앙이 있으랴

 

절벽에서 돌아보면

올라오던 추운 길 어느 곁에 다 지운 눈보라

굽이치는 능선 밑 숨죽인 세상보다 더 깊은 신비가 있으랴

 

 

 

          서서 천년을 살고 죽어서 백년을 산다는 고사목은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채로 죽는다고 한다. 첫 행에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라는 표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그 자리에서 새로이 살아가고 있었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시인이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의미이자 실제적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의식적으로 동일성을 추구하며 고사목 속에 생명을 넣어 자연과의 일체감을 유지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옛날 원시인들이 수목이나 식물들에게도 영혼이나 정령이 있다고 믿었듯이 시인도 훼손되는 자연을 회복시키기 위해 죽은 듯 살아있는 고사목에서 살아있는 감정을 끌어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바로 3연에서 <유지를 받들듯, 산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을 인정해주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시애틀 울창한 숲을 거닐다 커다란 고사목을 본 적이 있다. 영지버섯을 여기저기 다닥다닥 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죽어서까지 진액을 다 빼내주는 부모의 헌신을 생각했다. 그 당시 늙은 아버지가 아프고 계셨기 때문이었는지 그 광경은 마치 괜찮다 괜찮다갸릉대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다시 말하면 죽어가면서도 자식들 걱정에 눈을 감지 못하는 부모마음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서정시의 언어는 이처럼 풍경 속에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 아니 고정된 주체의 내면 풍경에서 상상이 산출되어 서정적인 구절들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봐야겠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자연과 한 몸이므로 자연히 시에 이끌리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의 재제는 <죽지 않는 몸을 다시 받아서도 더 오를 수 없는 이곳 너머의 곳, 저 영구 동천에 대하여 더 이상 네 숨결을 만져 너를 알 수 없는 곳에 대하여> 라고 하는 존재 인식이 바탕이 된 시다. 즉 연민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게 하는 시라고 하겠다.

 

       죽은 나무들이 산 나무를 인정해주듯 서로 인정해 주는 것, 더불어 산다는 것 이런 것이 바로 동일성의 진정한 원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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