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장에서

2018.06.27 16:24

정근식 조회 수:12

탁구장에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근식 

 

 

 

 

  탁구장을 자주 찾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탁구장에 간다. 인근 상가에 탁구장이 몇 군데 있지만 나는 사무실 탁구장을 자주 이용한다. 사무실 탁구장은 비용 없이 여가를 즐길 수 있고 직장 동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매력이 있다사실 내가 탁구장을 자주 찾는 것은 다른 나만의 이유가 있다. 그곳은 객지생활을 하는 내가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술로 푼다지만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음주는 내게 또 다른 스트레스다. 그런 탓인지 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서툴다.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혼자 끙끙 앓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된다.  

 사무실을 옮기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삼십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지만 이런 스트레스는 처음이다. 낯선 업무에 적응하느라 밤늦도록 업무를 처리했지만 만만찮은 일이라서인지 남에게 표현하지 못할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다. 지난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심리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았는데, 심각한 정도라며 고위험군이라고 평가했다.

 오늘도 탁구장에 간다. 감사장에 간 직원을 기다리다 탁구장으로 간다. 아침에 감사장에 들어갔는데 저녁 8시가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오늘까지 그 직원은 이틀 내내 감사를 받고 있다. 나는 감사장 앞에서 직원을 기다리다 지쳐 탁구장으로 가지만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이런 날 누군가 내게 사소한 시비라도 걸어 준다면 3차 세계대전이라도 치를 것 같다. 오늘같이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면 나는 밤이 늦도록 탁구장에서 지낸다.  

 나이가 들면 몸은 약해지는 만큼 마음도 약해지는 모양이다. 오랜 직장생활로 직책이 오르고 경험도 늘어 스트레스를 적게 받을 만한데 예전보다 더 소심해진 것 같고,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것 같다. 요즘엔 아내의 사소한 말 한마디, 직원들의 섭섭한 행동 하나에도 스트레스를 느낀다.

 나도 삼십대까지는 스트레스는 잘 받지 않았다. 상사가 잔소리를 해도 사무실을 나가는 순간 잊어버렸고, 설사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도 좋아하는 축구나 다른 운동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십대 중반에 축구를 하다가 팔이 골절되고 난 뒤부터 무리하게 운동을 하지 않았다. 즐겨하던 마라톤이나 축구도 포기했다. 더구나 몇 년 전 그레이브스병을 진단받고는 아예 운동은 남의 일이 되었다.

  우연히 1년 전부터 탁구를 다시 시작했다. 이십여 년 전까지는 제법 탁구를 쳤는데 흥미를 잃어버리고 난 뒤에는 탁구장에 간 적이 없다. 탁구 라켓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새로운 사무실에 근무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우연히 탁구를 쳤는데 기분이 좋았다. 탁구 라켓을 쥐고 있는 순간만큼은 스트레스나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탁구에 빠졌다.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을 탁구장에서 보낼 때는 남들은 열정이 많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탁구를 쳤다. 탁구 경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공에만 집중할 수 있어 다른 어떤 기억도 생각할 수 없는 무아의 경지를 느끼면서 점점 탁구에 빠졌다.  

  살아가면서 목욕탕에서 옷을 훌훌 벗어 버리듯 잡념이나 스트레스를 버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잊어버리려 해도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잡념이나 스트레스가 아니던가. 그러니 잠시지만 그것을 벗어 버릴 수 있는 탁구장이야말로 나에게는 파라다이스인 셈이다.

  지난달부터 내가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 특별감사를 받고 있다. 이삼년마다 받는 정기감사조차 당사자가 되면 부담스러운데, 목적 감사를 받고 있으니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요즘 업무량이 갑자기 늘었지만 인력이 충원되지 않아 주말까지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직원들에게 수고한다는 격려는커녕 감사를 하고 있으니 직원들 사기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감사를 청구한 직원에게 서운함은 있다. 그렇다고 원망할 생각은 없다. 특히나 직장 동료라는 이유로 책임을 피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내가 문제가 있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가 맡은 업무가 보수지급 업무니 전 직원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업무다. 작은 내 의사결정 하나라도 수천 명의 직원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이니 원칙에 벗어나거나 위법이 있다면 당연히 책임을 지는 것이 맞다. 내가 여기서 감사의 내용에 대하여 누구의 잘잘못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탁구장의 사물함을 열었다. 오늘도 스트레스로 어깨가 무겁다. 감사받는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아직도 감사중인 모양이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그리고 무거운 옷을 사물함에 넣고 열쇠를 채웠다. 사물함을 닫으면서 어깨를 누르고 있는 스트레스를 잠시 가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지금부터 무아의 지경인 나의 파라다이스가 시작된다.

 탁구의 백미는 게임이다. 모든 신경이 집중되는 순간이다. 집중은 한가지에게만 관심을 갖게 된다. 눈을 집중하여 넘어오는 공의 위치를 보고 회전을 확인한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라켓으로 공을 넘긴다. 다음은 넘어오는 공을 예상하고 다시 넘길 준비를 한다. 아직은 초보자이지만 내가 연습했던 공이 가끔 게임에서 멋있게 들어가는 순간은 가슴이 탁 트인다. 가끔 고수에게 배웠던 기술이 정확히 들어갈 때면 탁구 기술이 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다. 게임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이기면 좋고 져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쩌다 운 좋게 고수를 만나면 배우는 것이고 하수를 만나면 도움을 줄 뿐이다.

 옷을 갈아입는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자꾸 일들이 떠오른다. 감사는 끝났을까. 답변은 잘 했을까. 다른 문제는 없었을까. 가벼웠던 어깨에 다시 스트레스가 짓누른다.  다시 일상의 시작이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한다. 감사를 받은 직원의 전화와 문자를 확인한다. 감사가 9시쯤 끝났다는 문자가 와 있다. 불평없이 묵묵히 감사를 받는 직원이 고맙다.

 탁구장 밖은 어둠이다. 함께 있는 동료들이 떠나고 혼자 남았다. 비상등만 반짝거리는 건물 주위를 천천히 걷는다. 목에 건 신분증을 벗어 손에 쥐었다.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일들을 생각해본다. 신분증에 다른 직책을 새기기 위한 내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탁구장에서 무거운 옷을 벗어 버리듯 내 욕심을 벗어 버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름이 깊어져 가고 있다. 개골개골 거리다 울음이 잠시 멈추더니 다시 개골거린다. 객지의 외로운 밤은 또 이렇게 깊어가고 있다.

                                                  (2018.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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