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그리는 손

2018.09.04 06:11

김성은 조회 수:6

내일을 그리는 손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태풍 솔릭이 생각보다 얌전하게 지나갔다. 휴업을 했고, 학생들이 없는 학교를 지키며 건물 전체 창문을 꼼꼼하게 단속했다. 2002년부터 내가 몸담았던 우리 학교는 나와 함께 열여섯 살을 먹었다. 건물 높이가 달라졌고, 운동장 한 켠에 신축 건물이 생겼는가 하면, 푸른 잔디와 나무가 우거진 학교숲이 가꾸어졌다.

 여름방학을 맞아 나만의 피서법인 드라마를 검색하는데 '스케치, 내일을 그리는 손'이라는 제목에 솔깃 손이 멈췄다. 내용인 즉, 여 주인공 시현은 경찰특공대다. 그런데 시현에게는 미래 범죄사건 현장을 스케치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이 있다. 어느 순간 머리가 깨질듯 아파오면 홀린 듯 시현의 손이 그림을 그린다. 정신이 든 뒤 스케치를 분석하면 특정시각과 사건현장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나타난다. 시현의 능력을 알게 된 경찰 본부는 특수 수사팀을 꾸린다. 시현이 그린 그림을 단서로 하여 사건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시현과 그 동료들은 매 순간이 초조하다. 어떻게든 그림 속 사건 현장이 실제가 되지 않게 하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이야기는 얄궂게도 아슬아슬하게 시현의 그림을 재현해 나간다.

  피곤했다. 문득 '인간에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삶이 얼마나 심심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고, 그저 앞으로 닥칠 어떤 일에 얽메어 걱정하고 불안해하다가 귀한 생을 다 소진해 버릴 것 같아 지레 한숨이 나왔다.

  남편은 유비무환을 신조로, 계획과 준비가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유형이랄까? 여행을 갈 때도 일회용 커피와 종이컵을 챙겨 가는 사람이니, 준비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나로서는 실로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 계획과 규칙을 세우고, 원칙에 맞게 움직이며 절도 있는 생활 습관을 기르는 것은 누구에게든 꽤나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시현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쫓기듯 그것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라면, 나는주저없이 사양할 것 같다. 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네 인생이 좋다. 미리 예측할 수 없으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의 설렘을 맛볼 수 있지 않은가?

  태풍 솔릭의 경로에 따라 긴박하게 기상청의 예보가 이어졌다. 2002년 악명 높았던 태풍 '루사'를 떠올리며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안내견 강산이의 용변을 위해 이른 새벽 잰걸음으로 놀이터에 가다가 거짓말처럼 통로에 쓰러진 고목을 마주했었다. 머뭇거리는 강산이의 기척에 발을 앞으로 내밀어 더듬어 보니 통나무 다리가 새로 놓인 것처럼 놀이터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번 태풍 솔릭도 어마어마한 풍속과 괴력을 지닌 놈이라며 기상청의 예보는 요란했다. 교육청에서 발령한 휴업 문자가 비상 연락망을 통해 공지되었고, 밤사이 창문에는 테잎을 X자로 붙여 유리창을 보호하라는 주의 사항도 다급했다. 딸아이를 친정어머니ㅇ에게 맡기고 출근한 나는 잠잠한 기상 상태에 허탈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물론 큰 피해 없이 무서운 태풍이 지나가서 천만다행이었지만, 요란한 예보에 긴장할대로 긴장한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나는 새 물건을 유난히 아끼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모셔진 물건은 켜켜이 시간을 쌓는다. 아껴두었던 새 물건이 먼지 속에서 광채를 잃어가듯 나의 시간은 고요하지만,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내일이라서 다행이다얼마든지 꿈꿀 수 있고, 얼마든지 가꿀 수 있으니, 매일 새로울 수 있는 오늘이 얼마나 황홀한가?

                                                                          (20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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