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고 있는 여인들

2018.10.06 00:52

이진숙 조회 수:6


img76.gif

비를 맞고 있는 여인들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홈통으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참 아름답다. 특히 오늘 같이 주위가 고요할 때는 더욱 더 내 귀를 간지럽히는 하프 소리 같아 좋다. 이런 날 거실의 커다란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빗금을 그어 내리듯이 내리는 비의 모양 때문에 끝없는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마당 끝머리 꽃사과나무 곁에 나란히 놓여 있는 여인들의 흉상에 눈이 머문다. 가슴에 세상의 모든 짐을 안고 있는 듯 한쪽에 두 개씩 네 개나 되는 젖가슴을 가진 여인들, 고개를 비뚜름하게 비틀고 얼굴에는 온갖 시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먼 곳을 끝없이 보고 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고,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이 보이는 날에는 세상 걱정을 내가 대신 맡아 하겠다는 표정이다.

이 여인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우리 가족이 된 지도 벌써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 여인들과 더불어 곁에는 기다란 고깔모자 모양의 테라코타도 놓여 있다. 테라코타로 된 여인 흉상과 고깔모자 모양의 테라코타 작품을 바라보니 아들이 유학을 준비하던 때가 문득 문득 생각난다.

미술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그는 엉뚱한 일을 한 번 해 보겠노라고 결정했단다. 그러더니 제법 큰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아들의 엉뚱한 결정에 놀라기도 했지만 우리 내외는 그런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 사이 같은 과 동기생 여자와 결혼하고 영업도 열심히 잘 하고 있었다. 그의 엉뚱한 결정이 또 한 차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누군가 ‘예술은 마약과 같다’고 했다.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끊지 못하는 마약처럼 예술이란 것도 그와 똑같다. 나도 충분한 경험을 한 일이기도 하다. 근 20여 년 붓을 놓고 오로지 직장생활, 엄마, 아내 노릇만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그림을 그리겠노라고 했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3년 넘게 회사 생활을 잘 하던 아들이 다시 대학 때 전공을 살려 유학을 떠나겠다며 준비한 작품들이 지금 우리 집 마당의 주인공이 된 그 여인상들이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시에 있는 ‘에딘버러대학교 예술대학’에서 석사과정 공부를 하겠다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내기 위해서 만든 작품들이다. 그 작품 덕분에 무난히 합격하여 내외가 그곳으로 유학을 떠났다. 회사에 다니며 아들 낳고 살뜰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삶을 포기한 그들에게 현실은 얼음보다 더 차갑고, 사막의 모래바람보다 더 험난한 길이었다. 그 고생을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본인 스스로 택한 길에 책임을 끝까지 지고 온갖 고생을 다하며 내외가 무사히 석사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그 지역 사회에서 아들은 유리공예가로 며느리는 보석공예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간혹 들려오는 소리는 사나흘은 굶기 일쑤고 같은 교민에게 혹독한 배신을 당했다는 등 차마 글로 옮기기조차 어려운 일들을 참아내고 있었단다. 그 와중에 아들은 다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자 기간이 다 될 때마다 우리 내외도 덩달아 가슴조이며 행여 비자가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 일쑤였다.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에게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곳 백인 사회에서 아들은 장학금을 받아가며 무사히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도 차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에딘버러뿐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초대전을 하게 되었고, 멀리 미국에서도 제법 지명도가 있는 전시에 매번 초대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커다란 부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바람처럼 흘러 그곳에 간 지 만 10년이 지나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이젠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EU국가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누리게 되었으니,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아시아인이라며 인종차별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며 전전긍긍하던 걱정거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매번 모교에서 석사과정 학생들에게 한 학기씩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전속 갤러리도 여러 곳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며느리도 유수의 갤러리 여러 곳에 전속이 되어 있고 쉼 없이 초대전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생활이 그러하듯 그들도 풍요로운 일상생활 대신 풍요로운 창작활동에 행복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가까운 이웃나라에 휴가를 다녀 올 수 있고, 예전처럼 밥을 굶는 일은 결코 없이 살고 있음에 만족해하며 살고 있다. 논문을 발표하거나 권위 있는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는 일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니 부모인 우리도 마음이 놓인다.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 마당에 놓여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니 아들의 유학생활이 생각나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그 작품을 바탕으로 오늘날 훌륭한 유리공예가로 훌쩍 성장한 아들의 모습에 그 여인들도 마음이 놓이는 듯 그녀들의 표정도 오늘 따라 촉촉하게 젖은 피부에 생기가 더 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우리 집 정원의 품격을 높여주어서 아들에게 많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비가 그치고 나면 가을이 우리 코앞에 성큼 다가와 반갑다며 인사를 할 것이다. 그 인사를 받을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2018. 10. 5.)



* 포트폴리오 :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나 관련 내용 등을 집약한 자료 수집철 또는 작

품집
 

댓글 0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크기 제한 : 2.00MB (허용 확장자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4 피아노소리 정근식 2018.10.08 2
223 적금 타던 날 최정순 2018.10.07 2
222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신효선 2018.10.07 2
221 술 이야기 백남인 2018.10.06 2
220 고춧대 지팡이 전용창 2018.10.06 2
219 서정환의 잡지 인생 김세명 2018.10.06 1
» 비를 맞고 있는 여인들 이진숙 2018.10.06 6
217 무소유의 삶 전용창 2018.10.05 4
216 나의 쉼터, 건지산 한석철 2018.10.05 1
215 금요일밤 아기의 울음소리 김혜숙 2018.10.05 2
214 유목민의 집 방문 소순원 2018.10.04 1
213 강화도 나들이 조경환 2018.10.03 1
212 엉거츠산 트래킹 소순원 2018.10.01 1
211 다시 맞이하는 한글날 김학철 2018.10.01 2
210 며느리가 오고 싶어하는 곳이 되게 하려면 김창임 2018.10.01 2
209 생애 첫 외출 정근식 2018.09.30 1
208 요강단지 한성덕 2018.09.30 2
207 횡단보도와 신호등 정석곤 2018.09.30 1
206 폭염이 준 행복 김금례 2018.09.29 2
205 춘향골 남원을 생각하면 [1] 김학 2018.09.2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