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전주

2018.10.25 17:05

정남숙 조회 수:7

천년고도, 전주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전주엔 '천년고도 전주'란 타이틀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전주를 떠나 40여 년 만에 귀향한 나는 제일 궁금한 것이 있었다. ‘천년고도(千年古都)’ 란 언제를 기점으로 천년이라 하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주위에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900, 견훤(甄萱)이 후백제 도읍지(都邑地)를 전주에 세웠으니, 그 시점일 것으로 믿었다.  

 

 “견훤왕궁 터[] 보러 가요!” 후백제 왕도(王都)가 전주라면, 왕궁(王宮)은 어디에 있었을까? 내 궁금증을 풀어준다며 출퇴근을 같이하는 동료 한 분이 견훤왕궁 터를 보러 가자고 했다. 왕궁 터가 있다는 말에 흥분하여 약속을 했다. 동고산성에 오르는 날, 등산복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스틱까지 갖추고 설레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그러나 내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산에 오르기는 무리였다. 동행자의 양해를 구하며 천천히 승암산(僧岩山)을 올랐다. 몇 걸음 떼고 쉬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네 발로 기어올랐다. 백두대간을 수없이 오른 동행자는 나의 거북이걸음에도 짜증내지 않고 천천히 몇 걸음 앞서가며 주위 배경을 계속 설명해 주었다. 승암산을 오르려니 힘은 들었지만, 시내 쪽에서 바라만 보던 천주교 치명자성지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가다 쉬다 반복하며 산등성이를 돌고 돌아 마침내 ‘동고산성 견훤왕궁 터’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옛 궁성 터를 볼 수 있었다. 숨을 돌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재빠르게 달음질하던 다람쥐가 두 손을 모으고 뒷발로 서서 우리를 맞았다. 나무에서는 한 여름살이를 위해 수없는 변화의 과정을 견뎌온 매미들이, 역사를 찾아 목마른 우리를 이해한 듯,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입성(入城)을 환영해 주었다. ‘아, 여기가 후배제 궁궐 터구나!’ 넓은 왕궁 터를 바라보는 순간 감회가 새로웠다. 왕궁 터를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올라온 보람을 안고 주위를 살펴보니, 천여 년 전의 후백제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견훤은 신라 서남해안지역의 장수였다. 서기 892년 무진주에서 후백제의 기치를 들었고, 900년 전주에 입성(入城)하여 고려에 멸망한 936년까지 37년간,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였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떻게 이곳이 왕궁 터일까? 내 맘을 읽은 동행은 역시 동고산성은 전쟁을 위한 피난시설일 것이라고 했다. 학계뿐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진짜 왕이 거처하던 왕궁은 어디일까? 궁궐(宮闕)은 왕()이 있는 궁성(宮城)과 내성(內城)이 있고, 밖으로 외성(外城)이 있어야 한다. 분명 어딘가 다른 곳에 왕궁 터는 따로 있을 것이니 찾아야 한다.

 

 내 속맘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때마침 국립전주박물관에 ‘후백제 연구회’가 발족했다. 자진하여 일반회원으로 가입하고 후백제 왕궁 터를 찾아가는 일행에 합류했다. 다양한 전문가와 연구진들과 함께 회원들을 따라 나선 것이다. 다시 동고산성에 올라 궁성(宮城)이 아니라, 군사 주둔지임을 전문가를 통해 확인하고,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인봉리, 옛 공설운동장 자리를 찾았다. 운동장 이전 쓰임이 연못이었으니 제일 심증(心證)이 가는 곳이다. 파가저택(破家瀦)이라 하여, 역적(逆賊)의 집안은 삼족을 멸하고, 집터를 헐고 연못을 만들었던 과거 역사를 돌아볼 때, 이 연못은 후백제 왕궁 터가 아니었을까, 내 나름으로 확신(確信)하고 있지만 천년동안 꽁꽁 숨어버려 찾지 못한 왕궁 터는 설()만 무성하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에게 듣고 자란 견훤(甄萱)의 설화(說話)가 있다. *‘야래자(夜來子)’이다. 광주 북촌은 물론 멀리 유럽이나 가까이 일본에도 있다는 얘기이니, 패자(敗者)에게 붙여진 부정적 설화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왕건(王建)과 싸워 백전백승했던 견훤에 대한 다른 얘기가 있다. ‘농부인 부모님이 밭두렁에 어린 견훤을 놓아두고 밭일을 하는데, 밭둑에 해가 들면 많은 새들이 날아와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배고플 즈음에는 호랑이가 내려와 젖을 먹였으므로,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란 견훤은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정의로웠다’고 한다. 이러한 군주이기에 국호를 '정개(正開)'라 정했고, [삼국사기]에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平壤) 누정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대동강]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 용기 있고 올바른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계승을 천명한 견훤은 백제유민이었을 것으로 역사학자(史學者)들은 보고 있다. 견훤은 “새로운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을 풀려는 것뿐이다.”라며 백제부흥을 선언할 때, 역사적 근거로 고조선(古朝鮮)-마한(馬韓)-백제(百濟)의 계승인식을 가지고, 의자왕의 원통함을 풀겠다는 입장을 표현하며 후삼국 통일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전주를 도읍지로 정한 이유 중 하나는, 견훤이 전주에 첫 입성할 때.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지만 승암산을 보고 도읍지로 확정했다고 한다. 이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효자로서, 머루주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눈 덮인 산을 헤매다가, 어느 양지바른 낭떨어지에 머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따려다가 발을 헛디뎌, 바위 밑에서 잠자던 호랑이 등에 떨어지니, 호랑이가 놀라 그를 등에 태우고 달아나는 꿈을 꿨다는, 아버지의 꿈 이야기가 승암산을 보자 불현듯 떠올랐다고 한다. 이 얘기를 근거로 했는지 몇 년 전, 임실 박사마을 근처에 ‘아자개 머루주’를 생산하던 공장도 있었다.  

 

 후백제 역사를 찾아보는 다양한 강좌와 탐사, 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많은 시간과 인력을 들여도 쉽게 찾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역사()의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기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高麗)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삼국사기]는 신라(新羅)사람 김부식이 기록했기 때문에, 견훤이나 후백제의 역사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또한 고려 왕건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전주에 행정부서를 두어 왕도를 다스리지 않고, 군사시설인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고 5년여 동안 전주를 통솔케 하여, 후백제 역사와 도읍지의 흔적을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말았다. 고려 왕건 중심의 편향적 역사서술로 견훤과 후백제는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기록이 왜곡(歪曲)되었는지 진짜로 견훤이 그렇게 포악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역사는 견훤을 포악한 군주라 기록했고, 또 이 기록은 아들들과의 불화로 인해 후백제의 멸망을 자초한 못난이로 만들어 놓았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너무나 지나치게 견훤을 비하한 양심고백(良心告白)을 한 것일까? “고려왕건이 첩자를 보내 후백제 왕실의 내분을 일으켜 후백제가 멸망했다”고 [삼국사기] 50 열전10 견훤10에 실토하고 있다. 고려태조 왕건은 정정당당하게 싸워 취하지 못하고, 시정잡배와 같은 야비한 술수를 써서 빼앗은 것에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으로, 죽기 직전 <훈요십조>를 남기지 않았던가?

 

 고려 태조 왕건의 승리를 위해 세운 개태사를 다녀오며,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견훤의 입장과 죽음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강성하던 후백제에 예기치 않던 정변, 왕권(王權)에만 눈이 멀어 적의 계략에 빠져 대업을 망가뜨린 비실비실한 큰아들보다,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았다.”며, 공산전투를 비롯 숱한 전투에서 아버지 견훤을 따라 공을 세운 금강에게, 대권을 맡겨 왕조를 튼튼하게 이어가려 한 견훤의 판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 두렵게 여긴 왕건은 야비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견훤은 왕건에게 자신을 의탁했지만, 자신이 세웠던 후백제가 이겨주길 바랐을 것이다. 자신이 세운 나라의 멸망(滅亡), 아무리 미워도 제 아들의 최후(最後), 바라보는 그 아비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었으니 등창이 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로인해 죽음을 맞이한 견훤을 이제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오죽했으면 유언으로 '모악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 했을까?  

 

 후백제 도성(都城)인 전주에 사는 우리는, 왜곡된 기록에 함몰되어 견훤을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존재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늦었지만 이제라도 “'년고도(千年古都) 전주'의 뿌리와 정체성을 정립하기위한, 견훤의 재조명과 후백제의 흔적을 찾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 같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역사적 사명(使命)이려니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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