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라 쓰고 '청춘'이라 읽는다

2018.10.28 05:49

정남숙 조회 수:11

'노인'이라 쓰고 '청춘'이라 읽는다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하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누구의 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싯구가 떠오른다. 그 누구에게도 흐르는 세월은 비켜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노인이기를 거부하며 살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영원한 청춘으로 남을 줄 알았다.

 

 그리운 고향을 품에 안고 40여 년을 서울에서 살다가 귀향한지 10년이 되었다. 고향은 마냥 그립고 언제든지 찾아가면 포근히 안아줄 것만 같았다. 나와 같이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떠돌이 서울살이를 하던 내 친구들은, 나의 귀향을 자신의 일같이 좋아하며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네 번 이상 변한 내 고향은 내 그리움을 간직한 고향이 아니었다.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없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정다운 고향은 꿈속에서 사라지듯 없어지고, 황량한 들녘에 나 홀로 칼바람 맞으며 멍하니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타향 같은 고향을 인정하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나의 닉네임은 '왕 언니'다. 언제 누가 어떻게, 이름대신 나를 그렇게 불러 주었는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호칭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왕언니답게 무슨 일이든 앞잡이 노릇을 한 지가 20여 년은 된 것 같다. 새 둥지를 튼 고향에서는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내 스스로 내 패턴을 지켜나가자 다짐 해 본다. 왕언니답게 팔 걷어부치고 도전을 시작했다. 비록 남의 눈에는 한갓 늙은이로 보이지만, 나는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로 했다. 내 남은 인생을 설계하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품격이나 삶의 질을 높이며 여유로운 노년을 살고 싶었다. 내 전공을 살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문화해설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경기전, 완판본문화관, 한옥마을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전주알림이 노릇을 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좋아하는 역사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를 좋아한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는데, 마침 지인의 소개로 덕진공원해설사 모집이 있음을 알았다. 노인복지관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기관으로, 내 의식에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복지관뿐만 아니라 경로당이나 노인정도 마찬가지다. 내가 노인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노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속해야 하는 곳이 노인복지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진공원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더 알고 싶어 덕진노인복지관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덕분에 덕진공원해설사. 방과 후 교실 강사를 거쳐, 지금은 전북대박물관에서 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나는 배움에 항상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어디든지 강좌소식이 있으면 달려간다. 마침 복지관 복도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청춘시민대학' 모집공고였다. 노인복지관에서 '청춘시민대학'이라니 웃음이 나왔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명예대학생으로 전북대학교에서 젊은이들과 어깨를 겨루며, 중국어를 수강중이라 시간대가 맞지 않아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복지관회원으로 기입한지 1년이 되었지만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막상 포기하려니 미련이 남았다. 시간차를 이용하면 약간 지각도, 조퇴도 학기말까지 가능할 것 같았다. 사무실에 물어보니 일단 등록부터 하라고 했다.  

 

  내가 귀향한 지 십년이 거의 다 되어가지만 나는 항상 친구가 고프다. 노인복지관에는 많은 동아리들이 있었다. 그 중 어느 동아리에 속하지 못하고 문화해설사 몇 분들하고만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는 중이다. 그렇지만 명칭이 '..대학'이니 이 무리에 끼어들면 대화가 통하는 친구 한둘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타향 같은 고향이라 내 방황을 잠재우지 못한 허전함을 채워줄 멘토 하나쯤 만났으면 하는 기대감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새로운 시간표를 만들어 겹쳐지는 시간대 조절에 신경이 쓰였다. 잔뜩 기대를 걸고 늦지 않게 복지관 3층 소망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의실엔 벌써 수강생들이 많이 와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첫눈에 호감이 가고, 필이 통할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것 같아 내 눈망울은 간절함을 담고 강의실을 스켄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누구 하나 눈길 을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대여섯 명씩 한 조를 이룰 수 있도록 자리배치가 되어있다. 미리 아는 사람들 끼리끼리 모여앉아 나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빙빙 돌아 맨 끝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남자 세 분, 여자 두 분이 내가 속한 조가 되어 통성명을 하고, 첫 시간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기도 전 나는 다음 시간을 위해 조퇴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거듭될수록 나는 실망이 앞섰다. 내가 만나고 싶은 친구도 찾지 못하고, 강의도 기대만큼 수준 있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아 괜히 시간낭비만 하는 것 같았다. 그만둘까? 망설이다 오기가 생겼다. '이왕 호랑이를 잡으려 시작했으니 고양이라도 잡자. 한 학기라도 마쳐보자. 그들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다가가면 되겠지.' 맘을 다잡아 보았다.

 

 망설이다 전반기 종강을 맞았다. '청춘시민대학' 1기이니 시행착오도 있음을 인식하며 앞으로 내실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노라고 하는 관장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완주하기로 했다. 내가 먼저 이 모임을 귀히 여기고 강좌에 성실히 임하자고 다짐도 했다. 내 기대를 낮추고 내 욕심을 버리고 나니 한결 강의날이 기다려진다. 야외에 나갈 때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뒤늦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니 얻은 것도 많다. 에너지 절약의 녹색커튼 화분을 심고, 친환경 에코체험으로 토피어리도 만들어 거실 탁자위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할 때 경찰청 초청으로 체험했던 119재난 안전체험을, 다시 한 번 체험하며 옛 기억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처럼 친구도 얻었다. 첫 시간에 만났던 친구가 옆자리를 비워놓고 나를 부른다. 올케와 항상 같이 앉았던 그가 혼자 앉아 있는 내가 처량해 보였나보다. 내게 옆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또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친구가 있다. 나들이 가는 날 내 이름을 부르며 앞에 있는 빈자리를 지나, 맨 뒷자리 내 옆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나와 말벗이 되어 주었다. 이날 두 친구이름이 내 마음과 핸드폰에 저장되었다. 그러나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은 있게 마련이다. 경치 좋은 곳에서 낯익은 일행 넷이 포즈를 잡고 있다. 그중 하나가 사진을 찍으려 한다. 나는 자청하여 찍어주겠노라 다가가니,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를 보고도 우리 일행이냐 물었다. 아니 이럴 수가? 벌써 몇 달을 같은 강의실에서 얼굴을 익혔는데 생면부지인 것처럼 모르쇠로 묻다니! 내가 괜히 오지랖을 편 것 같았다. 몇 년을 같이해도 옆자리를 내어줄 사람들 같지 않았다.  

 

 노인들만 드나드는 노인복지관에서, 노인을 '청춘시민대학'이라 부르니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지금은 부담 없이 정답게 들린다. 내가 원하던 대로 노인을 청춘이라 불러주니 도리어 복지관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노인복지관을 스스럼없이 드나들고 있다. 노인 한 사람을 도서관 하나에 비유하고 있으니, 내게 배당된 도서관을 알차게 채우기 위해 더욱 노인복지관을 활용하고 싶어서다. 노년의 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 실속 없이 바쁜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남들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길지 몰라도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2018.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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