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그리며

2018.11.20 05:32

백남인 조회 수:8

어머니를 그리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백남인

 

 

 

 

  얼마 전 지인의 모친 문병을 다녀왔다. 춘추가 96세라고 한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는 친구나 지인의 부모님이 장수하시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인가 하고 부러워한다.

  나의 어머니는 참봉을 하신 외할아버지의 열한 번째 딸로 태어났었다. 곱게 자라셨지만 당시의 조혼 풍속에 따라 열네 살에 두 살 위인 신랑에게 시집을 오셨다. 열네 살의 신부는 맏며느리로서 시부모와 다섯 명의 시동생들까지 대가족의 살림을 도맡았었다. 날마다 아홉 식구의 끼니와 빨래는 물론, 시부모 시중, 약한 몸으로 글공부를 계속하는 남편에의 내조, 연년생인 시동생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일 속에 파묻혀 살아야 했었다. 논밭이 많은 집이었으니 농사철에는 또 얼마나 일이 많았을까.  

  열여덟 살에 첫아이를 비롯하여 세 살 터울로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심신은 얼마나 고달팠을지. 고달프고 힘든 일상 속에서도 시동생들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결혼과 분가를 시켜야 했다. 그런 과정을 겪을 때마다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고초 당초보다 매웠을 것이다.

  시동생들이 모두 분가한 뒤 할머니는 맏아들이 몸도 약한데다 농사를 지어 집안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어 보이므로 몸이 건강하고 농사일에도 능한 다른 아들에게 전답과 가옥을 편중되게 배정하고 그 아들한테 노년을 의탁하려고 했다. 할아버지 역시 할머니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셨다. 맏아들이요 맏며느리인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부모로부터 푸대접을 받으며 설움과 원망을 속으로만 삼켰다. 나의 두 형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불만을 갖고 항의를 했지만 결정된 사항을 번복시킬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모님의 결정에 거역하지 않고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으며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친정과 처가마을로 향했다. 그 동안의 가시밭길 같은 시집살이는 물거품으로 날려 온데간데없고 어머니의 한은 가슴속에 남았을 것이다. 그 동안 고생한 맏며느리를 배려하고 장성한 두 손자들의 의견을 믿고 현명한 판단을 했어야 마땅하지만, 너무도 편중되게 처분하신 것이다.

  그 뒤로 큰형은 결혼하여 고향 마을에서 초라한 집에서 물려받은 박토 몇 마지기를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고, 작은형은 결혼한 뒤 광산개발 같은 일을 하려고 객지로 나가 살게 되었다. 이 모두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나는 외가 마을에서 늦둥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친정마을에서 아주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객지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떠돌이생활을 계속하셨다.  

  어머니는 남편이 몸과 마음이 여리고 가정관리 능력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한이 맺힌 것 같았다. 자식만큼은 심신이 튼튼하고 강한 생활력을 갖도록 하려고 힘쓰셨다. 어머니는 기회 있을 적마다 강한 근성을 기르려고 단련시키신 것 같다. 어둑어둑할 때에 이웃마을에 심부름을 다녀오게 하였다. 내 또래가 하는 일이라면 꼭 해보게 하여 남한테 뒤지지 않도록 격려해 주셨다. 누구와 싸우기라도 할 경우엔 맞고 오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집에서 벌을 서야 했었다.

 

  어머니는 외가마을에서 길쌈과 품삯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가끔씩 외지에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오는 약간의 돈과, 먹고 입는 것을 검소하게 하면서 절약하고 저축하여 논밭을 사서 농사를 지어가며 억척스럽게 사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나를 경찰이나 면서기를 시키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의 눈에는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행세하는 것처럼 눈에 비친 것 같았다. 어머니의 바람은 심신이 강하고 남들 앞에 권력을 행세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무르고 여리며 악착스럽지 못했다. 그보다는 손해 보면서 사는 것이 슬기로운 처세임을 의식하고 그렇게 생활하려고 힘썼던 것 같다.        

  내가 6학년이었을 때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인공치하 석 달 동안 학교에 다닐 생각은 까마득히 잊었고, 928수복이 된 뒤에도 우리 마을에서는 학교에 다시 다닌 사람이 없었다. 그 뒤 삼년간 농사일을 하고 작은형님이 운영하던 정미소 일을 도와주면서 공부와는 완전히 담쌓고 살았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신태인 장에 갔었다. 길가의 서점에 들러 진학에 필요한 책을 샀다. 늦은 나이를 무릎 쓰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중학교에 간신히 합격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경찰이나 지방공무원이 되겠다고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사범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 때, 한 마을에 살고 계시던 외사촌 형님들이 어머니에게

 “고모는 고생 다하셨어요. 남인이가 삼년 뒤에 선생님이 되면 편한 밥 잡수시게 돼요.

하면서 축하와 위로를 하셨다. 어머니도 환한 얼굴로 기뻐하시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다. 나도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여 어머니를 편히 모시려고 마음먹었었다.  

  내가 전주에서 공부하는 1학기 중간쯤에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석 달간 영하다는 의원을 모셔다가 온갖 치료와 간호를 다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은 너무나 위중하여 당시의 의술로는 살려낼 수가 없었다. 조금도 차도가 없이 갈수록 악화되시더니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시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허망했다. 한 동안은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돌아가시니 효도할 기회는 없어지고 말았다. 삼십대 후반에 만득으로 낳은 그 아이가 제대로 커서 사람구실을 할 것인가 노심초사하며 키운 자식이 그 어머니께 반포지효(反哺之孝)를 하고자하나 기회를 주지 않으시니 제대로 효도를 못하게 된 자식으로선 항상 한이 맺힌다.

  부모가 장수하시는 지인을 만나면 부모 안부를 물으며,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자네는 효자야.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자네는 복 받은 사람이야. 참으로 부러워. 효도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니 말이네.

 어머니 생전에 은혜 갚을 기회를 놓친 이 자식은 항상 불효자요 죄인이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을 뼈아프게 절감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60년도 훨씬 넘었지만, 고생만 하시고 한 번도 영화를 누리시지 못한 어머니가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2018.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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