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2018.12.06 06:19

이연 조회 수:4

청 산 도

                                                                   

                                                                     

 

 

 

 

  해안가 모래를 어루만지던 파도가 먼 길 찾아온 나그네를 반긴다. 귓가에 들리는 낯선 소리에 일상을 벗어나 멀리 와 있음을 실감한다. 모래밭을 구르는 소리, 바위에 철썩 부딛치며 질러대는 환호 소리, 그리고 아득한 남태평양 어디쯤에서 긴 시간 달려와 숨 고르는 소리.

  여행은 새롭고 낯선 풍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멀리 떠나와 낯선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듣고 보고 느끼며 새롭게 눈을 뜨는 것이다. 못 가본 곳을 그리는 마음은 왜 나이를 먹지 않는지 모르겠다. 내게 바다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완도항에서 페리호를 타고 50분 거리에 있는 섬 청산도를 찾았다. 달리는 뱃전위에서 일행 열 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시끌벅적하다. 파도에 밀려오는 비릿한 냄새가 바닷바람을 타고 나그네의 안부를 묻는 듯하다.  

  구불구불한 돌담길과 논두렁길을 한가롭게 걷다보면 절로 발길을 멈춘다하여 ‘느림의 섬’이다. 배낭을 메고 돌담길을 걷는 여행자들이 푸른 바다와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같다.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는 해안선 100릿, 미역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마을길을 11개 구간으로 나누어 느리게 걷다가 쉬어가는 청산도는 걸어야 제격인 섬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섬은 문명의 때가 묻고 이 마을 고유의 아름다움과 주민들의 건강한 삶을 얼마큼 앗아가 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담쟁이 넝쿨이 돌담을 감아 오르고 있었다. 살아낼 수 없다고 좌절하고 포기했을 때 섬사람들은 함께 손잡고 벽을 오르는 담쟁이처럼 세월의 벽을 넘었으리라.  

  초가지붕 밑 낮은 돌담이 정겹다. 태풍도 넘보지 못했던지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이끼가 돌담을 감싸고 있었다.  여행은 공간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그 시간 속에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 했던가?  

  담장너머 이웃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보며 일상의 것들을 나누었을 섬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고만고만한 이웃들이 모여 살았을 돌담길엔 낮은 굴뚝도 보였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금방이라도 피어오를 것만 같다. 서로 의지하고 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살았을 섬사람들의 순수했던 삶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처녀 총각이 어쩌다 눈이 맞아 담 너머로 은밀한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을 것만 같은 정겨운 돌담길이다.    

  일찍 찾아온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한적한 논두렁길을 걸었다. 저만치 산비탈에 작은 다랭이논들이 하늘을 향해 한 계단씩 죽 올라 앉아 있고, 모가 심어진 좁고 길다란 논에는 파란하늘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행렬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산비탈에 땅을 고르고 구들장처럼 넓적한 돌을 깐 다음, 그 위에 작은 돌과 흙을 지어날라 건조시킨 뒤 다시 흙으로 채워 만든 ‘구들장논’이었다. 자투리땅도 일구어 쌀 한 톨 더 얻으려 했던 이곳 사람들의 처절한 자연과의 싸움이 논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딸이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만 먹고 가도 부자’ 라고 했다는 해설사의 말이 귀에 남는다. 개미 역사하듯이 맨손으로 일구어 낸 청산도에만 있는 구들장논이 유네스코 세계 농업 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를 알 것 같다.

 

  멀리 파란 바다에는 섬사람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전복양식장이 있었다. 전국 소비량의 대부분을 이 섬에서 생산해 낸다고 한다. 네모판 양식틀이 바다위에 수도 없이 떠 있는것을 보고 뒤따라오던 누군가 전복이 사는 아파트라고 했다. 미역과 다시마를 먹고산다는 영양만점인 ‘전복탕’을 점심으로 먹었다. 뚝배기에 시래기와 된장을 버무려 살아있는 전복 두 마리를 껍질 채 넣고 걸쭉하게 끓인 전복탕은 청산도만의 조리법이라 했다.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라기보다는 동편제를 떠올리게 하는 투박한 맛이었다.

  슬로우 시티는 단순히 빠름의 반대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환경, 자연, 시간. 계절과 특히 나 자신을 존중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전통을 지키는데 뜻을 같이한 전 세계 123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 5만 명 이하, 전통적 수공업과 조리법과 고유의 유산 그리고 자연친화적인 농법 등이 그 조건이라고 한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인 언덕에 올랐다. 4월 유채꽃 축제는 끝났지만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는 당리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세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유봉일가, 아버지와 아들과 딸이 어우러져 황톳길을 걸어 내려오며 불렀던 진도아리랑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명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아리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 스리랑’을 입술에 올려 보았다.

  느리게 산다는 것, 앞만 보며 내달리는 삶보다는 여유를 갖고 뒤를 돌아보며 사는 삶을 생각하게 하는 섬, 바삐 살아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힐링을 선사하는 곳이다. 여행은 만남이기도 하지만 헤어짐도 필연이다. 쏴아! 섬을 향해 달려온 파도가 모래밭에 길게 누워 기울어가는 해를 배웅할 즈음,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바쁜 현실 속에서 잠시 떠나고 싶거든, 삶이 시들하고 권태롭거든, 느림의 섬 청산도에 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그네들이 ‘쉼표’라고 말하는 그곳에 여럿이 가는 것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하다. 바닷가 모래위에 써보고 싶었던 한마디. ‘느림은 행복을 위한 리듬이다!’

                                                    (2018.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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