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보람(9)

2018.12.15 07:39

윤근택 조회 수:7

  어떤 보람(9)

 

 

                                                                  윤근택 (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자전적(自傳的) 수필 연재물은 이제 16()에까지 닿았다. 사실 수필작가인 나는,수필문단에 오른 지 사반 세기에 이른 나는, 연작수필도 꽤나 여러 종류, 수십 편씩이나 적어왔다. 경험한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동일 제재 내지 동일 제목하에 연작물을 적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나의 작업은 이어질 것이다. 이번 글은 직전 어떤 보람(8)을 적은 다음 곧바로 이어서 같은 날 적는 글이다.

 

16. 사무직이면서도 휴대전화를 참말로 잘 수리하던 직원

 

 

우선, 이 글을 읽을 독자님들 가운데서도 연령적으로 내 인생 후배들인 분들한테는 감히 일러줄 게 몇 가지 된다. 이는 이 글의 중심사상일 수도 있다. 먼저, 살아생전 내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당신은 종종 우리한테 애닯으면 못 올라가는 나무가 없다.고 하였다. 다음부터는 나의 이야기다. 남이 엿 먹으라 할 적에 그것이 꿀임을 알라, []로 받았거든 말[]로 갚으라,일이 꼬일수록 행복해진다, 배수진을 치라 등이다.

예천전화국 영업과장이었던 나. 열심히 휴대전화를 파는 등으로 영주권 전화국 전체 영업성적을 향상시켰음은 자타가 다 아는데, 느닷없이 다시 5개월 여 만에 비보직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이른 새벽 큰댁에 해당하는 영주전화국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이동 중에 한 통의 휴대전화를 받게 된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그는 며칠 전 그곳 영주전화국으로 전보발령 받은 박ㅇㅇ 부장. 그가 전화상으로 말했다.

윤과장, 참으로 미안해요. 나도 이제 막 발령을 받아 어찌 손 쓸 형편이 못되더군요. 사실 우리가 지난 날 본부에서 같이 근무했을 때 윤과장 성품 내가 잘 아는데 .

본디 온화한 성품을 지녔고, 나와 동갑이었던 박부장의 마음 씀씀이가 예나 그제나 다를 바 없었다.

나의 대꾸는 이러했다.

부장님, 우린 옛정 따위를 생각할 만치 한가롭지 않아요. 당장 부하직원들 개인 캐비닛부터 차례차례 열어 보세요. 차명으로 가개통(假開通)해둔 휴대전화가 가득가득 들어있을 겁니다. 그거부터 해결해야 되지요. 제가 그걸 모조리 해결해 드릴 테니, 제가 배속될 과()의 과장이 자기 맘대로 저를 비보직과장입네 하며 함부로 부리지 않도록만 단속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나는 그야말로 북풍한설 몰아치는 창구에다 자발적으로 점방(?)을 차렸다. 고객이 출입문을 열자마자 최초로 마주치는 원탁. 그것을 나는 책상으로 삼았다. 의자는 고객과 나란히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장의자를 그대로 썼다. 나는 그 원탁에다, 분신인양 여기며 들고 다니던 속도 느린 PC를 얹었다. 직원들 가운데 평소 나를 알고 지냈던 여직원 등은 고약한 세상인심을 위로한답시고 안타까이 여겼다. 남의 속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곳이야말로 고객접점이며 영업 최적지인데 .

잠시 그 PC도 소개해야겠다. 참으로 사연이 많았다. 영양전화국 영업과장으로 지내던 때에 휘하의 휴대전화 담당자가 하도 농땡이를 쳐서, 프로그램 운용 교육도 받은 바 없는 내가 암암리에 어깨너머로 휴대전화 처리 프로그램 운용을 익혔고, 그 프로그램도 내 PC에 깔았다. 그 농땡이 부하직원 덕분에, 나는 휴대전화 개통, 명의변경, 해지 등을 처리하는 데 귀재(貴材)가 되었고, 안동권 전화국 전체에서 휴대전화 개인 판매실적으로 직원들을 거의 다 먹여 살리다시피 하였다. 그랬던 내가 노조관리를 잘못 했다는 핑계로 쥐도 새도 모르게 예천전화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내용년수 지난 그 PC를 귀중히 여기며 그곳까지 들고 갔다. 그리고는 5개월 여 과장보직을 유지하며 휴대전화 판매만큼은 다시 영주권 전체 전화국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또 그랬던 이가 무슨 미운 털이 박혀서인지, 그 낡은 PC를 들고 영주전화국 일선 창구 고객맞이 원탁에 그렇듯 올렸으니 .

나는 수소문 해서 전화국 내에서 가장 LAN선을 잘 까는 이를 불렀다. 그가 작업을 끝내자마자 그의 아이디로 휴대전화 판매 실적을 하나 올려 주었다. 다음은,그 전화국에서 전력공사를 최고로 잘 하는 이를 찾아, 그로 하여금 PC전원을 살리도록 하였다. 그이한테서 가개통분 휴대전화를 빼앗다시피 하여 실사용자한테 팔아주었다. 한편,예전에 거래하던 광고업자한테 명패를 사비(私備)로 주문하여 원탁 위에 버젓이 놓아두었다. 휴대전화 과장 윤근택이 그 명패였다. 가관 아닌가. 직제상 그러한 직함은 없었다. , 예천전화국 근무 당시 나를 잘 따르던 부하이자 입사 후배인 양반한테 충동질 해서 윤근택 휴대폰 과장 개업 축하! 화분도 받아 비치했다. 정말 가관 아니냐고? 물론 그 전화국에는 이미 휴대전화 처리 담당이 있었건만, 그는 내부고객인 직원들한테까지도 불친절했으며, 서울 소재 명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는 이가 말이 어눌해서 오는 손님조차 놓치곤 했다. 그러면 그렇지! 예천전화국에서 봤을 때에 큰집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전화국의 휴대전화 판매실적이 저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직원들은 그 인간 하는 꼴이 미워서라도 휴대전화 가개통분을 월부금까지 꼬박꼬박 물면서라도 붙들고 있다고들 하였다.

내 점방은 거의 불이 날 지경이었다. 굳이 새 휴대전화기만이 실적을 올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자급제 휴대전화도 실적으로 잡아 주었다.사실 통화료가 수입원이니 그게 정상이다. 당시엔 그 자급제 휴대전화 판매도 고급 휴대전화 판매 수당과 마찬가지로 건당 3만원을 직원들에게 지급했다. 자급제 휴대전화란, 번호를 물고 있지 않는 중고 휴대전화에다 번호만 심는 휴대전화를 일컫는다. 나는 경로회 회원들을 주요 표적시장으로 삼았다. 창구에 다른 볼일로 들어선 노인들한테 내가 밤새 수리한 중고휴대전화를 개통하여 목에다 걸어드리곤 하였다. 그분들은 경로당에 가서 친구분들한테까지 자랑했고, 우루루 몰려오곤 하였다. 문전성시(門前成市), 그 당시 내 점방(?) 앞을 일컫는 말이리라.

자급제 휴대전화기의 물량이 달려 나는 꾀를 내었다. 그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새까만 그 입사 후배 녀석. 또 별나게 나댈세라, 그가 퇴근하고 난 이후 열쇠 업자를 불러 그가 우수고객 기기변경 등으로 낡은 휴대전화기를 회수해서 보관 중인 창고의 열쇠를 몰래 복사하게 이른다. 물건은 충분했다. 특히, 폴더형 휴대전화기의 액정화면이 나간 것들은 수리하기가 밥 먹듯 쉬웠다. 인간의 두뇌에 해당하는 메인 보드가 탈난 것은 어찌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별로 바쁘지 않은 시간엔 틈틈이 시내 S사 휴대전화 A/S센터 등에 가곤 했는데, 그들 A/S센터 직원들의 수리요령을 어깨너머로 훔쳐보곤 하였다. 세척액이며 육각렌치며 소형 드라이버며 남땜인두며 온갖 걸 다 사게 되었고, 퇴근하면 사원아파트에서 잠 아니 들고 비보직과장의 서러움을 달래며 휴대전화 수리를 하곤 하였다.

서러움 아닌 서러움을 겪었던 나. 심지어 고등학교 후배이자 입사 후배이자 룸 메이트였던 OO 과장 녀석한테서조차 서러움을 겪었던 걸 지금도 생각하면 .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적 없는 이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들 하지 않던가. 절감하였다. 내가 그렇게 하여 챙긴 휴대전화 판매수당을 허투루 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심지어 내부고객인 동료들한테도 공짜로 휴대전화 준 예가 없다. 장맛은 손끝에서 난다고 하던데, 내 손끝에서 휴대전화 판매실적이 나온다는 걸 차츰 알게 되었다. 어찌어찌 하다가, PC 프로그램을 잘못 운용하는 수도 있었는데, 그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보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묘안이 생기기도 하였다. 휴대전화 처리요령 즉, 프로그램 운용요령에 관해서도 달인(達人) 수준이 되어갔다. 어떤 날엔 A4용지에다 화살표를 그려가며 이렇게 저렇게 하면 답이 나오겠다고 연구해 본 적도 있다.

그렇게 해서 1년 여를 보내고 보니,나의 휴대전화 개인 판매실적이 500여 대 되었고, 그것은 작은 전화국 전체 직원의 판매실적보다 많았다. 봉급 외 수당이 무려 1 500여 만원에 달했다. 물론 고객들한테 고스란히 수당을 돌려준 예도 많았고, 부대비용(?) 등으로 써버린 금액도 많았다. 최종적으로는 수중에 500여 만원이 남았다. 주말마다 경산의 가족들한테로 오면, 아내를 승용차 조수석에 태우고 온 데 골짝을 찾아 다녔다. 초보운전이었던 내가 골짝에서 뒷걸음도 제대로 못 쳐 쩔쩔 맸던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아내의 불평은 잦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고작 500만원 가지고서 땅을 사겠다니 말이나 되어요?

그러나 나는 의미롭게 휴대전화 판매수당을 써야 하며 그것이 농토구입이며 발품을 팔다 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렇게 수없이 발품을 판 나. 그러면서도 개울을 끼고, 거기 갈겨니와 버들치와 다슬기가 노니는 곳이어야 한다고 늘 고집하곤 하였다. 그렇게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고, 온갖 기지(奇智)를 다 동원하여 그 형편없던 뙈기 논을 사게 이른다. 평당 3100원꼴 잡히는 480평을 1 500백 만원에 사게 되었다. 수중의 돈은 500만원이었는데 어떻게 했냐고? 과감히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보탰다. 남들은 비웃었다. 특히, 내 살붙이들과 피붙이들도 한사코 말렸다.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바로 그렇게 산 것이 지금의 만돌이농원이 되었다. 그게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처음엔 이곳을 휴대폰농장으로 부를까도 싶었으나 . 사실 이곳 만돌이농원은 시작은 미미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창대(昌大)해졌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야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남이 엿 먹으라고 하면 꿀을 먹어야 한다. 되로 받았거든 말로 갚아야 한다. 일이 꼬이면 행복해진다(塞翁之馬). 그리고 일은 저지르면 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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