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는 로제트

2018.12.25 04:27

윤근택 조회 수:6

    냉이는 로제트(rosette)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산골은 아직 잔설(殘雪). 그러함에도, 나는 아내한테 함께 가자고 졸라 양지쪽 밭으로 나선다. 냉이는 잎이 동상(凍傷)을 입어 갈색에서 채 회복되지는 않았으되, 무리지어 일어나고 있다. 개중에는 하얀 꽃을 성급히 피운 황새냉이도 눈에 띈다. 땅도 어지간히 녹아 있어서, 날 조뼛한 호미로 캐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얀 뿌리가 꽤나 매끈하고 살쪄 있다. 내가 한 움큼 캘 동안에도 아내는 아직 몇 촉밖에 캐지 못한 모양이다.

    “여보,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데... .”

      차마 뭐라 대꾸는 못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꽃샘바람처럼 스쳐간다. 아내는 어느덧 예순의 문턱에 와 있다. 나는 아내보다 삼년 늦게 태어났으니... . 된장찌개에 녀석들을 씻어 넣음으로써, 남들보다 봄내음을 먼저 느껴보려는 내 심사를 아내가 모를 리 없다. 또한, 이웃들한테도 봄소식을 나눠주고픈 내 속마음을 모를 리 없다. 뒷동산 우리의 설중매도 여태 꽃피우지 않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이 무슨 법석이냐고 내심 못마땅해 해도 어쩔 재간 없다. 어느새 아내는, “이만하면 됐는데... .” 하며, 추우니 그만 돌아가자고 보채기까지 한다. 된장찌개를 끓여 나의 춘곤증을 달래고, 아내의 눈을 맑게 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캘 요량이다.

      냉이를 캐는 동안,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생각이 어우러진다. 냉이는 참으로 기특한 식물이다. 봄을 맨 먼저 알리는 나물이 아닌가. 쑥과 달래와 더불어 봄나물로 일컬어지지만, 두 녀석과 품성이 사뭇 다르다. 냉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겨우내 이처럼 자라고 있었다. 지금 내가 마주하는 냉이는, 지난 가을에 싹을 틔운 녀석들이다. 하고많은 시절을 다 두고 굳이 가을을 택했다. 그리고는 혹한을 견디며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여느 식물들처럼 씨앗으로 지내다가 봄날에 싹을 틔워도 좋으련만... . 냉이는 꽃마리, 달맞이, 망초, 광대나물 등과 더불어 월년생(越年生)’으로 일컬어진다. , 두해살이 식물이다.

      냉이는 십자화과(十字花科)에 속한다. 꽃받침과 꽃잎이 각각 넉 장인 식물을 통틀어 십자화라 부른다. 비교적 단조로운 꽃 구조를 지닌 셈이다. 흔히, 배추과라고도 한다. 십자화과 식물들의 꽃들이 대개 그렇듯, 냉이는 오뉴월에 그저 수수하게 흰 꽃을 피운다. 냉이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으나, 40여종이나 된단다. 이들 가운데 나물로 먹을 수 있는 종류만 해도 여럿이다. 냉이, 개갓냉이, 나도냉이, 싸리냉이, 황새냉이, 꽃황새냉이, 는쟁이냉이, 미나리냉이, 다닥냉이 따위다. 대개 냉이는 꽃다지, 지칭개 등과 의초로이 지낸다. 물론, 이들도 데쳐서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이다. 냉이는 ‘shepherd's purse(양치기의 지갑)’이란 재미나는 영어이름도 지녔다. 여름날 꽃대를 뽑아 올라 심장형(心腸型) 열매를 제법 많이 다는데, 그 모양이 양치기의 주머니 같다는 뜻일까? 아니면, 양치기들은 무료함을 달래려 냉이의 씨앗을 털어 주머니에 담았을는지도 모른다. 냉이는 ‘mother's heart(엄마의 가슴)’로도 불린다. 이는 하트 모양의 열매에서 온 말임을 금세 알겠다. 우리 고향 쪽에서는 나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냉이를 캐면서, 이들의 독특한 생존전략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냉이는 로제트 식물이다. 로제트란, 뿌리잎이 방사상(放射狀)으로 땅 위에 퍼져 무더기로 나는 그루를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그 모양이 장미꽃 모양의 다이아몬드 장식같아서 생긴 식물학 용어다. 흔히, 로제트 식물을 방석식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줄기가 아닌, 뿌리에 돋아난 잎을 뿌리잎[根葉]’ 또는 좌엽(座葉)’ 또는 근출엽(根出葉)’이라고 불렀음을 다시 떠올린다. 사실, 냉이뿐만 아니라 방가지똥, 민들레, 보리뱅이, 점나도나물 따위도 로제트 식물이다. 로제트 식물인 냉이의 생존전략은 실로 가상하다. 요컨대, 엎드림과 낮춤이다. 겨우내 뿌리에서 돋아난 잎들을 땅거죽에 납작하게 방사형으로 펼침으로써 보온방석이 된다. 그래서 방석식물로도 일컫는가보다. 잎들이 다소 동상(凍傷)을 입더라도, 땅 아래 뿌리만은 성하게 하여 봄을 기약한다. 이 낮은 자세는 효율적으로 드센 바람을 견딜 수 있게 한다. 고개를 쳐들고 있지 않기에, 자칫 산짐승한테서 지질러 밟혀도 쉽게 죽지 않는다. 나아가서, 가뜩이나 먹잇감이 귀한 삼동(三冬)에 고라니나 산토끼 등 초식동물들한테 들킬 염려도 적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른 봄 내 아내한테조차 쉬이 들키지 않는다. 설사, 들킬지라도 고라니가 잎을 뜯어먹을라치면 흙도 입속으로 딸려 들어갈 테니 그리 마뜩하지 않을 것이다. 또 조금은 잎이 뜯겨도, 뿌리마저 뽑히지 않는 한 봄은 올 테고, 꽃대를 쑤욱 빼올려 꽃을 기어이 피우리라. 심지어, 잎들이 동해(凍害)를 입어 약간씩 떡잎이 되는 것도 생존전략상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자신이 품은 향기와 달큰함을 감추어둘 수가 있을 테니까. 냉이를 비굴하다고 얕볼 일이 아니다. 굶주린 공격자들은 많고, 희생물이 되어줄 잎들은 귀한 혹한의 계절이니 달리 묘책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 아내의 성화를 못 이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우리가 채집한 냉이는 노지(露地)에서 혹한을 견뎠기에 향기와 달콤함이 더할 것이다. 피를 맑게 하고, 간의 해독을 도와주며,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여 원기를 되찾게 한다지 않던가. 무엇보다 춘곤증을 덜어주고 눈을 맑게 한다니, 두고두고 된장찌개에 넣어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끼니마다 냉이의 향기와 함께 이들의 훌륭한 로제트 전략도 음미해볼 요량이다.

 

      * 이 글은 <에세이 포레> 2011년 가을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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