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봉이다

2019.01.07 05:07

정남숙 조회 수:28

나는 봉이다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약속한 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 ‘나를 봉’으로 알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셋째가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할 것 같다. 내키지 않은 약속이니 지키지 않아도 될 한 가지에 희망을 걸어 보았다. 전날 폭설이 내려 도로가 막혀 통행이 불가능하게 되면, 도로를 핑계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잔뜩 기대를 걸고 일기예보에 촉각을 세웠다. 그러나 날씨는 내편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혹한이 시작되었지만, 내가 고대하던 폭설은 이웃지방에만 내리고 있었다.

 

 약속 당일, 일찍 눈을 뜨고 깜깜한 밖을 내다보니 역시나 눈은 오지 않고, 칼바람만 몰아치고 있었다. 오지 않은 눈만 탓하며 슬그머니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가 뭉그적거리고 있는데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억지로 일어나 혼자 궁시렁거리며 “그래, 나는 네 봉이니까!” 체념하고 꽁꽁 싸매고 밖으로 나와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현재 온도는 영하 6,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영하 10도가 넘었다. 시큰둥하게 인사를 하는데 짐들을 싣는다. 탁자 한 세트에 김치 통 둘 여행용 대형 캐리어와 크고 작은 짐들이 줄줄이 실린다. 작은 이삿짐 같았다. 뒤 트렁크도 모자라 뒷좌석 한 사람 자리만 겨우 남겨놓고 꽉 채웠다.

 

 부산에 살고 있는 넷째가 이사를 했으니 한 번 가보자 했다. 한 달여 동안 감기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셋째가 일방적으로 날짜를 정해 통보했던 것이다.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를 보니 뒤는 깜깜이다, 짐들이 꽉 들어차 아예 보이지 않는다. 조심조심 가야한다고 마음먹었지만 속마음은 편치 않아 잔뜩 인상을 쓰며 운전을 했다. 내 나이 낼 모래면 80인데, 더군다나 감기몸살로 아직 몸도 추스르지 못한 노인인 나를, 제 전속기사처럼 아무 때고 필요하면 불러 운행시키는 셋째동생이 야속하기만 했다. 내 속도 모르는 셋째내외는 간식거리를 잔뜩 준비해 서 내 입속에 계속 집어넣어 주며 말을 걸었다.  

 

  “나는 친정의 영원한 봉이지!” 체념하며 세 시간남짓 달려가는 동안 지난날이 떠올랐다. 친정엄마는 그 많은 동생들의 결혼은 물론 결혼 전 선을 볼 때마다 큰딸이 있음에도 매번 나를 불러들였다. 내 일이 아무리 바빠도 엄마의 부름을 받으면 곧장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1976년도 면허증을 받고 자가용을 사고 나니 엄마의 호출은 시도 때도 없었다. 대전 동생에게 보낼 개소주를 해 놓았으니 내려와 가져다 주라했다. 내 것도 아닌, 동생네 것을 서울에서 내려와 대전까지 가져다주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거리개념도 없고 내 사정이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울에 사는 친정집 일가친척들의 대소사도 전부 내 차지였다. 나는 친정집 봉이기를 자처했는데 보답은 바라지도 않았다.  

 

  조선 선조(宣祖) 때 광국공신(光國功臣)2등 공신 맨 끝에 사신을 따라 다니는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란 사람이 있었다. 임란(壬亂)이 발발하기 전해인 선조 24(1591)에 책록된 광국공신(光國功臣)은 윤근수 등 19인 인데 광국공신이란, 중국의 공식(公式) 문서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에 관한 종계(宗系)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는데 공이 큰 사람에게 내린 공신책록이다. 태조 3(1394)에 명()의 조훈조장(祖訓條章)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는 잘못된 기록을 발견했다. 이로부터 태종-선조 간 12대에 걸쳐 전후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선조 22(1599)에 종계를 바로잡는데 성공했다. 이때 사신19인보다, 역관 홍순언의 공이 제일 컸다는 것이다.

 

  역관 홍순언은 5년 전, 역시 역관으로 다른 사신을 수행한 바 있다. 당시 명나라 국경지대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숙소에 수종드는 여인이 너무나 범상치 않아 보여, 국고(國庫) 300냥을 아무 이유 없이 그 여인에게 주고, 그냥 돌아와 5년남짓 옥살이를 했다. 명나라 병부대신의 부인이 된 이 여인은, 이름도 모르고 성씨만 홍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국경수비대에게 역관 중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으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5년 후 다시 역관으로 동행하던 홍순언에게 보답으로 그의 공무(公務)를 처리하는 일에 도움을 주어 거의 200년 동안의 숙원을 쉽게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역사상 대표적으로 ‘봉 잡혔다’고 했으며, 몇 배 더 ‘큰 봉을 잡았다’고 후세에 전해졌다.

 

 봉()이란, 상상속의 새 봉황(鳳凰)의 수컷을 이른다. 봉황은 귀하고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새, ()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혜택을 주는 좋은 의미가 담겼을 것 같다. 언젠가 개그맨 최양락이 ‘나는 봉이야’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주며 외치는 말이었으니 자신을 높이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 사전(辭典)에는 ‘어수룩하여 이용해 먹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풀이하고 있다. 옛날 기생들이 양반네들을 이용해 재물을 과분하게 취한 것을 ‘봉 잡았다’ 하고, 과거보러 오는 서생들을 주막 주모들이 몽땅 갈취하여 과거도 보지 못하고 거렁뱅이로 귀향하게 하던 것을 ‘봉 잡혔다’ 한 것 같다.

 

  내가 스스로 “나는 봉이다”외치는 것은, 내가 한 수고를 알아달라는 게 아니다. 내가 봉황처럼 상서로워 도움을 주고 혜택을 준 것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항상 부족하고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엄마가 임종하실 때 10남매를 대신해 나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신 것은, 내가 끝까지 엄마와 친정에 ‘봉 노릇’ 한 것에 대한 보답일 것으로 나는 믿고 위안을 받고 싶다. 역관 홍순언처럼 친정집에 남들이 하지 못할 큰일을 한 것도 아니며, 내가 가진 것 몽땅 털리지도 않았으니 이래저래 ‘봉 잡힌’ 것도 아닌 것 같다.  

 

  새벽에 기름 빵빵하게 채우고 출발하며, 당일치기인 줄 알고 아무 준비도 없이 따라 나섰다. 도착하고 나니 한 밤 자고간단다. 놀라는 나에게 자고 간다는 말 안했느냐고 도리어 물었다. 셋째는 무엇이든 언제나 제맘대로다. 엄마가 안 계시니 첫째와 둘째인 내가 어린 동생들 돌보아야 할 일을, 그래도 셋째가 먼저 나서서 사람노릇 할 수 있게 해주니 고마웠다, 내 입장만 내세워 잔뜩 골난 모습으로 못마땅하게 찌푸렸던 것이 미안했다. 내려갈 때와 달리, 올라올 때는 내가 말을 더 많이 하며 순식간에 도착한 것 같다. “그래, 나는 봉이야, 언제든지 너희들에게 봉 잡힐게!” 아직도 내가 봉()일 수 있어서 좋다. 다섯째 막내 귀국하면 또 한 번 뭉쳐, 지난번처럼 “나는 봉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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