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옛생각에 잠기다

2019.02.05 23:24

정명숙 조회 수:3

목포에서 옛생각에 잠기다                         정 명 숙

                                                     msookch@hanmail.net

 

 1952년 대한민국 임시 수도 부산에서 나는 숙대 선배 이무현과 박세자와 함께 “희망사”기자였다. 60여년전 기억을 더듬어 보며 과거는 현재속에 기억 밖에 없다. 과거의 기억은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지나가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속에 머물고 있어 오늘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밑걸음으로 남아 있는 것이 기억이다. 그 기억은 청소년기를 거쳤던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나는 오늘여기 목포에 설수 있음에 감사한다.내가 여기에 오게 된 것은 멀게는 1953년 박화성 선생 취재했던 것, 다음으로는 1960연대 남편 조흔파의 동호인 모임인 “해돋이회”가 두 번째 인연 그리고 내 후배 평론가 서정자교수의 치열한 학구열에 고무된 것이  목포를 오게 된 인연이다.  남편을 형님형님하며 따르던 호남출신 문화인들과의 우정은 조흔파가 1980년 사망하자  그 멤버들은 조각가 김영중의 주선으로 모란공원 쉼터에 조각묘원으로 흔파에게  보답하다. 1960연대 조흔파는 스타작가로 우편물이 쏟아져들어와서 내이름으로 오는 우편물이 있었으면 했고 다음에 부러운 것은 사나이들의 우정으로 뭉친 “해돋이회”였다. 결국 해돋이회는 사망한 조흔파에게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을 보며 호남인들의 의리에 나는 울었다.   목포하면 이난영이고 남편 김씨스터즈의 아버지 김해성은 6.25에 납북되다.   희망사는 종군작가를 중심으로 편집되어서 유명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내성 박계주 방인근 김팔봉 한하운 계용묵 오상순 김광주 유치환 박인환 김이석 이헌구 김소운 김송 김규동 송지영 정비석 마해송  구상 이무영 박화성  김말봉 김일엽 노천명 모윤숙 전숙희 조경희 박현서 전혜린등 이제 그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는데 내청춘의 지나간 추억속에 스라이드처럼 가슴에 영상으로 남앗다. 그때는 잡지 편집도 정말 어렵던 시대 카메라 한 대도 없이 태양신문이나 연합신문 사진부 신세를 져야했다.지금와 생각하니 사진 한 장 찍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몇 년전 작고문인들 흑백사진 몇장은 영인문학관과 현대문학관 그리고 국립도서관에 기증해 남길수 있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한강을 도강증 없이 서울로 오게되고 폐허가 된 서울 생활이 시작되면서 희망사는  종로 화신 백화점 거리 견지동에 자리 잡았는데 그곳엔 학원사  희망사 아리랑사 삼중당 평화당인쇄소등이 모여 있고 인쇄소는 주로 을지로에 있었다. 다방은 몇군데 없는 데 화신 백화점 옆 골목에 있는 ‘한가람,다방이나 다동에 있는 호수그릴 소공동에 있는 프라타나스정도인데 그래도 어른들 만나러 갈 때는 약간의 취재비가 나왔다.

 명동거리는 처참하도록  부서져 어수선했다. 저 높은 곳에 명동성당만 뎅그라니 보이고 명동 입구는 엉망이였다. 군데 군데 쌓아 놓은 벽돌사이  풀이 돋아나 더 처량한데 미츠코시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4층 양식당 경향신문근처 휘가로 프라워 소공동쪽으로 지미다방 마드모아젤 삼양다방등 조선호텔 시청앞에 낙랑다방  인사동 븨너스 우리들은 무두가 가난하던 때인데 문인들은  동방싸롱에 나와 차 한잔 시켜 놓고 사람을 무작정 기다렸다.  어디서 원고청탁 받을까 점심도 굶고 주머니엔 찻값도 없어 일어 날수도 없는 한심한 신세 그런 궁핍함 속에서도 희망사는 편집장인 공중인이 출장비를 마련해 주어서 청탁서 가지고 나타나면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런속에서 학원사사장 김익달은 1955년 여성잡지  “여원”을 창간하며 여류작가들을 화보에 싣게 되자 희망사기자인 내가 사진작가 친척아저씨인 정도선에게  부탁해 화보를 찍느라 덕수궁돌담길인가 정동길  몇캇트 찍은 일도 있었는데 김말봉선생은  신여성이였지만 전도부인같은 인상이였고 박화성선생은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지적인 냉철함의 소유자이고 최정희선생은 삼천리잡지를 하던 남편 김동환의 납북으로 슬픔에 빠진 요조숙녀여서 동정을 많이 샀다.모윤숙선생은 관북여성 특유의 자기주장이 강한지사 같고 노천명선생은 청승맞도록 초라해보였다. 내가 만났던 작고문인들은 대개가 일본유학파인데  그들이 겪은 일본의 문화사조가 우리문학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연주의 와 자유연애지상주의  인형의 집 연극등 번역문학 톨스토이의 ‘부활’  카츄사등 우리에게도 그 바람은 거세게 불어닥치게된다.  목포출신 희곡작가 김우진과 평양의 성악가 윤심덕의 만남은 시대를 상징하는 대 사건이였다.  192683일 현해탄 격랑중 청춘남녀 정사. 85일동아일보 특종기사. 이 기사는 연일 사회면을 장식했다. (사의 찬미 다뉴브의 잔물결에 번안가요1)

 

 당신들 가는곳은 산인가 바다인가/나에게는 산도 바다도 필요치 않아 생략, 나라를 빼앗기고 도탄에 빠져 있던 3천만동포를  하루아침에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땅을 빼앗기고 만주로 아라사로  유랑길에 오르던 백성들  그 뿐 아니라 자유연애지상주의 바람은 자살붐을 가져오다.  강명화 봉자등 한강과 온양온천 자살로 이어졌다. 인천상육작전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다친 평론가 자유세계 편집장 임긍재가 부산 갈매기집에서 낙동강소주에 거나해지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가 흐르면 모구가  통곡을 하던 걸 나는 보았다. 1955년 작가와 기자로 만나 조흔파와 나는 결혼을 했다.학원에 연재한 ‘얄개전’이 책으로 나와 인세로 결혼도 하고 내 숙대등록금도 냈지만 나는 장왕록교수팀에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끔 희망사 김종완사장이 원로작가들을 을지로에 있는 동해루에 초대하면 후배문인들이 술이 취해 주정하거나 일본노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나  누가고향을 생각하지 않으리까)를 부르면 박화성 선생은 싫어하시던 걸 기억한다. 우리나라가 인테리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1930년 무렵이라 한다. 그것은 이와나미서점이 1920년 경 이와나미문고 보급선전문에 젊은이 들이여 독서로 인테리가 됩시다. 했던 데서라 한다.  박화성선생은 인테리 여성의 “오는 정가는정”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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