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그 숫자놀이

2019.02.18 05:16

김학 조회 수:4

인생, 그 숫자놀이

三溪 김 학

사람은 숫자와 더불어 산다.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이라는 숫자를 헤아리며 살아간다. 설을 쇨 때마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보태야 한다. 또 대한민국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는다. 나도 내 아들딸도 그리고 내 손자손녀...도 다를 바 없다. 내 주민등록번호는 431005-148****이다. 그 주민등록번호가 바로 나를 대신한다. 그 번호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나는 나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나 자신보다 그 번호가 더 우위에 있다. 요즘엔 달라졌지만 이력서 등 갖가지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그 주민등록번호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 초‧중‧고‧대학에 진학하면서는 1학년 2학년 3학년 등으로 한 학년씩 올라가야 하고, 시험을 치를 때마다 80점 90점 100점 등 숫자로 점수가 매겨져 등수가 판정된다. 그 결과에 따라 수상자(受賞者)로 선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학금 수혜자가 될 수도 있다.

군대에 가서는 아라비아숫자로 된 군번을 받고, 그 군번이 새겨진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녔다. 육군 중위로 제대한 내 군번은 66-02737이다. 제대한 지 반백년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는 게 그 군번이다. 자기 주민등록번호를 기억하지 못한 사람도 군번만은 술술 왼다. 또 KBS재직시절 나의 사번은 13244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은행 저 은행에 저금통장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통장마다 계좌번호가 있고, 또 아라비아숫자와 특수문자로 버무려진 비밀번호를 선정해야 한다. 그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면 저금통장에 들어있는 내 돈도 마음대로 찾아 쓸 수가 없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비밀번호가 있어야 활용할 수 있다. 집에 드나들 때도 현관의 도어록(Door Lock)에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엄연히 내 집인데도 그 비밀번호를 정확히 입력하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주인이라고 소리를 질러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통사정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안면몰수(顔面沒收)의 문지기다.

술이 취했던 어느 날, 아무리 비밀번호를 입력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진짜 비밀번호가 영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파트 출입구 계단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술이 깰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그런데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아내의 도움으로 집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그때의 낭패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는 인터넷우체국을 즐겨 이용한다. 경조비(慶弔費)를 인터넷뱅킹으로 보내면 참 편리하다. 나이 70이 넘으면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결례가 되지 않는다기에 인터넷우체국을 자주 이용한다. 그런데 그곳에도 비밀번호는 있기 마련이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집요하게 권한다. 지능적인 사기꾼들 때문이다. 그 비밀번호를 바꾸다 보면 헷갈리기 마련이어서 쩔쩔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원래 수학에 약한 학생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암기과목에는 강했지만 수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할 때도 이과가 아니라 문과를 택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대학에 들어갔더니 1학년 때 교양수학 한 과목뿐 더 이상 수학 과목은 없었다. 대학시절 수학과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은근히 주눅이 들고 부럽기도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더니 시험을 볼 때마다 채점을 해야 했다. 언제 어디서나 숫자는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활용해야 할 숫자의 단위는 자꾸 높아졌다. 월급계산도 숫자로 이루어졌고, 복잡한 연말정산도 숫자씨름이었다. 또 재테크를 하면서 땅과 집을 사고팔거나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때도 숫자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액수가 많아질수록 숫자 계산은 더 힘들어졌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식당에 가서 외식을 한 뒤 카드로 결제를 하면 계산서를 건네준다. 숫자는 늘 내 곁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한 숫자는 나를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시내버스나 택시를 탈 때도, 기차나 비행기, 배를 탈 때도 요금은 당연히 돈으로 계산해야 한다. 그러니 숫자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발소나 목욕탕에 가도 상황은 다를 바 없다. 식당이나 술집 또는 커피숍에 가도 마찬가지다. 병원이나 약국에 가도,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도 역시 그렇다. 숫자는 잠시도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내 왼손 팔목에는 손목시계가 있고 그 손목시계는 시시각각으로 나에게 시간을 알려준다. 또 내 주머니속의 스마트폰도 하루 종일 시간을 알려준다. 그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은 숫자로 헤아리게 된다. 스마트폰의 만보계(萬步計) 역시 날마다 내가 몇 보나 걸었는지 숫자로 일일이 측정하여 알려준다.

날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자주 사용하는 게 전화기다. 오래 사용했던 집 전화와 스마트폰의 번호를 한꺼번에 바꾸었더니 무인도에 갇힌 듯 외부와 단절되어 버렸다. 전화번호만 바뀌면 현대판 이산가족이 되겠구나 싶었다. 숫자는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숫자에 포위되어 살고 있는 숫자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2016. 3. 15.)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7 운현궁의 빛과 그림자 정남숙 2019.02.19 5
466 다섯 맹인의 번개모임 김성은 2019.02.18 4
» 인생, 그 숫자놀이 김학 2019.02.18 4
464 모던 스타일 정남숙 2019.02.17 3
463 매듭 김창임 2019.02.17 3
462 명절증후군 이윤상 2019.02.17 4
461 그 맛은 그곳에만 한성덕 2019.02.17 3
460 온기 전용창 2019.02.17 2
459 힐링의 도시, 전주 김세명 2019.02.14 6
458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최연수 2019.02.14 4
457 나도 여자이고 싶다 정남숙 2019.02.13 8
456 술래가 된 낙엽 곽창선 2019.02.13 4
455 그 한마디 한성덕 2019.02.12 5
454 시 읽기 윤석순 2019.02.12 8
453 홀아비꽃대 백승훈 2019.02.12 3
452 1억 원짜리 건강정보 두루미 2019.02.09 45
451 말모이 정남숙 2019.02.09 64
450 아름다운 간격 장근식 2019.02.07 53
449 영화, '말모이'와 선교사 한성덕 2019.02.07 29
448 설날 풍경 [1] 김학 2019.02.06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