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맹인의 번개모임

2019.02.18 15:35

김성은 조회 수:4

다섯 맹인의 번개 모임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우리의 번개가 진짜 성사될 것인가, 내심 의문이었다. 유미는 인천 송도에, 나는 전북 익산에 매어있는 몸이었다. 마침 대전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합세하여 만남 장소는 서대전역이 되었다. 하루 종일 유짱과 놀면서 식사를 챙기고, 학원을 보내고, 청소를 했다. 남편 퇴근 시간에 집을 나서기는 처음이었다.

 송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유미도 퇴근 후 고속 버스를 탔다. 우리는 대전에서 9시가 넘어 만났고, 참치회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대전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대범이는 저시력으로 유미와 나, 그리고 허 선배를 안내했다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일일이 배분하랴, 메뉴 설명하랴, 대범이는 바빴다.

 오랜만에 모인 우리는 중학교 동창이다. 맹학교에서 허물없이 학창시절을 함께 했고, 서로의 가정 형편부터 소소한 흑역사까지 모르는 게 없는 죽마고우다. 모든 환경이 우리를 위해 갖추어져 있었던 맹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험한 세파에 시달리며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던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비장애인 조직에서 떳떳하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치열한 시간을 사는 서로의 피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했다. 굳이 나를 포장할 이유도, 예의를 갖출 필요도 없는 우리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잊고 어느새 맹학교 교실 안에 앉아 있었다.

 

 우선은 나를 '성은아'로 호칭하는 사람이 익산에는 거의 없다. 연고가 없는 익산에서 직장생활로 맺어진 인연들은 대부분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거나 '집사님, 어머님" 등으로 통하는 관계다.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중학교 동창들은 서로를 중년이라고 놀리며 깔깔거렸다.

 '장애'라는 묵직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말하지 않아도 아는 끈적한 공감대가 슬프기도 했지만, 말이 필요 없는 우리라서 좋았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나와 허 선배, 낯선 공간에서는 안내가 필요한 유미를 대범이는 혼자서 인솔했다. 토요일 오후, 젊은 인파로 붐비는 대전시내 성심당을 찾은 우리 맹인부대는 서로의 팔을 부여 잡고서 더디게 움직였다. 앉을 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찬 성심당에서 그 유명한 순수롤을 하나씩 득템한 다섯 맹인은 근처 커피숍을 전전했다. 저시력인 대범이는 대표로 커피숍을 살피며 우리 다섯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를 답사했다. 몇 군대를 돌아본 끝에 우리 다섯 맹인은 2층이 있는 커피숍에 둘러 앉았고, 각자 취향대로 주문한 메뉴는 또 대범이 몫이었다. 1층에서 음료를 가지고 올라와야 하는 구조였는데, 다행히 카페직원이 서빙을 도와주었다. 다섯 맹인은 음료를 마시며 '여행'을 궁리했다.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면서 가까운 곳부터 섭렵해 보자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하나같이 낯선 공기에 목이 말라 있었다. 혼자였다면 절대 웃을 수 없을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함께라서 즐거웠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였어도, 이동하는 장소마다 번거롭게 장애인 콜을 예약해야 했어도, 헤어지는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언젠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소개한 일이 있다. '함께'의 의미를, 위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우리의 만남도 그랬다. 혼자였다면 내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지팡이를 들고 커피숍을 찾을 엄두를 냈겠는가? 카페를 찾은들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느긋하게 내 시간을 누렸겠는가?

 많은 작가들이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원고작업을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카페가 무턱대고 좋다. 향긋한 커피가 있고, 다정한 사람들이 마주 앉아 편안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그곳엔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이야기하던 다섯 맹인들은 구체적인 일정을 잡지 못한 채 자리를 파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지날 땐 서로의 어깨나 가방에 의지하여 한 줄로 걸었다. 남들의 시선을 잡아 당기고도 남을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우울하지 않았다. 유미와 나, 그리고 혜주는 다시 서대전역에서 기차를 탔다. 나는 익산으로, 유미와 혜주는 용산으로 각자 일상으로 복귀했다.

  익산역에는 남편과 유짱이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우리 세 식구는 갈비찜으로 달게 저녁을 먹었다. 야근하는 남편이 출근하고, 나는 유짱과 귀가했다. 다시 유짱의 메니저로 업무에 착수하여 아이를 씻기고 재웠다. 늦은 밤 카톡을 나누며 다섯 맹인은 다음을 기약했다. 몇 걸음만 떨어져 있어도 목소리가 아니면 서로를 인식할 수 없는 처지까지 닮은 친구들의 고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강력한 충전제였다.

                                                                (201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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