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째라이즘

2019.03.08 14:46

권천학 조회 수:4

배째라이즘



  • 오피니언 관리자 (opinion@koreatimes.net) --
  • 25 Jan 2019

권천학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시인


근래에 한국의 정치판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꾸만 ‘복수극’을 떠올리게 된다. 왜 그런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짐작하고 추측하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그러므로 다 같이 공감하면서도 멀리 서 있고 싶은 정치 얘기는 저만치 두고, 대신 살아오는 동안 내가 품었던 복수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복수심으로 가득 찬 한 때가 있었으니까.
복수(復讐)! 누구라고 살기가 고단하고 팍팍한 때가 없었을까만, 젊어 한 때 복수심으로 들끓었다. 배신 잘 때리는 세상인심, 가난, 기회상실... 주변에서, 사회에서, 세상에서... 눈뜨고 겪어야 하는 부조리, 불평등, 편견 에 절망하고, 분노하며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다. 시멘트처럼 굳어있는 현실의 벽,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도 비참함에 매몰되거나 비굴해질 수는 없었다. 당장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사실에 더욱 굳어지는 복수심, 그것은 벼르고 품었던 젊은 날의 비수였다. ‘좋다! 잘 사는 것이 복수다!’ 아드득, 이를 갈면서 이른 결론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무능한 자신을 안으로 담금질 해가며 연마해낼 수밖에. 그것이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최고의 무기였다.


간디를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읽었는데 위인으로 칭송하기 위하여 필요이상으로 미화(美化) 확대하고 있음이 불편했다. 그는 ‘배째라이스트’일 뿐이었다. 체격도 왜소했고, 내성적 성격에 특별한 능력이나 안목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닌 보통사람일 뿐, 오히려 결핍을 안고 그 결핍 때문에 나약한 간디가 위대한 간디일 수 있었다는 것이 나의 견해였다. 처음부터 위인화(偉人化)하는 일반적 시각과는 다른 나의 인식이었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식민지나라의 엘리트인 그는 변호사 일을 시작하며 정의를 실현하려 했지만 차별과 편견의 현실에 대적할 수는 없는 무력함을 통감한다. 힘도 없고 경험도 부족한 젊은 그가 지배국가의 부조리한 힘과 거대자본에 맞설 수 없는 현실을 뼈아프게 자각한다. 때리면 맞아가며 배째라! 막으면 막히면서 배째라! 밟으면 밟히면서 배째라! 엎드려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의 막무가내, 그 상황에서 그가 강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배째라이즘’뿐이었다. 그것이 최선의 몸부림이었고 결국은 비폭력 무저항주의가 되었다. ‘배째라이즘’은 물론 내가 만든 말이지만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일상생활에서도 배째라! 식의 막무가내 앞에선 힘 센 쪽이 되레 헛김을 빼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막무가내는 잇속 따지는 계산이 없다. 그저 하면 된다는 뚝심으로 목숨이든 체면이든 몽땅 내려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평균적인 힘보다 힘이 세다.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나는 내 식으로 한다! 하고 목표에 닿을 때까지 내닫는 선의(善意)의 ‘배째라이즘’은 ‘약한 것이 강하다’거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를 성립시킨다. 가끔은 무지(無知)와 무모(無謀)가 겹쳐 감당 못할 악성 막무가내도 있다. 그런 배째라이스트들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똥에 불과하다.
언젠가 형제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잘 사는 것이 복수야’하고 나의 의견을 말했다. 여간해서는 나를 두둔하지 않는 엄마가 웬일로 ‘그 말은 큰누나 말이 맞다!’하시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칭찬을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 아들과 딸에 대한 편견이 곧이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경도(傾倒)된 어머니였다.


옛날 같으면 생(生)의 마디로 삼던 환갑(還甲)이 유야무야 되는 백세시대가 열리면서 육십도 청춘이 되고, 이모작(二毛作)에 이어 삼모작(三毛作)을 구가하는데, 이제 나는 노년에 들었다. 처음 겪는 노년이라서 얼떨떨한 중에도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궁리하다보니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포기했던 일. 이제 도전해 보고 싶은데 망설여진다. 이유는 나이와 체력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다. 아쉬움만 짙어진 채 물러서 보지만, 포기가 되지 않는다. 체력이야 맞게 받아들이면 될 일이고, 하다보면 적응되지 않을까 하다가, 그렇지만 이 나이에... 망설이다가, 나이? 남을 괴롭히거나 불편하게 하는 일도 아닌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도전하지 않으면 끝내 이루지 못할 꿈. 나이 핑계 삼다니, 누추하지 않은가. 어쩌면 젊은 날은 복수심으로 인생을 개간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먼 성공, 취하고 싶은 욕망, 따라잡기 어려운 변화에 자꾸만 무너지려고 하는 자신의 운명에... 칼을 갈 듯 복수심으로 버텨내는 한 때, 그 한 때가 인생파노라마의 절정인 셈이다.


인생? 유일한 나의 것이지 않은가. 맞다! 노년이라 해서 도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결단하기 전이라서 밝힐 수는 없지만, 못 이룬 꿈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또 한 번 배째라이즘을 실천하는 배째라이스트가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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