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나도 철이 드는 것일까

2019.03.19 07:27

이진숙 조회 수:6

이제야 나도 철이 드는 것일까

 

신아문예대학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어머니가 남겨 주신 것들을 벌써 다 먹었네!오늘 아침 찰밥을 찌면서 남편에게 한 말이었다시부모님이 한 달 사이에 모두 돌아가신 뒤 두 분이 사시던 아파트를 정리하러 가서 냉장고에 있는 것들 중 이것저것을 챙겨 왔다.

 시아버님께서는 짭조름한 젓갈을 특히 좋아하셨다. 매 끼니마다 빠지지 않는 반찬 중 하나인 조개젓이 조그마한 플라스틱 병에 가득 들어 있었다. 얼마 드시지도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남편도 그런 시아버지의 식성을 닮은 듯 젓갈을 참 좋아한다. 내가 워낙 음식을 싱겁게 먹으니 그렇게 간이 센 음식을 먹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특히 고혈압 약을 먹는 처지이니….

 그러던 차 시부모님이 남기신 조개젓을 집으로 가지고 와 냉장고에 넣고 한동안 잊은 채 그냥 두었다. 어느 날 그가 냉장고에서 조개젓을 꺼내 한 젓가락 먹어 보더니 ‘이렇게 짠 음식을 드시다니!’ 했다. 마침 가을무가 있어 채를 썰고 조개젓을 넣어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에 버무려 밥상에 차려 놓으니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한동안 밥상에 조개젓이 오를 때마다 아버지가 참 좋아 하셨던 반찬이라는 말과 함께 문득문득 시아버님의 생전 모습이 생각났다. 반면 시어머니께서는 고기반찬을 좋아하시니 서울에 살고 있는 딸이 가끔 곰국이며 불고기 등을 보내주어서 냉동실에 가득가득 채워놓곤 했었다. 그것들 중 미처 드시지 못하고 남긴 불고기를 시누이가 ‘큰언니 가져다 드세요!’ 하며 싸 주었다.

 불고기를 팬에 구워 먹으면서도 ‘어머니는 고기반찬을 참 좋아 하셨는데….’ 가끔 음식을 하다가도 ‘어머니가 보시면 한 말씀 하셨을 텐데….’ 나도 모르게 이런 말들이 나왔다.

 지난 정월 보름날 어머니가 남기신 팥으로 찰밥을 쪘다. 그 어른께서도 찰밥을 참 좋아하셨다. 그 팥으로 찰밥을 찌면서도 ‘어머니는 팥을 조금만 넣고 찰밥을 찌셨는데….’라며 혼자 중얼 거렸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전주이씨’ 딸로서 살았던 세월보다 ‘전주최씨’ 집안 며느리로 살았던 세월이 훨씬 더 길다. 그러니 나도 이젠 완전한 ‘전주최씨’집안 사람이 된 것일까? 아니면 두 분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일까, 요즈음에는 친정 생각보다 시부모님 생각이 더 난다. 하긴 친정이라고 해야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나니, 특별히 친정집이라며 찾아 갈 곳도 마땅치 않게 되었다. 오히려 우리 집을 친정이라며 찾아오는 딸이 있으니 나는 ‘최씨’ 집안사람이며 딸의 친정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러고 보면 아버님은 참 건강하신 분이었지.’ ‘어머니도 늘 아프다고 하셨지만 그 만한 연세에 아프지 않은 노인도 있었을까!’라며 두 분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듯이 시아버지의 큰 며느리인 나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셨다. 평소 허약한 몸으로 늘 감기를 달고 살았던 나에 대한 염려가 각별하시어 사나흘 만에 한 번 정도는 꼭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나에게 별일 없는지 안부를 묻곤 하시던 다정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시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그다지 살가운 분은 아니셨다. 그것은 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딸이든 며느리든 가리지 않고 나무라시고 핀잔을 주시기 일쑤였다. 그런 연유로 돌아가시고 나면 그닥 그립다거나 생각나거나 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40여 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그야말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던 모양이다특히 음식을 만들 때나 상을 차릴 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가끔 혼자 피식 웃을 때가 있다.

 지난봄에 거두어 두었던 완두콩을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요즈음 밥을 지을 때 조금씩 섞어서 해 먹으니 귀한 때 먹는 것이어서 그런지 고소한 것이 없던 입맛도 살아나게 한다. 밥을 지을 때마다 ‘어머니가 완두콩을 참 좋아하셨는데….

‘완두콩이 나올 때면 멥쌀을 빻아 드문드문 완두콩을 넣은 백설기를 만들어 드셨는데….

 지난 3월 초 밭에 두 이랑이나 완두콩을 심었다. 해마다 수확한 완두콩을 깍지를 따고 잘 씻어 넉넉하게 가져다 드리면 참 좋아하셨다.

 나도 이젠 누구나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노인’이 된지 몇 년이 흘렀다. 이 나이에야 철이 드는 것일까? 돌아가신 시부모님 생각이 나고, 그립기도 하고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지금 어느 곳, 어느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인도환생((人道還生) 하셨을까! 

                                          (2019. 3.17.)

 

*인도환생((人道還生) :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이승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남, 또는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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