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못

2019.04.08 06:45

한일신 조회 수:3

말못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한일신

 

 

 

 

 

  액자를 옮기려고 못을 뽑았다. 벽에 흠이 생길까 봐 장도리 밑에 나무토막을 고이고 조심스레 뽑았지만, 못의 깊이가 선명하게 드러나서 보기 흉했다. 못 자국을 지우려고 아무리 이리저리 어르고 달래도 쉽게 오므라들지 않아서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그 자리에 못을 쳐서 다시 액자로 가려놓았다.

 

  언제던가, 어느 시설로 봉사활동을 나간 일이 있었다. 이곳은 빨래나 도배 등 여러 가지 일들로 부서가 나누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 벽지에 풀 바르는 일 말고는 마땅한 게 없어서 풀칠을 했다.

 

  남자 봉사원들은 벽에 수없이 박힌 못 들을 싹 뽑았다. 누렇게 찌든 벽지도 모두 제거하고, 한쪽 벽에서부터 차근차근 종이를 붙여나갔다. 여러 사람이 손발을 맞춰 일하다 보니 금세 일이 끝났다. 어둡고 칙칙하던 방이 삽시간에 꽃집처럼 환해지자 어르신들의 표정도 한결 밝고 생기가 돌았다. 그런 어르신들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못부터 쳐달라고 했다. 옷장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내가 사는 아파트도 시설방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에 이사 와서는 깔끔하게 살아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욕심이 생겼다. 시계를 걸려고 손에 망치를 들고 고운 벽에 꽝꽝 못을 쳤다. 한데 못이 박히기는커녕 튕겨 나갔다. 이번에는 펜치로 못을 단단히 물고 세게 내려쳤다. 그러자 번개 같은 불빛이 번쩍하고 방안에 퍼지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지며 덜컥 겁이 나 못 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못 자국만 남긴 채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는 일이어서 관리실에 부탁했더니 고맙게도 기사가 전동 드릴로 순식간에 몇 개 박아주고 갔다. 때는 이때다 싶어 그동안 걸어두고 싶었던 시계와 거울, 액자 등을 걸어놓았더니 빈 벽이 없었다.

 

  호사도 오래되면 싫증이 난다던가. 벽을 메운 갖가지 물건들이 마치 넝쿨 식물이 못을 감고 올라간 거 같아 이는 꼭 누추한 내 삶을 보는 것 같았다. 나의 마음 벽에도 언제부터인가 타인들의 못들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내 맘대로 뺄 수 없는 못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칭찬은 보약이지만 비난은 독약이라 했다. 칭찬 한마디는 살아가는데 큰 힘을 주지만, 비난은 상처나 모욕을 주어 인격과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마음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앗아간다지 않던가.

 

  몇 년 전 누군가 내게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 한마디로 얼마나 속앓이를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몸이 아픈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지만, 마음의 상처는 참 오래갔다. 어찌하여 기억하고 싶은 것은 잘 잊히면서 지워야 할 것은 사진처럼 오래 남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컴퓨터 윈도 프로그램이 깨져서 고생한 일도 있다. 어머니는 때도 모르고 컴퓨터에 메어있는 딸이 마뜩잖아 그만해라 그만해라, 하시더니 극기야는 컴퓨터를 부숴버리고 싶다고 하시질 않는가? 물론 늦게까지 컴퓨터와 씨름하는 딸의 건강을 위해서 그런 줄 알지만,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58개의 작품이 저장된 폴더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제대로 저장해두지 않아 생긴 일이지만 이 모두가 마치 어머니 탓인 양 이날따라 어머니가 어찌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딱 이 경우가 아닌가?

 

  나는 살면서 내가 친 못 들을 생각해보았다. 지금이야 시멘트벽이라 함부로 못을 칠 수 없지만 옛날엔 벽이 허술해서 집 안팎의 어지간한 못은 거의 다 내가 쳤다. 그렇게 수없이 친 못 중에는 쇠로 친 못보다 더 강한 말로 친 못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못 중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생각 없이 툭툭 뱉어낸 말로 속을 뒤집어 놓거나 약점을 콕콕 찔러서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못의 크기나 굵기에 상관없이 무작정 내친 말 못들. 못은 한 번 박히면 흉터 없이 뽑아내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부터는 내가 친 무수한 말 못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상처를 키우고 있을지 적이 염려스럽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최근에는 못을 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동안 내가 친 말 못으로 인해 가족은 물론 타인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점 깊이 반성하고 있다. 쇠못보다 더 강하고 날카로웠던 나의 말 못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디어가고 있지만, 흔적은 남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부터라도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여 더는 말 못을 칠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

 

                                            (2018.9.9.)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87 통일의 길 정근식 2019.04.13 39
586 가을 나들이 신효선 2019.04.12 3
585 은퇴도 능력이다 한성덕 2019.04.11 35
584 내가 공주님이라니 김창임 2019.04.09 6
583 아버지의 눈물 이경여 2019.04.08 33
582 맹물처럼 살고파라 고안상 2019.04.08 42
» 말못 한일신 2019.04.08 3
580 좋은 만남, 참된 행복 한성덕 2019.04.08 3
579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두루미 2019.04.07 3
578 봄길따라 남녘으로 김효순 2019.04.06 3
577 만남의 기쁨 신효선 2019.04.06 8
576 메르켈 독일총리가 사랑받는 이유 한성덕 2019.04.06 7
575 하루살이의 삶과 죽음 김학 2019.04.05 36
574 참회와 행복 박제철 2019.04.05 4
573 [김학 행복통장(71)] 김학 2019.04.03 5
572 와이셔츠를 다리며 정근식 2019.04.03 3
571 어머니의 빈자리 고안상 2019.04.02 3
570 봄이 오면 오창록 2019.04.02 3
569 어쩌다 왼손이 김창임 2019.04.01 4
568 전북수필가들의 <나의 등단작> 출간을 기뻐하며 김학 2019.04.0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