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뿌린 씨

2019.04.15 16:59

노기제 조회 수:7

20171030                                                   생각 없이 뿌린 씨

 

   “, 네 아들 찾아. 경비는 내가 댈 테니까


   나이 오십이 된 조카에게 계획 없이 던진 말이다. 그 녀석 여섯 살 때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44년이 되었으니 어떤 성장기를 지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고모와 조카 사이다. 그 사이 열 번도 안 되는 한국 방문에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겠는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세월이 흔적도 없이 떠나버린 후, 일찌거니 빠져버린 머리를 빡빡 밀고 모자를 쓰고 다니는 모습이 내게 보일 뿐이다.


   핸섬한 외모로 한참 잘 나가던 시절, 따라 붙는 계집아이들 다 받아주며 청춘을 즐겼다는 정도는 들어 안다. 그 중 한 여자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앞 남산만한 배를 하고 찾아 와서 할 수 없이 혼인신고 하고 애기 낳고 산다는 소리도 들었다. 어찌된 일인지 9년 후엔 결혼식을 한다기에 한국에 갔더니, 애 어멈이 아닌 딴 여자란다.


   나이 삼십도 되기 전, 이 녀석 한 살 때, 울 큰오빤 딸, 아들 남매를 남기고 철없는 스물 다섯 된 애들 엄마를 울 엄마에게 부탁하며 세상을 떴다. 위암이란 판정을 받고 육 개월 후다. 애들 엄마는 애들 외할머니가 데리고 갔고, 애들은 울 엄마가 길렀다.


   그런 녀석이 아빠 없이 컸는데, 무슨 사연이든 간에 자기 자식 또한 애비 없는 새끼로 세상을 살게 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났다. 돈 없어, 학벌 없어, 연줄 없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그냥저냥 자기 월급으로 근면하게 사는 녀석이니 무슨 여유가 있겠는가. 궁금하겠지만 아들 찾을 엄두를 못 내고 산다. 만나면 애비 노릇 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아니다. 결혼식까지 하고 살던 여자와의 사이엔 아이가 없다. 그도 맘이 맞지 않아 별거하는 모양이다.


   자유스럽게 자기 아들을 찾아도 된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한다니 내가 나서야겠다. 죽은 아빠는 죽었으니 못 만나고 살지만, 살아 있는 아빠가 왜 지 새끼를 애비 없는 자식으로 살게 하겠나. 돈이 원수다. 그 돈 내가 주자. 뭐 큰돈이 필요하겠나.


   다행이다. 찾기로 마음먹으니 쉽게 찾아졌다. 애가 벌써 만 스물여섯이다. 성인이다. 애 어멈은 혼자 몸으로, 아들하나 혼신을 다 해 건강하게 키워 놨다. 옷가게 점원으로 평생을 살면서 넉넉지 못해 여기 저기 카드빚으로 목 졸리며 연명하는 상태다. 공항장애에 불면증이 심해, 혼자 일어서지도 못해 휠체어 신세를 지기까지, 일도 못 나가고 처참한 상황인 모양이다.


   감히 상상도 못했는데, 애 아범이 두려워하던 상황을 접하니 내가 당황했다. 돈이 없어 아들 찾는 거 꿈도 못 꾸던 내 조카에게 큰소리 친 게 나였으니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무슨 카드 빚 이자가 거의 30%. 아니, 없는 사람들 피를 빨아 먹어도 유분수지, 한국에 있는 은행들은 다 나쁜 놈들이라고 열을 올리니, 미국 은행들도 카드 빚 이자는 마찬가지란다.


   이자에 이자만 갚아 나가다 보니 눈덩이가 된 빚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환자가 되어 지옥에서 살던 애 어멈이 불쌍하다.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바로 이런 것이 하늘의 인도하심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애 어멈이 어떤 상태가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두려워 떨린다. 거의 죽어가는 목숨 아슬아슬하게 건져 낸 듯, 안도의 숨을 고르게 된다.


   그 동안, 애 잘 길러서 고맙다. 고생했다. 빚에서 자유롭게 되고, 따스한 말도 듣게 되면서 애 어멈의 건강은 스르르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애 어멈과 재결합은 어려운 모양이다. 마음이 가까워지지 않는 사이가 된 듯. 그래도 아빠 소리 들으니 가슴이 벅차다며 행복해 하는 조카 녀석 음성이 들리니 나도 좋다.


   불현 듯, 생명체로 태어나 일정기간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막막하단 생각이 든다. 어떻게 견뎌 내며 살 것인가? 앞으로 남은 내 인생도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없다. 난 언제부터 이런 인생을 고민하기 시작 했나? 하물며 다른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책임을 지고 성장시키는 시간들이 피하고 싶은 사실임을 절감하고 있다.


   숨 막히는 세상사를 누군가에게 다 떠맡기고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내 20대 후반의 한 순간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무너지고 변하고 사라질 수 있는 그런 믿지 못 할 존재가 아닌, 확실한 존재. 믿어도 되는 존재. 변하지 않는 존재. 내가 마음 놓고 조카 녀석에게 소개할 수 있는 나의 하느님이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 또 다른 계획도 없이 생명을 태어나게 해서 무책임하게 이 세상에 뿌려 놓고, 따라오는 고통을 감당 못하며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는 삶이 싫어졌다


   다시 생각하고 싶다. 내 인생, 조카의 인생, 조카 손주의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느님과 함께 진지하게 의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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