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나에게 무엇인가

2019.04.24 06:52

이향아 조회 수:36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

이향아


근래에 종종 대표작을 자천하여 보내라는 청탁서를 받곤 한다. 그러면 나는 한참씩 뒤적거리다가, 그것이 나의 대표작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 확신이 서지도 않는 것을 대충 적어 보냈다. 보내 놓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게 대표작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대표작이라고 내놓을 만한 뚜렷한 것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없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이 생각을 일으키어 나는 결국 두려움을 느끼고 절망을 느끼고 참담한 각성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나는 20대에 시인이 되려고 애썼으며 시인이 된 다음에는 그것으로 내 인생이 어지간히 이루어진 줄 알았다. 그래서 30대에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었다. 나는 겉으로 겸손을 가장했지만 내 내심의 깊은 곳에는,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시인이라는 선민의식과 자존심,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자긍심으로 기가 살아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을까?
그러나 그것조차도 없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나를 지탱하며 부지하였을까? 아득한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내가 오로지 전념하고 싶은 것은 좋은 시를 쓰는 일이다. 나는 날마다 내 사후에나 남을 수 있을는지 모르는 단 한 편의 대표작을 쓰는 연습을 계속한다. 지금까지 발표한 수 백 편의 시들을 연민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아직도 진동하는 가슴으로 애무하면서,나는 한 편의 <내 자식이 될 시>를 염원한다. 아마도 이 소망 때문에 나는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 것 같다. 아,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내게 있어서 시는 무엇인가? 수 십 년 동안 단 한 순간도 그를 떠날 생각을 못했으면서 한 편의 시도 '이것입니다'고 내 놓을 수 없는 내게 있어서 시는 무엇인가.
나는 마치 객관식 시험문제 문항을 만들 듯이 몇 개의 어슷비슷한 가설을 만들어 보았다.
시는 내게 있어서 생명이다.
시는 내게 있어서 사랑이다.시는 내게 있어서 고통이다.시는 내게 있어서 고독이다. 그리고는 이들 하나 하나의 적절성과 부당성을 점검해 보았다.
첫째, <시는 내게 있어서 생명이다>라는 항목에서 나는 잠시 울컥하는 열기를 눌렀다.
생명이라는 말이 절규처럼 아프게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말은 언제나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생명, 그것은 극단에서의 치열한 외침이며 절대의 주장이다. 생명은 존귀하고 소중하며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시 또한 존귀하고 소중하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동행함은 물론 죽어 없어진 다음까지도 시만은 살아 남아 있어 주어야 한다고 나는 감히 기도하며 당부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나에게 있어 생명이다>라는 항목이 정답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은 왜인가? 생명이라는 말이 막중한 의무를 가진 말이며 경건한 사명을 짊어진 도의적인 말이기 때문인가? 시는 의무도 사명도 아니다. 시는 짐이 아니다. 그리고 생명의 이름을 걸고 시를 운위하는 것이 오히려 시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 <시는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다>라는 항목을 읽으면서 첫째 항목에서의 엄숙감과 진장감이 이완되는 것을 느낀다. 그 이완감은 일종의 낭패감처럼 김 빠지는 것이기도 하며 안락한 쾌적으로 나를 감싸기도 한다.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시는 사랑이다'라고 가볍게 말하고 났을 때, 시의 존엄성이 약화 내지 무화됨을 보는 듯하다. 사랑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어서 그 본래의 자극성을 상실해 버린 것은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 시는 사랑이다. 인생과 우주의 삼라만상을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시는 애초에 잉태되지 않는다.
사랑은 시의 단서이다. 일말의 감격, 한 조각의 흥취에 사랑 아닌 것이 있는가. 시는 사랑과 대등한 가치, 사랑과 동렬의 순위 사랑과 동일한 근원과 성격을 가지고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내 시의 모티브가 되지만 시가 완성되고 난 다음에는 사랑 이외의 것( 혹은 사랑 이상의 것)이 되어 나로부터 분리되어 나간다. 사랑에는 헌신과 희생이 필수적이다. 나는 내 시에 헌신하지 못하였다. 구제 받은 것은 시가 아니라 나다. 시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그러나 나는지금 '시는 내 사랑이다'라고 내놓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럴 염치가 없다.
셋째,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통이다라는 말, 이 말은 언뜻 시의 회임과 성장과 출산의 고통을 연상시킨다.
나는 이 항목을 일독하는 순간, 네 가지 문항 가운데 가장 오답에 속한다고 책크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매력이 없는 문항이며 출제자가 응시자를 한 번 떠볼 심산으로 적었든지, 문항의 숫자나 채우려고 해본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통이다>,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통이다를> 자꾸 반복하면 할수록 그 고통의 감각이 내게 전달되어 오면서 시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서서히 서서히 가슴을 뛰어오르게 한다.
고통, 이것은 단순히 정서의 불균형에서 오는 불안감과 초조감 같은 느낌도 아니고, 육체적 감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통증이나 불쾌감도 아니다. 끝없는 상승과 추구의 자세, 지향의 몸짓에서 오는 구도자의 고통, 차라리 화려한 희열을 내부로 은폐하고 있는 상처와 같다고 할까, 여기서의 고통은 추상성을 띤다.
시는 고통이다. 시는 고통이다. 그러나 그럴듯하다고 느끼면서도 이 말이 일차적으로 전달해주는 어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넷째는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독이다>라는 항목이다. 나는 잠깐 여기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커피는 갈증을 해결하려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갈증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그것은 불완전하다. 육체의 목마름이 아니라 정신의 갈증 때문에 나는 독을 마시는 심정으로 커피를 마시곤 한다. 독배를 들었을 때의 그 사람의 고독, 한없이 청징한 고독의 근원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독'이라는 말을 다시 음미한다.
고독은 내 영혼이 걸어온 길, 나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높은 열도로 끓어오르게 하고 때로는 침잠시키면서 나를 절제하게 하고 나를 사치스럽게 하였다. 나에게 날개 달린 옷을 입혀 은밀한 시간 광활한 곳으로 배회하게 하였다. 나는 그 때문에 나를 모독하는 일체의 것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나를 보호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여기에 동그라미를 친다. 어쩌자는 것인가.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독이었는가? 시는 진실로 나에게 있어서 고독이었다. 각기 다른 의미를 달고 나간, 다른 이름들을 붙인 나의 시는 모두 나의 고독이었다. 물론, 시를 내놓음으로써 내 고독이 위로를 받고 감량이 되고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위로를 받고 어쩌고 할 수 없음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독은 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꾸 더 빛나는 광채를 회복하게 한다. 그것은 덜어내어도 덜어내어도 그만한 눈금으로 다시 차오른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각각 제 크기에 비례하는 마음의 여백, 조금씩 다른 크기의 고독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아무런 의심도 후회도 없이 시험장을 떠나는 아이와 같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다. 햇살에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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