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2019.05.06 16:37

최인혜 조회 수:7

아름다운 인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최인혜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잎이 비처럼 내리던 4월 어느 날, 삼천동 천변을 지나다가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내리는 꽃비를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길가 벤치에는 하얀 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꽃잎을 살살 쓸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우수수 지는 꽃잎이 내 어깨로, 머리카락 속으로, 얼굴을 스치기도 하며 눈처럼 떨어졌다.

 

 꽃향기가 내 몸을 감싸는 가운데 스치는 꽃잎의 촉감은 오랜 그리움을 만난 듯 반갑고 아련했다. 오랜 옛날, 학교 교정에 있던 벚꽃이 질 때면 서럽게 떨어져 내리는 벚꽃이 안타깝고 아쉬워 나무 아래에 서서 지는 꽃잎을 몸으로 느껴보던 그 아련한 기억이 살아났다.

 겨울을 견디고 찬바람에 떨고 웅크리면서도 봄을 준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꽃눈이 꽃샘바람을 이기고 기어이 꽃으로 피어났을 것이다. 그렇게 피어나 겨우 며칠 화사한 꽃으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꽃잎이 안쓰럽고 서러워 보였다. 나무의 가는 줄기에서 어쩌다 꽃눈으로 만들어져 잠시 꽃으로 피었다가 나무와 인연을 끝내고 꽃잎으로 떨어져 내린다.

 

 세상 만물은 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혀 세상에 형체를 갖추고 짧고 길게 존재하다가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면 스러져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꽃이 잠시 피었다가 지는 일이나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억 년의 우주 나이를 생각하면 사람이 사는 100년은 정말 눈 깜박하는 순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꽃이 피었다가 지고 다음 해에 다시 새 꽃이 피듯, 사람도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연이어 살아간다. 세상에 오고 가는 일은 해마다 세대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사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살면서도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악연을 맺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삶을 보내기도 한다.

 

 며칠 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오래전에 전주 J여중에서 함께 교사로 재직했던 선배 선생님이 만나서 점심이나 하자는 전화였다. 언젠가도 한 차례 만나 맛있는 식사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전화가 걸려와 반가웠던 참이라 얼른 그러자고 약속했다. 전주 시내의 중국집에서 만난 선생님은 연륜이 더 들어 보일 뿐, 여전히 기품과 멋이 풍겼다. 어쩐 일로 또 점심 초대를 하시는지 물었더니, 전처럼 선생님의 96세 되신 어머니께서 내게 점심을 잘 대접하라고 하셨다며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라고 채근하셨다. 지난번에도 한 차례 같은 이유로 밥을 사주어서 맛있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다시 같은 이유로 점심을 사시겠다니 조금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는 내가 사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날 불효자로 만들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셔도 되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이번에도 전에처럼 당신의 어머님이 40년 넘게 쓰고 있는 틀니가 내 이처럼 편하고 좋다며 이를 해주신 내 아버지가 안

계시니 딸에게라도 고마운 마음을 대신 전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날 만나 점심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내 아버지 치과에서 40년 전에 틀니를 하셨는데, 지금까지도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쓰고 있어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다고 했다.

 내 아버지가 선생님의 어머니 틀니를 잘 만들어준 인연이 그 딸에게 전해지고, 그 딸이 다시 나와 인연의 끈이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만나 부모들 사이의 인연에 더하여 우리가 한 학교에서 근무했던 인연까지를 풀어내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불가(佛家)에서는 길을 가다가 옷깃을 스치는 일도 억겁(億劫)의 인연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1()은 약 43,200만년이라니 억겁이라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계산하기조차 어렵다. 물론 특정 종교에서 대중의 깨우침을 위해 설정한 가설일 터이지만, 인연의 중요함을 말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삶에서 우리는 어떤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가? 좋은 인연으로 이웃과 다른 이를 위하고 우리를 위해, 나를 희생하기도 하는 멋진 삶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기심에 가득하여 내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남의 희생과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삶도 있다. 굳이 선연(善緣)이 아니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악연은 맺지 않기를 바라며 산다.

 

 그날 점심을 사준 선배 선생님의 부모님은 올해 96세와 98세로 두 분 다 천수를 누리며 “밥을 잘 먹게 해 준 최 원장님 덕분”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고 했다. 물론 밥을 잘 잡수셔서 건강하시기도 하겠지만, 그분들은 작은 인연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늘 고맙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건강 장수를 누리신다는 생각이 든다.

 치열한 세상살이에서 내 가족을 지키느라 못할 짓 없이 다 저지르며 살다 보면, 늘 마음이 불편하고 그것들을 속으로 삭이다가 병이 되어 건강을 해치는 사람을 자주 본다. 마음에서 병을 얻으면 약도 드물다. 마음 병은 마음으로 치료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병이 깊어진다. 소중한 인연을 무겁게 생각하고 늘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이들, 그런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는 바른 세상이 되면 좋겠다.

 

 인연이라는 의미가 새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며 옷과 머리에 하얗게 내려앉은 벚꽃잎을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저 꽃잎들은 지는 순간까지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선사할 것이다.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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