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에 담긴 사랑

2019.05.15 03:06

변명옥 조회 수:2

밥 한 그릇에 담긴 사랑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변명옥

 

 

 

 어디선가 구수한 밥 냄새가 퍼지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두리번거리게 된다. 밥 냄새는 마음속에 깊이 숨어있던 그리운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식구 수대로 밥을 다 푸고 난 가마솥 가장자리를 주걱으로 툭툭 치면 둥글게 일어나던 가마솥의 누룽지는 배부르게 밥을 먹고 난 뒤에도 한 조각 떼어먹게 만들었다. 입에 넣으면 확 퍼지는 고소함과 바사삭 씹히는 식감은 상쾌할 정도로 좋았다. 먹을 것이 흔해진 요즘도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거나 사서 먹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부족한 쌀을 늘려먹기 위해 엄마는 매일 돌확에 보리를 갈아서 밥을 지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친 보리가 동글동글하고 색깔이 뽀얗게 될 때까지 돌확에 갈았다. 대여섯 살 먹었던 나는 엄마가 둥글게 생긴 돌멩이로 득득 원을 그리며 가는 모습을 실증내지 않고 지켜보았다. 걸쭉해지면 물을 조금 치고 또 갈았다. 여러 번 갈아 부드러워진 보리쌀을 가마솥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쌀을 얹어 불을 때서 밥을 지었다. 얼마나 돌확에 보리쌀을 갈았던지 돌확 홈이 다 닳아지면 다시 끌로 홈을 깊게 파서 보리를 갈았다. 할머니와 부모님 결혼 안한 작은 고모, 우리 4남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알뜰한 엄마는 보리쌀을 간 물도 그냥 버리지 않고 가라앉혀 보리개떡을 만들어 주셨다. 엷은 회색빛이 나고 특별한 맛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엄마와 아버지가 강원도로 장사하러 가시고 할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만 남았다. 얼마 뒤 동생도 데려가고 중학생이었던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가마솥에서 냄비밥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가마솥의 누룽지 맛도 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서 연탄불에 노란 양은냄비에 밥을 안쳐놓고 기다리셨다. 이제는 보리밥이 아니라 하얀 쌀밥을 먹게 되었다. 살림이 넉넉해져서가 아니라 두 식구 밥에 보리쌀을 섞어서 밥을 해 봐야 별로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반찬이 없다고 투정을 부리면 할머니는 깊이 묻어두었던 김장항아리를 새로 열어 김치를 꺼내 쭉쭉 찢어주셨다. 금방 연 항아리 김치의 싱싱하고 상큼한 맛이라니! 광고 카피대로 안 먹어 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잘 익은 김치 맛에 반해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곤 했다. 사춘기였던 나는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새 옷도 입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할머니한테 심통을 부리고 밥을 안 먹었다. 밥을 안 먹고 있으면 할머니는 두 번 세 번 밥상을 다시 차려오셨다. 미안해서라도 밥을 먹게 만드셨다. 한참 자라는 나이에 반찬 없는 밥이라도 굶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았다. 내가 할머니 나이가 되고 보니 할머니께 너무 죄송하다. 철없이 가끔 친구를 데리고 와서 할머니가 나하고 먹으려고 해 놓은 밥을 아무 생각 없이 다 먹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굶으셨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영순이라는 친구가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담임선생님이 나더러 가 보라고 하셨다. 나는 혼자 가기 싫어서 친한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대전시를 벗어나서 회덕쪽으로 물어물어 찾아가는데 상당히 멀었다. 처음 길이라 그런지 가다 쉬다 거의 2시간쯤 걸린 것 같다. 대문 앞에서 부르니 영순이가 수줍게 웃으며 나왔다. 영순이의 아버지는 625 때 전사하시고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멀리 오느라고 애썼다며 얼른 들어오라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먼 길을 온 우리에게 많이 미안해하셨다. 왜 학교 안 왔느냐고 물으니 그저 웃기만 했다. 할머니는 우리를 그냥 보낼 수 없었는지 이른 저녁밥을 짓기 시작하셨다. 얼마 뒤에 저녁상을 차려 오셨는데 지금도 그 밥상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밥상 위의 밥을 보니 노란좁쌀과 자잘한 붉은 고구마와 쌀이 조금 들어간 예쁜 색깔의 밥이었다. 반찬은 열무김치와 된장뿐이었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밥 중간 중간에 섞인 달콤한 고구마 맛도 좋았다. 영순이는 친구들에게 그런 밥을 보인 것이 부끄러운지 할머니에게 웅얼거렸다. 부끄럼 잘 타고 수줍음 많던 영순이와 더 친한 사이가 되고 그 뒤로는 학교에 잘 나오고 무사히 졸업했다. 한 그릇의 밥이 우리 사이를 돈독하게 맺어주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반찬이 없다고 점심을 싸 가지고 다니지 않았던 나는 가끔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선생님 댁에 들르면 사모님이 저녁밥을 먹고 가라고 붙잡으셨다. 사모님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 밥을 푸짐하게 담아주셔도 배가 고팠던 나는 고봉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 밥상을 생각하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 내가 음식을 복스럽게 먹는다며 두 분이 환하게 웃으셨다. 배부르게 잘 먹었던 밥 한 그릇의 추억이다.

 

  학교가 멀어 허기져서 집에 온 나에게 할머니는 금방 지은 밥과 반찬으로 맞아주셨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서 조금 있으면 이웃집에서 가져 온 맛있는 시루떡을 내 놓으셨다. “할머니, 밥 먹기 전에 주셔야지.” 하고 징징거리면 밥 안 먹을까봐 안 주었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간식을 먹으면 밥을 안 먹는다. 밥이 보약 중의 보약이라고 생각하신 할머니는 밥 먹기 전에는 절대 간식을 안 주셨다.

 

  고등학교 여름방학을 맞아 부모님이 계시던 강원도 묵호에 갔었다. 어머니는 시장에 가시고 아버지만 계셨다. 별로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가 어려웠는데 딸이 오랜만에 왔다고 복어를 손질하셨다. 복어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이나 방송에서 들었기 때문에 은근히 겁이 났다. “아버지, 복어 먹어도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뼈 사이사이를 칼로 두드려 맑은 물에 담가 놓으니 잔뼈 사이사이에서 가느다랗게 피가 흘러나왔다. “알하고 피만 잘 빼면 괜찮다.” 그날 별 양념 없이 대파를 듬뿍 넣고 끓인 복국이 기가 막히게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어른이 된 다음에 아무리 유명한 복국집에 가도 그 맛이 안 났다. 그 날 처음 아버지가 요리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딸에게 먹고 죽을 음식을 줄까봐 괜찮으냐고 물었던 것이 지금도 죄송하다.

 

   내 외손자 둘은 간식은 간식이고 밥은 밥이다. 고기를 잔뜩 먹고 난 뒤에 “밥은 언제 먹어요?” 하고 물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밥과 고기를 실컷 먹고 나서도 간식인 빵을 또 먹는다. 그렇게 먹으니 쑥쑥 자란다. 나는 손자들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어보아서 음식을 준비한다. 불고기, 돼지갈비, 갈치 등 좋아하는 음식을 굽고 지져서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 주고 싶다. 인터넷에서 요리 방법도 검색하고 정성을 다해서 밥상을 차리면 밥을 두 그릇씩 먹고 어떤 때는 세 그릇도 먹는다. 그렇게 먹는 모습만 봐도 흐뭇하고 행복하다. 예전에는 없어서 못해 먹었지만 지금은 식재료가 넘쳐난다. 덕분에 음식 가짓수도 많고 눈도 즐겁다.

 

  먹을 것이 귀하고 가난하던 시절에는 “식사 하셨어요?”라고 인사를 했었다. 얼마나 못 먹었으면 그랬을까? 하지만 한 그릇의 밥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고 사랑이었다. 지금도 부모님의 안부를 물을 때 “식사 잘 하시지요?” 라고 묻는다. 어쩌면 한 끼의 식사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건강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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