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원과

2019.05.16 14:09

김성은 조회 수:4

30만원과 260만원의 가치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어버이날을 맞아 안동 시댁에 다녀왔다. 가족들이 둘러 앉아 담소하며 찜닭도 먹고, 떡볶이도 먹었다. 유주는 오랜만에 만나는 큰엄마와 큰아빠께 윷놀이를 청했고, 고모가 사다 주신 간식에 가격표를 만들어 붙여서는 마트 놀이를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님이 되어 유주의 산수 실력을 살피셨다.

  친정 부모님 댁에는 올해로 94세가 되신 나의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익산에서 열흘 정도 머무시는 동안 나는 할머니 개인의 역사를 손녀딸이 아닌 글쓰는 사람으로서 정중히 인터뷰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할머니는 슬하에 91녀를 두셨다. 10대 때 시집 오셔서 6.25 동란 통에도 산고를 겪으시며 아빠를 낳으셨다. 친정 아버지는 셋째로 위에 형님이 두 분, 아래로 남동생 다섯과 고모가 한 분 계신다. 나는 유주를 낳을 때 12시간 진통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하라면 단박에 줄랭랑을 치고 싶은 마음인데, 할머니는 그 작은 체구로 무려 열 번이나 해산을 하신 거다.

 엄격하고 대쪽 같던 할머니가 억울하다고 하셨다. 왜 아니시겠는가? 생각해 보니 할머니 당신의 욕망이나 꿈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묵묵히 걸어오신 삶이었다. 친정 아버지와 KTX를 타고 내려오신 할머니께 세 끼 식사를 차려 드리는 일은 오롯이 며느리의 몫이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드시고 싶다는 메뉴를 열심히 조달했다. 덕분에 나도 시금치 죽을 처음 맛봤다. 할머니는 모처럼 며느리 손맛에 세 끼 식사를 즐겁게 하셨다. 주일에는 함께 예배당에도 나가셨다. 앞 못 보는 손녀딸이 믿을 데는 여기밖에 없지 않냐 하시면서 굳이 따라 나서는 걸음이 감사했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 걸음씩 천천히 움직이는 노고는 사랑이었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동생들이 친정 나들이를 왔다. 모처럼 온식구가 모였으니, 아이들은 신이 났다. 유주와 같은 또래인 조카들은 서로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자랑하며, 웃고 울고 싸우고 혼나고 화해했다. 변산 바닷가에 요트 체험을 나간 우리 가족은 생전 처음 타는 요트에 앉아 거친 바람을 맞았다. 동생이 나를, 제부가 조카를, 친정 엄마가 유주를 마킹하며 해변 산책도 했다. 새삼 친정 부모님께 나 말고 건강한 자녀들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시부모님을 자동차에 모시고 편안하게 팔도 어디든 누빌 수 있는 모범 아들이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면서 은근히 끓어 오르는 시샘과 심술을 삼킨 적이 있었다.

 친정 부모님께 때마다 흰 봉투에 넣은 현찰을 드렸어도 나는 아직 환갑 넘은 친정 엄마의 수고에 힘입어 먹고 산다. 내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음으로써 내 어머니가 챙겨야 할 식솔들은 더 불어났다. 며칠 전 동료 선생님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사적 모임을 갖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이었다. A는 나와 같이 시각장애가 있고, B는 비장애인이다. 소줏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어버이날 부모님께 얼마씩 드렸어?

  공교롭게도 두 동료 모두 부모님이 병환에 입원했다가 퇴원하신 참이었다. B가 말했다. “아버지 퇴원하시는데 30만원밖에 못드렸다. 와이프 휴직하고 나 혼자 버니까 힘들어. 그냥 병원에 자주 가서 살펴 드리는 것밖에 못해서 속상해 죽겠다.

 A가 맞받았다. “난 그냥 병원비만 냈는데, 진짜 마음이 안 좋더라. 장애가 있으니 문병을 가기도 그렇고, 어머니 힘드신데 곁에서 살뜰하게 챙겨 드리지도 못하고.

B가 물었다.

 “병원비 얼마 나왔어?

 260만원.

나와 B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잘했다. 진짜 잘 했어.

B가 덧붙였다.

 “난 30만원 밖에 못했는데, 당신이 나보다 낫다.

 A260만원을 지불하고도 속상해 했고, B는 누구보다 살뜰하게 병원을 드나들며 아버지를 간병했어도 아쉬움만 토로했다.

친정 부모님께 건강한 자녀가 있어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내 마음과 동료들의 한숨이 겹쳐졌다. 부모님 품을 떠나 장성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립한 성인들이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수혜자였다.

 유주가 색종이로 만들어 식탁에 장식해 둔 카네이션을 가만히 만져봤다. 내가 받은 고귀한 사랑을 내 딸 유주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서로에게 더 잘 해주지 못해서 애통해 하는 자식들의 마음들이 가정의 달 5월을 꽉 메워간다.

 

                                                                                 (2019.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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