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며

2019.05.31 09:07

변명옥 조회 수:5

꽃을 보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변명옥

 

 

 

 대문을 열면 빨간색과 진자주색이 섞인 빨강색, 흰색 철쭉이 환하게 웃으며 마중을 한다. 수천 개의 화려한 얼굴들이 빛나는 미소로 맞으니 같이 웃을 수밖에 없다. 그 웃음 덕에 내가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그래, 살아있는 동안에 많이 웃어야겠다. 많은 사랑을 주어야겠다. ‘너 참 예쁘다.’ ‘너 참 고맙다.’ 가만히 얼굴을 대 보고 웃는다.

 

 인생의 황금기라는 스물에서 마흔까지는 꽃을 보고 좋아할 여유가 없었다. 꽃이 언제 피었다가 지는지 그저 봄이면 피었다가 지는가 보다 했다. 꽃 피고 움이 트는 계절이 노곤하고 온몸이 나른해져 봄이 싫었다. 전기 스위치를 한꺼번에 올린 듯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벚꽃이 피어도 ‘조금 지나면 또 인도와 찻길에 버찌가 새카맣게 떨어져 길이 엉망이 되겠지’ 하고 지나쳤다.

 삶에 지쳤던 사십 대가 지나고 조금 여유가 느껴지는 쉰 살의 고개를 넘으니 일주일도 못 넘기고 눈처럼 날리는 벚꽃이 슬프고 애잔했다. 그 추운 겨울의 눈바람을 이기고 산과 들을 하얗게 덮어도 심술궂은 봄비는 하룻밤에 다 떨어뜨리고 꽃잎을 흩어 놓았다. 떨어진 꽃잎은 발길에 밟히고 자동차 바퀴 밑에서 날리고 짓이겨졌다. 곱게 핀 꽃가지를 잡고 마구 흔들어 떨어뜨리는 고약한 손길도 있었다. 꽃잎을 흔들어 떨어뜨리는 그 이기심도 사진에 찍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꽃밭을 가꾸셨다. 호미로 흙을 파고 씨를 뿌리고 풀을 뽑았다. 넓은 꽃밭은 실향민인 할머니 마음을 위로해 주는 작은 천국이었다. 할머니 손은 요술처럼 온갖 화초를 키워냈다. 계절에 따라 갖가지 꽃이 피었다가 졌다. 낮 동안 오므렸던 분꽃이 나팔처럼 생긴 진분홍 꽃잎을 살그머니 열기 시작하면 “저녁 할 때가 됐구나.” 하고 저녁 준비를 하셨다. 저녁 밥상을 치우고 할머니는 싱싱한 봉숭아꽃과 잎을 따고 백반과 아주까리 잎과 무명실을 준비해서 손녀딸 손톱에 물들일 꽃물을 준비하셨다. 너무 곱게 빻으면 물이 흐르니까 적당히 으깨지도록 빻으셨다. 하루 종일 노느라고 나른해진 손녀가 잠들기 전에 새끼손가락부터 작은 손톱 위에 백반을 넣어 찧은 꽃을 조그맣게 떼어 올려놓고 아주까리 잎으로 정성껏 싸고 실로 묶어주셨다. 험하게 자는 손녀가 몸부림을 쳐도 빠지지 않도록 굵은 무명실로 꽁꽁 싸매어주시곤 했다. 손녀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풀어보면 손마디의 살은 쪼글쪼글해지고 손톱 위에는 분홍 꽃물이 곱게 들었다. 살에는 꽃물이 조금 들고 손톱 위에만 들게 하는 것이 할머니의 기술이었다. 한 번만 꽃물을 들이면 며칠 지나면 분홍 물이 슬그머니 빠진다. 계속해서 세 번은 들여야 색도 곱고 겨울이 올 때까지 남았다. 나는 손톱이 천천히 자랐으면 하고 들여다보았다.

 

 봄이면 뒤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면 붉은 보석처럼 예쁜 앵두가 다닥다닥 열리는 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골목 끝에 살던 순이가 우리 집 앵두를 몽땅 훑어갔다. 어지간해서 표현을 않으셨던 할머니가 그 일이 있고 나서 앵두가 잘 열리지 않는다고 속상해하셨다. 소슬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방의 문짝을 다 떼어 마당 토방에 걸쳐 놓고 물을 뿌려 창호지를 떼어내고 창살을 뽀얗게 닦으셨다. 햇살에 바싹 마른 방문 틀에 풀칠을 하고 창호지를 붙이셨다. 문고리 옆에는 분홍 들국화 꽃 서너 송이 밑에 잎을 가지런히 놓고 그 위에 다시 창호지를 바르셨다. 그 꽃은 자연 건조되어 겨울 해가 깊숙이 비추면 들국화는 창호지 속에서 늦여름 그대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의 유년시절 색깔의 기억은 겨울 햇살 속의 고운 들국화의 빛깔에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작은 운동장가에는 봄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했다. 교사에서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바라보는 분홍 꽃잎은 찬송가의 구절이 아니라도 참 아름다워라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특히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엷은 분홍 꽃잎을 보며 저런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으면 얼마나 예쁠까 하고 상상을 해 보곤 했다. ‘아무리 색을 잘 만들어 내도 저런 색을 못 낼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가을이면 운동장 가에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었다. 친구들과 꽃밭 속에 엎드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연한 분홍과 흰 꽃잎의 부드러운 감촉처럼 풋풋하던 시절이었다.

 

 이야기할머니를 시작할 때 붉은색 꽃무늬 비단저고리에 회색치마를 맞춰 입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걸어오는데 옛 연초제조창 건물 앞에 분홍 진달래와 노란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한 장 찍어달라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꽃과 한복이 잘 어울려 멋진 사진이 되었다. 그 사진은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사진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고 있다.

 

 이야기할머니 책에 ‘꽃을 사랑한 선비 이덕무’라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에 욕심쟁이 김 부자가 금가락지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잃어버렸다. 조바심이 난 김 부자는 주머니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백 냥을 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거지아이가 주머니를 주워 와서 백 냥을 달라고 했다. 물건을 찾은 김 부자는 금가락지가 7개 있었는데 5개 밖에 없다고 오히려 아이를 도둑으로 몰았다. 김 부자가 관청에 가자고 아이의 멱살을 잡으니 아이는 울면서 정말 금가락지가 5개 밖에 없었다고 애원했다.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은 모두 김 부자 편을 들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이덕무가 이 일을 해결해보겠다고 하자 모두 찬성했다. 이덕무는 “두 사람 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 면서 아이에게 “이 주머니는 금가락지가 5개 밖에 들어있지 않다고 했으니 김 부자가 잃어버린 주머니가 아니다. 네가 가지고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면 주고 아니면 네가 가져라.” 하자 김 부자가 사색이 되면서 아이에게 백 냥을 주고 주머니를 가져갔다. 마을사람들이 김 부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꽃을 볼 때는 모양과 색깔만 보지 말고 향기까지 맡아야 꽃을 잘 보았다고 할 수 있다.”며 빙그레 웃었다. 이덕무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으로 누더기를 걸쳤지만 깨끗하고 고운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칭찬하던 내 말을 꽃송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 마당을 환하게 밝혔던 꽃들이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내년에 또 만나요.’하며 흩어져 내린다.

                                                      (2019.5.3.)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07 박경리문학공원을 찾아서 윤석순 2019.06.06 9
706 청와대 방문기 한일신 2019.06.05 3
705 쥐똥나무 꽃 백승훈 2019.06.04 5
704 나비 송병호 2019.06.03 6
703 우리 집 3대가 신흥고등학교 동문 정석곤 2019.06.03 9
702 새로운 시대 한성덕 2019.06.02 4
701 동유럽 7개국 여행기(6) 이종희 2019.06.02 4
700 봄날의 진객들 최상섭 2019.06.02 3
699 전쟁에서의 사실과 연출 강우택 2019.06.02 3
698 [김학 행복통장(75)] 김학 2019.06.01 5
697 중국 여행기(1) 최동민 2019.06.01 3
696 엄마 찾아 3만리 정남숙 2019.06.01 3
695 나를 슬프게 하는 일들 홍성조 2019.06.01 5
694 청와대를 관람하고 김길남 2019.05.31 6
» 꽃을 보며 변명옥 2019.05.31 5
692 제주도에서 한 달 살아보기(6) 최은우 2019.05.31 10
691 6월에는 나인구 2019.05.31 3
690 찢어진 날씨 최수연 2019.05.30 11
689 함박꽃나무 백승훈 2019.05.28 9
688 장미꽃 곽창선 2019.05.2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