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랄 때 눈을 뜬다

2019.06.15 07:01

한일신 조회 수:4

 모자랄 때 눈을 뜬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한일신

 

 

 

 

 

  비바람이 세차게 분다던 기상대예보와는 달리 오늘은 이슬비가 순하게 내렸다. 나는 다행이다 싶어 감사한 마음으로 작은 우산을 하나 챙겨 길을 나섰다.

 

  언제던가,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대둔산에 가려고 터미널에 갔더니 버스가 하루에 4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순간 갈까 말까, 갈등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한 번 나갔는데 그냥 들어올 수야 없지 않은가? 일단 출발했는데 가자마자 돌아올 시간을 보았더니 넉넉지 않아서 조금 있다가 그냥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관광버스로 가는데 무슨 걱정이겠는가?

 

  녹음이 짙어가는 6월 초, 차창 너머로 보이는 앞산은 안개가 자욱하여 흐릿해 보였다. 그런데도 버스는 아랑곳없이 꾸불꾸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대둔산관광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은 언제 리모델링을 했는지 건물도 내부도 아주 깨끗하고 깔끔했다. 호텔 4층에서 명찰을 찾아 가슴에 달고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수필문학의 참된 가치는 고뇌하는 영혼에 있다”라는 멋진 캐치프레이즈가 붙어있고, 무대 앞에는 ‘제1회 전북 수필가 대회’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우리를 반겼다.

 

  식장엔 승용차로 왔는지 많은 수필가들이 와 있었다. 순서에 따라 전북수필 제88호 출판기념회와 제32회 수필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그런 다음 김종완 교수님의 ‘삶과 표현—삶으로 수필하기’라는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문학의 변천사를 시작으로 미문이 아닌 명문을 쓰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굳이 미문을 쓰고 싶으면 감각적인 언어로 신기루 같은 아름다움의 허성虛城을 쌓을 게 아니라 상황을 만들어서 구조에서 아름다움이 배어 나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어려운 내용이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으니 어찌해야 할지….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한식뷔페로 했다. 뒤에 앉았더니 음식이 많아서 이것저것 갖다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우리는 원탁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평상시 못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강의가 끝나자 무대는 바뀌어 점차 ♬신나는 디스코메들리로 분위기가 익어가자 개인과 단체 장기자랑, 경품 추첨 등으로 흥을 돋우며 모두 한데 어우러져 화합의 한마당이 되었다. 이에 주최 측에서 마련한 푸짐한 상품도 서로 나눠 가지며 즐겁게 지내다가 각자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온돌방이 아니라 침대 방이었다. 사람은 세 명인데 침대가 2개뿐이었다. 해서 침대 하나는 왕언니가 쓰고, 다른 하나는 나와 또래 친구가 잤는데 생각처럼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뒤척이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서로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덮던 이불을 바닥으로 끌어 내려 요처럼 깔고 누웠더니 어찌나 편하던지 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추워서 몸이 자꾸만 움츠러드는 걸 어쩌겠는가? 덮을 것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 마침 침대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걸 만지작거리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쭉~ 잡아 빼서 덮었더니 훨씬 나았다.

 

  일찍 잠이 깼다. 춥기도 하지만 자리가 설어서 그런지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서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여기서는 잠이 안 온다고 혼자 일어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사람을 깨울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할 수 없이 꾹 참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면서 ‘힘든 시간이 지나면 훗날 남는 건 아름다운 추억일 거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며 아침을 맞았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하찮은 침대 시트 한 장이 우리한테는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르다가 가진 게 좀 모자랄 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희망으로 눈을 뜨게 한다는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201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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