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세 소녀

2019.08.11 06:53

한성덕 조회 수:7

83세 소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아내에게 엄마 같은 사모님이 계신다. 수필, ‘전복죽에 담긴 엄마의 사랑’을 통해서 독자들도 안다. 83세이신 사모님의 부군 목사님은 은퇴하신지 오래되었다. 이름만으로도 척 알 수 있는 기독교계의 어른이시다.

  목사님은, 개신교의 큰 교단에서 총회장까지 지내셨다. 인격이나 인품에서 풍기는 덕스러움은 훈훈한 정감을 더해준다.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됨을 존중히 여기신다. 인간관계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사람이 있어 괴로울 때가 있다. 목사님은 그 어떤 사람도 내치는 일이 없다. 사람들을 아우르고 세워서 나란히 함께 간다. 그분의 가슴은 험한 산이라도거친 바다라도, 모래먼지 자욱한 사막이라도 품을 수 있다. 설령, 악한 자라도 그분의 품에서는 순한 양으로 변한다. 교인이나 후배들의 어려움을 아는 한 모른 체하는 법이 없다. 부부는 닮아가며 일심동체라 하지 않던가? 이분들을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목사님의 고매한 성품을 사모님도 그대로 가지셨다. 두 분 모두 교인이나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다.  

  그 사모님을 모시고 매주 토요일이면 군산에 간다. 그곳에 가면 ‘찬양 힐링 콘서트’ 홀이 있어 마음껏 노래를 할 수 있다. 목사님은 8년째 그 일을 하고 있다. 오롯이 찬양이다. 그것도 자비량으로 한다.

  전주에서 군산까지는 승용차로 40분가량 걸린다. 오가는 길에 사모님은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내는 피곤해서 잠들 때가 있지만, 사모님은 그 연세에도 지칠 줄을 모른다. 작년 12월부터 군산을 모시고 다니는데, 단 한 번도 ‘오늘은 피곤해서 쉰다.’고 하신 적이 없다. 걷기에 약간 불편함이 있는 것 외에는 무쇠라도 녹일만한 단단한 체력을 가지셨다.

  어느 날이었다. 구사하시는 언어가 쉬우면서도 고급스럽다고 했더니,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신문과 수필을 많이 읽는다고 하셨다. ‘수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해서 ‘내 수필집을 드릴 거냐.’고 했더니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연세가 여든 셋인데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수필을 읽은 사모님은 울고 웃는 쇼를 다 했다며 일곱 살 소녀처럼 웃었다. 성격이 밝고 늘 긍정적이다. 수필집을 많이 읽었지만, 두 번을 읽고도 다시 읽으려는 것은 처음이라며 무척 좋아하셨다. 우리도 사모님이 좋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신다. 내 수필에 유독 관심 갖는 이유다. 수필을 왜 좋아하시느냐고 했더니, ‘소설은 길고 지루하다. 시는 무슨 뜻인지 애매하고 난해하다. 수필은 사실적인데다 짧고 간단해서 좋다’고 하셨다. 역시 책이 지식이다.

 

  그날도 군산에서 찬양사역을 마치고 오는 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J양을 좋아했다는 고백이 스스럼없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지라 아내보다 사모님이 더 놀랐다. 아내를 의식했는지 ‘그런 얘기를 해도 괜찮으냐?’며 의아해 하셨다. 이미 다 고백한 거라며 안심시키고 얘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3학년까지 줄곧 반장이었다. 내 곁에는 늘 부반장인 J가 있기를 원했다. 특히, 점심시간이면 J를 내 곁으로 불렀다. 여학생들이 절반 가까이 되지만, 깔끔하고 예쁘기로는 J가 으뜸이요, 1,2반을 합쳐도 따라올 미모가 없었다.

  4학년 초 나는 이웃학교로 전학했다. 자연스러운 이별이어서 잊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학생이 되었다. 잊어버리기는커녕 그리움이 차올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만날 궁리를 했으나 쉽지 않았다. 사춘기가 되면서, 좋아했던 그 마음이 사랑인 것을 알았다.

  이게 웬일인가? 기가 막힌 인연이었다. 생각했던 학교가 각각 있었을 텐데 똑같이 00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J를 보는 순간 기쁨은커녕 기절할 뻔했다. 나보다 큰 키에 곱슬머리, 여드름이 빠글빠글한 얼굴에 팔자걸음, 와락와락한 목소리의 남성다움은 옛적의 아름다운 J를 삼켜버렸다. 차라리 가슴에 묻어둘 걸, 앞으로 그런 실망은 절대 없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꿈꿔온 사랑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고등학교 초기에 나누었던 한두 마디가, 3년 내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사람의 심리는 묘하다. 좋은 이야기도 듣는 태도가 부실하거나 딴전을 피우면 하기 싫다. 또 여느 할머니들처럼 생기를 잃고, 감각이 무디며, 만사를 귀찮게 여긴다면 누가 얘기를 하겠는가? 허나 사모님은 내 얘기에 즉각 반응하시고, 얼마나 크게 웃으며 좋아하시는지 얘기를 더 하고 싶다. 그런 반응이 없다면 군산에 가실 것도, 노래하자고 모실 이유도 없다. 83세 할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십칠 세 소녀로 군산을 오간다.

  사모님은 여전히 예쁘고 생동감이 넘친다. 생기발랄한 모습은 영락없는 열일곱 살, 알프스에서 요들송을 부르며 막 내려온 소녀와도 같다. 풋사랑 이야기에 흠뻑 빠지고, 좋아서 더 하라는 모습이야말로 애교만점의 애인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전주와 군산을 잇는 산업도로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거기서 만이 볼 수 있는 83세 소녀의 멋과 여러 이야기에 신이 난다. 전주 군산 간 산업도로는 물자만이 아니라, 상큼한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삶의 터전이자 행복한 비단길이다. 자동차속 이야기에서 시름을 걷어내고, 하하호호 마음껏 웃으면서 에덴동산을 이룬다.

                                                 (2019.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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