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

2019.09.11 06:39

호성희 조회 수:5

근로계약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호성희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아니 간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남미여행을 가자고 늘 곁에서 챙겨주시던 B선생님께서 제안을 했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남미여행이라 흔쾌히 대답했는데 여행경비가 걱정이었다.

 내 연금으로는 몇 달 손가락 빨며 모아야 할 큰돈이었기에 어디 노인일자리라도 있나 알아보던 차 정읍교육지원청 관내 중학교 행정실에 행정 대체를 구한다고 하니 한 번 해 볼 거냐며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7월부터 12월까지 일하기로 근로 계약을 하고 인건비며 기타 학교회계에 관한 지출업무를 보기로 했다. 퇴직한 지 오래되어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나에게 언니 38년을 해온 일인데 금방 익숙해질 거라며 한 번 해보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71일부터 12월 말일까지 계약기간을 정해놓고 단서를 붙였다. 단 후임자가 발령이 나면 그 즉시 계약은 자동 해지되는 조건이었다. 나도 뉴스에서 들었던 비정규직으로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나를 불러 일을 부탁하는 곳이 있다니, 내심 뿌듯하고 아직은 살아 있다는 자부심에 기분이 괜찮았다. 당분간 바빠서 경로당에 못 나올 거라고 말했더니 부러워하면서 대단하다며 격려해 주셨다. 퇴직한 지 10여 년이 되어가니 일이 손에 익숙하지 않아 딸또래의 동료직원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젊은 여직원은 컴퓨터도 능숙하게 다루고 시원시원하게 잘 가르쳐 줬다. 덕분에 이제 막 익숙해지려는데 916일 자로 정규직이 발령 나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2개월 보름,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기쁨을 가져다준 기간이었다. 그 덕에 바라던 남미여행도 조금은 부담을 덜며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주 잠시였지만 비정규직으로 있으면서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갑과 을의 관계가 아래로 갈수록 생각의 차이가 많이 다르구나 싶었다. 내가 누군가를 조금 더 챙겨주고 배려해줄 수 있는 위치에서 베풀 수 있을 때 섬기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말과 행동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영글어 가는 들녘이 더욱더 풍요롭다. 풍년을 기원하며 들로 나갔던 농부의 마음과 정성이 헛되지 않기를 소원했다.

 

  며칠 있으면 추석명절이다. 뜨거운 여름을 견뎌낸 생명들이 고개를 숙이고 더욱더 낮춰진 모습으로 이 가을을 풍요롭게 한다. 허리가 휘도록 고생한 이들에게 보상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올 가을엔 모두가 만족해하고 삶의 풍경은 다르지만 바라는 마음은 다 같은 것 같다. 복을 빌고, 건강을 빌고, 하는 일도 잘 돼서 돈도 많이 벌고 부자 되는 것 모두가 같은 마음이려니 싶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아서 불편하고 속상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거꾸로 가는 추억의 나이 때문인 것처럼 어쩌면 나이를 모르는 추억이 있기에 아픈 상처도 보듬고 살고 있지 싶다. 며칠 전 태풍이 쓸고 간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도화지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맑고 푸르다.  

                                                       (2019.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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