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맑은 영혼이 깃든 '나의 서재'

2019.10.23 13:12

은종삼 조회 수:9

부모님의 맑은 영혼이 깃든 ‘나의 서재’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은종삼

 

 

 

  나는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에 앉아 있다. 아무리 근사한 카페나 휘황찬란한 연회장, 환상적인 바닷가 모텔일지라도 이 자리에 비할 바 아니다. 바로 포근한 어머니 품속 같은 나의 서재다. 나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 할아버지께서 쓰신 명필 혼서지와 명문장 사법문서, 아버지 어머니의 편지글들, 나의 백일‧돌사진, 할아버지 회갑사진, 어머니 보통학교 졸업사진. 아버지 학창시절 사진 앨범 등 실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맑은 영혼이 서재의 책들과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고인이 된 옛적 지인들로부터 현재 교유(交遊)하고 있는 문우들까지 그리고 사회 저명인사들의 사인(sign)이 있는 저서, 초중〮〮·〮고 교사시절 사용했던 거무죽죽 손 때 묻은 교과서, 한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유명 잡지, 30여 년 전 부잣집 거실 장식용이기도 했던 호화 칼라판 전 20권 《세계백과대사전》 등 천여 권의 서책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신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더욱이 세계를 누비며 소통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어 금상첨화다. 나의 서재는 나를 편안하게 지켜주는 안식처이다. 아니, 칼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고, 적의 포탄이 날아와도 끄떡없는 내 영혼의 벙커((bunker)이다.

 나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쓰던 방은 밥 먹고 놀고 공부하고 잠자는 다목적 공간이었다. 밥상이 책상이었고, 방바닥이 화판이었다. 책이라곤 겨우 교과서 정도였고 어쩌다 돌려보는 만화책 한두 권이 고작이었으니 책을 어디에 두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방안에 있으면 됐다.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지 같은 종이쪽도 귀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방 윗목에 1930년대 어머니의 혼수품 1호인 고풍스러운 장롱과 아버지의 책장이 집안의 품격을 유지시켜주었다. 아버지의 책장에는 소화 12(서기1937)에 발행된 일본어판 법률서적과 농업서적 그리고 국문학자 조윤제(趙潤濟)(1904~1976) 선생의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이 꽂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정읍군지(井邑郡誌) 명사인명록에 오른 사법서사(법무사)이셨다. 아버지는 정읍농림학교를 졸업하시고 정읍군청 서기가 되셨다. 자연히 책과 책장이 집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당시로는 엘리트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운(家運)이 다 되었던지 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께서는 환갑에 손자를 보았다며 그렇게 기뻐하셨다는데 손자의 재롱도 채 보지 못하고 이듬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는 서른셋 창창한 젊음을 결핵이란 악귀에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한창 아버지의 말벗이 되는 네 살 나던 해였다. 그때의 장롱과 책장, 책이 지금 고스란히 내 서재에 자리잡고 있다. 실로 80여 년 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집안의 보배다. 이제는 우리집안 것만이 아니고 결코 훼손 망실해서는 안 될 한 시대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조윤제 선생의 《조선시가사강》은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활자, 책의 모양, 제본 형태 등 서지학(書誌學;bibliography)적 측면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매우 가치 높은 책이라고 여겨진다. 참으로 귀중본이다.

 나는 스스로 감동한다. 가세가 기울고 너나 할 것 없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6.25 전쟁 보따리로 피난, 이사 등 그 숱한 시대적 역경을 이겨내고 이 서책과 책장이 살아남아 내 서재를 지켜주고 있다니, 이는 필연코 조상님의 영혼이 깃들어 있음에 틀림없다. 특히 홀몸으로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이를 지켜주신 어머니가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우리 집엔 날마다 늘어나는 게 책밖에 없다. 8절지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내 손으로 밤새워 쓴 학위 논문과, 고희를 넘겨 낸 저서도 있고, 간혹 불려나가 강의 했던 연수교재며, 여기저기 발표한 글이 실려 있는 동인지들이 나보란 듯이 꽂혀있다. 해마다 시집을 내어 서명 낙관까지 정성들여 우편물로 보내주시는 김계식 시인님의 시집이 책꽂이를 차곡차곡 채워가며 기를 북돋아 주고 있기도 하다. 문학기행이나 강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책 선물이다. 하루가 멀다하게 책이 손에 들어온다. 다 읽어 낼 수는 없을지라도 필요할 때 참고자료는 된다.

 

 나의 서재엔 나의 일생이 투영되어 있다.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내 이력서가 새겨진 것이다. 책과 기록물들을 보면 아,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스스로 나를 보는 것 같다. 어려운 1960년대 대학생 시절, 군것질을 참고 사두었던 책들을 보면 그래도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는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책이나 기록물들을 소중히 여긴다. 저자(필자)의 인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특별난 책과 갖가지 기록물들도 꽤 있다. 볼수록 재미난다. 30여 년 전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전주 모 유명 사립 고등학교 교지 창간호는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던 귀중본이 되었다. 친필 사인을 받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부부의  저서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와 99세 김형석 교수의 《행복 예습》도 있다. 고등학교 교사시절 국어교과서에 우리나라를 비하한 문장을 고치도록 신문에 기고했었는데 고치겠다고 답한 문교부장관의 공문서도 있다. 학교장 재임 중 받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있는 연하장도 소장되어 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의 책도 있다. 이 책을 보면 가수 노사연의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하는 노래가 떠오른다. 바로 《물처럼 사노라면》 이라는 수필집이다. 월간문학 출신 수필동인 대표 에세이다. 김학, 정목일, 지연희, 박동수 등 현재 한국 수필문학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비롯 20명의 작품 76편이 실려 있다. 이중 김학 수필가의 작품 <물처럼 사노라면>이 서명으로 뽑힌 것이다. 내가 35백 원짜리 거금을 투척 이 책을 구입할 당시에는 ‘김학’이라는 존함을 알 리가 없었다. 속표지에 ‘은종삼. 87.1.29 대한서림’이라고 구입한 날짜와 서점이 적혀있어 감회가 새롭다. 수필은 소설가, 화가, 작곡가처럼 특별한 재주를 지닌 인사만이 쓸 수 있는 글로 여기고 있었던 때였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주안골노인복지관의 수필지도 교수이자 나를 수필가의 길로 안내해주신 김학 수필가의 수필일 줄이야! 정말 내가 감히 수필가의 반열에 끼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전생의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만남은 소중하고 감사해야 한다.

 내가 과분한 서재를 가지게 된 것도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다 내가 지어온 ‘업()’인 것 같다. 1970년대 초반 햇병아리 교사시절 하숙방에 제일 먼저 들여놓은 것이 지금 놓여 있는 책꽂이다. 당시 헌가구점에서 저렴하게 샀는데 국회도서관용 물품표시가 붙어 있었다. 원목으로 만들어져 튼튼하고 한 쪽 벽을 차지할 정도로 널찍해서 좋다. 어느덧 50여 년 간 나의 서재를 지켜주고 있다. 결코 폐기시킬 수 없는 책꽂이다. 한쪽 벽은 원목판자를 벽돌로 괴어 천정까지 책꽂이로 만들었다.

 그런데 세상만사 다 그렇듯 락() 속에 반드시 고()가 있고, 고() 안에 ()도 있다. 지금까지 잘 간직해온 이 서재의 책과 기록물들, 부모님의 맑은 영혼이 깃들고 내 영혼을 지켜준 소중한 한 시대의 문화재,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개인 문화재를 어떻게 영구 보전(保全)할 것인가? 잠자리가 편치 않다. 박물관이나 유명 문인 문학관에 가 보면 내 서재 소장품이 떠오른다. 내 운명 다하면 이것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07 추억의 5일 시장 박제철 2019.10.31 1
1006 k를 만나는 행복 한성덕 2019.10.30 6
1005 활기찬 새만금 개발 이윤상 2019.10.30 7
1004 큰언니와 형부의 희수여행 최인혜 2019.10.30 22
1003 내 사랑 '해피' 최인혜 2019.10.29 2
1002 포천 구절초 백승훈 2019.10.29 5
1001 공감 토크 '결' 정아람 2019.10.28 14
1000 콩깍지 김세명 2019.10.28 5
999 가을 나들이 곽창선 2019.10.27 6
998 글감은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다 송준호 2019.10.25 9
997 호박꽃은 아름답다 김학철 2019.10.24 9
996 당신이 곁에 있어 행복합니다 임두환 2019.10.24 13
» 부모님의 맑은 영혼이 깃든 '나의 서재' 은종삼 2019.10.23 9
994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 소종숙 2019.10.22 19
993 메리골드 백승훈 2019.10.22 7
992 KBS전주 초대석 '공감토크 결' 정아람 2019.10.22 15
991 선생님과 어투 김성은 2019.10.20 10
990 얼굴 하광호 2019.10.20 7
989 책 표지 모음 양봉선 2019.10.20 901
988 하모니카를 배우면서 최동민 2019.10.20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