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토크 '결'

2019.10.28 23:14

정아람 조회 수:14

<공감토크 ‘결’>

녹화일시

2019. 10. 30 (수) 오후 3시 20분

공개홀

방송일시

2019. 11. 6 (수)

저녁 7:40-8:30

수필은 나의 행복, 나의 기쁨!

-김학 수필가

진행

김형철 ANN.

출연자

김학

타이틀

수필은 나의 행복, 나의 기쁨! (가제) - 김학 수필가

<오프닝>

김형철 요즘 방송을 보면 그야말로 여행 프로그램이 대셉니다. 보는 이들은 화면을 통해, 여행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요. 더불어 서점가에도 여행정보서와 여행기들이 넘쳐나며, ‘여행’ 콘텐츠가 그 어느 때보다 각광을 받고 있는데요. 지구촌 곳곳을 누비고, 여행 에피소드를 엮어 책으로 펴낸 분이 있습니다. 우리지역 수필문학계의 대부죠, ‘지구는 넓고, 가야할 곳은 많다’ 고 말하는, 김학 수필가와 오늘 함께 합니다. 어서오세요~ (인사)

1. 작가님은 호가 ‘三溪’입니다. 스스로 호를 지으신 거예요?

김학 그렇습니다. 내 고향은 박사고을로 널리 알려진 임실군 삼계입니다. 그래서 고향 이름을 따서 스스로 <삼계>라 호를 지은 것입니다. 내가 졸업한 삼계초등학교는 올해가 개교 100주년을 맞기도 했지요. 그래서 지난 10월 12일 삼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6백여 명의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 100주년기념 축제를 열기도 했습니다.

1. 작가님은 수필가 이전에 저에겐 하늘같은 선배님. 방송제작자로 KBS에 오랫동안 계시다가 퇴직하셨는데, 언제 입사하셨고, 퇴직하신 지 얼마나 되셨는지?

김학 (1969년 군산서해방송 프로듀서로 입사하여 1980년 방송통폐합으로 KBS로 옮겨 2001년 12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퇴직한 지 벌써 18년이 되었군요.

1-1. 1969년이면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예전과 지금, 방송 시스템이 참 많이 변했는데요. 오랜만에 방송제작현장에 다시 오시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김학 (-금암동시대에 정년퇴직을 했으니까 효자동 이 사옥에 오니 위압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집에서 TV를 시청하면 프로그램 수준이 높아졌더군요. 후배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1999년에 홍현진 피디는 카메라맨 김은재 씨와 함께 다큐멘터리 <그 오두막엔 여든네 살 청년이 산다>를 제작했지요. 무주 어느 산골짝에서 사시는 노부부를 취재한 내용인데, 그 작품이 그해 한국방송대상에 출품하여 상을 받았고, 2001년에는 세계적인 방송상인 미국 뉴욕에서 피버디상을 수상했지요. 그런데 그 상을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본 적이 없어서 방송이나 신문에 한 줄도 소개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전북대학교 신방과 김승수 교수에게 그 상이 어떤 상인지 사보에 내려고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했지요. 그 원고를 받아보니 대단한 상이었어요. 미국에는 세 가지 유명한 상이 있는데 배우들에게 주는 아카데미상, 신문기자들에게 주는 퓰리처상, 방송 제작자들에게 주는 피버디상이 그것입니다. 그 피버디상을 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고를 KBS본사로 보냈더니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지 뭡니까? 나중에 축하잔치를 하라고 예산이 내려와서 방송국 정원에서 큰 파티를 열기도 했었지요. 그때가 바로 윤대작 총국장시절이었습니다)

2. 혹시 저희 <공감토크 결> 보신 적 있으세요? 프로듀서의 입장으로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김학 (-자주 보지요. 소재를 잘 찾는구나 생각했고요, 아나운서가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진행해서 좋았습니다. 다만 사전에 보충취재를 해서 가급적 영상화면을 더 많이 소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지금은 프로듀서에서 수필가로 변신하여, 왕성하게 활동 중이십니다. 수필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하신 거예요?

김학 (-대학시절부터 썼지요. 대학교 1학년 때 전북대학신문에 <아웃사이더의 사랑 이야기>란 수필을 발표한 이래 꾸준히 수필을 썼습니다. 지금까지 수필집 16권과, 수필평론집 2권을 출간했습니다. 꽤 많이 썼지요?)

4. 무려 18권이나 저서를 내셨다니, 정말 많이 쓰셨네요. 그런데 최근에, 아주 특별한 여행기를 내셨더라고요. 어떤 책인가요?

김학 (-이 수필집은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기행문을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수필집이지요. 13개국을 돌아다니며 쓴 수필 62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중국 동북3성의 고구려 유적을 둘러보고 쓴 수필과 서유럽 4개국 여행기 그리고 미국 동부와 하와이 여행기가 빠져서 아쉽습니다. 그 여행기는 <마로니에샘가>란 사이트에 원고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마로니에샘가> 관리자가 갑자기 세상을 뜬 뒤 그 사이트가 예고도 없이 문을 닫아 버려서 원고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 아쉽죠.)

5. 우리지역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여행수필집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김학 (-제가 전주에서 50여 년 동안 문학 활동을 하면서 많은 수필집을 받아 보았는데 해외여행기만으로 된 수필집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6. 세계여행기를 쓰실 정도면, 그동안 여행갈 때마다 기록하고 글로 남기셨다는 건데요. 옛날부터 여행기를 써야겠다고 계획하신 건가요, 아니면 즉흥적으로 쓰게 되신 건가요?

김학 (-수필가는 수필을 쓰는 게 임무지 않아요? 더구나 귀한 외화를 쓰면서 해외여행을 다녀온 거니까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견문기를 남겨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썼지요.

이번에『지구촌 여행기』를 출간하고 나니까 독자들의 반응이 여느 수필집보다 더 뜨거웠습니다. 보람을 느꼈습니다)

7. 그럼 원래부터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셨어요?

김학 (-물론이지요. 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대학시절에 사학과를 다녔습니다. 사학과는 해마다 봄가을에 고적답사를 가곤 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여행에 취미가 붙게 된 것이지요. 국내 여행을 하고나면 자연히 외국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문학 활동을 하다 보니 한국문인협회와 PEN클럽에서도 해마다 해외문학심포지엄을 갖게 되어서 동행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해외여행을 자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8. 첫 해외여행지는 잊을 수 없잖아요? 저는 첫 해외여행을 OO으로 다녀왔는데, 작가님은 어디를 다녀오셨는지요?

김학 (-1989년 1월에 미국에 갔었지요. 뉴욕과 워싱턴DC 등 미국 동부 여행이었는데 그 때 하와이도 갔었지요. 좁은 한반도에서만 살다가 넓고 큰 나라 미국에 가니 모든 게 색다르게 보였어요. 뉴욕의 마천루도 올라가 보고, 자유의 여신상도 구경하면서 견문을 넓혔지요. 미국에 가니까 내 배는 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에서 나는 배가 나왔다고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 미국에 가니까 배 나온 사람들이 많아서 내 배는 배도 아니었습니다.)

9. 세계 곳곳을 다니다 보면, 가장 힘든 게 의사소통이잖아요? 작가님도 이 언어 문제 때문에, 조물주가 미워질 정도로 곤란을 겪으셨다고요?

김학 (-해외여행을 하면 언어문제가 골치지요. 음식이나 잠자리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 세상에는 6,500가 언어가 있는데 그 언어를 가록할 문자는 400개밖에 없다더군요. 유네스코가 이들 문자가 없는 언어를 어떤 문자로 표현하면 좋을지 연구했더니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이 뽑혔다더군요. 해외여행을 하면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힘들 때는 조물주가 이 세상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했으면 이런 불편이 없지 않을까 싶었지요. 하루 빨리 우리나라의 국력이 신장되어서 우리 한글이 세계의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10. 5대양 6대주 곳곳을 여행하셨으니, 여행 에피소드만 해도 정말 많으실 듯한데, 기억에 남는 일 있으세요?

김학 (1). 언젠가 일본여행을 갔을 때 틀니를 빼놓고 가서 식사 때마다 어려움을 겪었던 일이 있었지요.

(2). 또 2013년 12월 하순에 3주일 일정으로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작은아들 집에 갔었죠. 그런데 필라델피아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형주라는 친구가 보고 싶어서 비행기요금 119만원을 들여 5시간이나 걸려서 찾아갔지요.

그 친구는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소주와 맥주, 양주를 사놓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작은아들과 며느리가 술을 끊으라고 권하기에 그러마하고 약속을 한 뒤 그 친구를 찾아갔으니 술을 마실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우리는 엽차를 마시며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3). 또 동유럽에 갔을 때는 프로이트, 카프카, 헷세, 괴테 등 세계적인 대문호들의 유적을 살펴보고 놀랐어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들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문학관은 없고, 그가 살았던 조그만 아파트나 병원에 자료를 전시해 놓고 ‘프로이트박물관’, ‘헤르만 헷세 박물관’이라 이름을 붙여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어요. 계단이 좁다보니 관광객 한 팀이 가고나면 다른 팀이 올라가는 식이었어요. 얼마나 검소합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을고을마다 문학관을 크게 지어 운영하고 있으니 돈 먹는 하마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볼 일이려니 싶었습니다.)

(4). 동유럽 여행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독일 등 여러 나라를 둘러보는 문학기행인데 그곳에서는 관광버스 기사가 2시간 이상 운전을 못해요. 그러니까 두 시간마다 운전기사를 바꾸어 주어야 했지요. 그런데 나는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문학강연을 했어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5). 1989년 내가 전북문인협회 회장일 때 전북문협 금강산문학기행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민영미라는 관광객이 북한에 억류되고 금강산여행이 일시 중지된 적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다시 여행이 재개되어 전북문협 회원들도 가게 되었는데 45명이 신청했다가 7명이 취소하여 38명이 강원도 주문진항에서 봉래호를 타고 금강산에 갔었어요. 우리는 잠은 배에서 자고 낮에는 금강산 구경을 하곤 했었지요. 금강산에 갈 때는 현수막을 가져갈 수 없어요. 그런데 <전북문협 금강산 문학기행>이란 현수막을 펼쳐 놓고 금강산호텔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어요. 그때 북한감시자가 달려와서 현수막을 빼앗아 가고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어요. 그러나 재빨리 셔터를 누른 사람들이 있어서 사진을 남길 수 있었지만 그 때 사무국장이 잡혀가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때 몰래 찍었던 사진이 지금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6). 또 맛의 도시 개성에 갔을 때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통일관에서 13첩 놋그릇 반상기에 담은 개성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었지요. 그 통일관에서는 둥근상에 10명씩 앉을 수 있었는데 사람마다 자기 앞에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 삼각형으로 늘어놓고 먹었습니다. 언제쯤 그 음식을 다시 먹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7). 또 일본 오끼나와에 갔을 때는 한 호텔에서 사흘 밤을 묵었는데 저녁식사 때마다 그 호텔에서는 약간의 웃돈을 주면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한 리필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술꾼 친구들은 무척 행복해했었죠.

(8). 아프리카 세네갈에 갔을 때였습니다. 코레섬이라는 조그만 섬이 있었는데, 그 섬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가두었다가 미국이나 유럽에 노예로 팔던 섬인데 그곳에 흑인들을 가두었던 감옥이 있었어요. 그 감옥 벽에는 갇혔던 흑인들의 피 묻은 흔적이 남아 있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흑인들의 가족이 서로 어디로 팔려가는 지도 모른 채 헤어져야 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10-1. 금강산 여행에서는 아찔했던 경험도 있으셨다면서요?

김학 (-1989년 내가 전북문인협회 회장 때 금강산문학기행을 다녀왔었지요. 그때 금강산 관광객 중 민영미라는 여성이 무언가 말을 잘못하여 억류 되고, 금강산여행이 일시 중단된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다시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45명이 신청했다가 38명이 금강산에 갔었지요. 강원도 주문진에서 봉래호를 타고 갔는데, 잠은 배에서 자고 낮에는 금강산 구경을 하곤 했었지요. 금강산에 현수막을 가져갈 수 없었는데 금강산호텔 앞에서 그 현수막을 펼쳐놓고 문협회원 38명이 기념사진을 찍는데 북한 사람이 그 현수막을 빼앗아 가면서 사무국장을 데리고 가서 쉽게 풀어주지 않아 애를 태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몰래 찍었던 사진이 지금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지요.)

11. 금강산 말고 또 개성을 다녀오셨더라고요. 직접 눈으로 본 개성의 모습은 어땠나요?

김학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역사가 깊어서 가볼만 합니다. 개성음식 역시 아주 유명해요. 그 개성에서는 점심 한 끼밖에 먹을 수 없어서 아쉬웠어요. 통일관에서 놋그릇에 담아 내놓은 개성전통음식은 일미였습니다. 또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구경했는데 직접 보니 몹시 초라했어요. 고려박물관을 둘러보고, 쇼핑센터에서 문우들과 함께 대동강맥주를 마셨지요. 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선죽교에서 기념시진도 찍었지요. 기회가 온다면 개성은 또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12. 지금 남북관계가 예전보다 정말 많이 좋아졌잖아요. 조만간 북한여행이 가능할거라는 얘기도 들리고요. 작가님도 다시 한 번 꼭 가고 싶으시지요?

김학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승용차를 몰고 가서 북녘 명승고적을 순례하며 기행수필을 써서 한 권의 기행수필집을 더 엮고 싶습니다.

13. 그럼 북한 말고, 이곳은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하는 나라나 도시가 있다면요?

김학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은 캐나다죠. 럭키마운틴에 올라 설상차를 탈 때 뚱뚱한 여성 운전사가 우리에게 한국어로 “타봅시다.” 하며 운전석으로 올라갔어요. 눈밭에서 달리는 묵직한 그 설상차를 처음으로 타 보았습니다. 넓고 깨끗하게 잘 가꾸어진 캐나다는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14-1. 이렇게 우리지역 최초로, 세계여행기를 써서 출판까지 하셨는데요. 책을 준비하면서 원고관리를 잘해야겠다, 깨닫게 되셨다던데 어떤 이야긴가요?

김학 (-옛날엔 <마로니에샘가>란 사이트가 있어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죠. 그 사이트에 내 방도 있었고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의 개인방도 있었어요. 누구나 수필을 쓰면 당연히 그곳에 모아두곤 했었죠. 나도 역시 중국 동북삼성 고구려유적지를 둘러보고 쓴 기행수필과 서유럽 4개국 방문기, 미국 동부와 하와이 여행기들을 그곳에 모아두었는데 그 사이트 관리자인 아동문학가 김문기 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그 사이트가 문을 닫아버려서 원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시대라지만 어느 한 군데에만 원고를 저장해두면 <마로니에샘가>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으니 여러 곳에 저장해야 안전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14-2 일본도 여러 번 다녀오셨는데요.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한 항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다고요?

김학 (-일본 하코다테 항구는 일본이 서양에게 문을 연 3대 항구 중 하나로서 일본근대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서양식 근대화방식을 받아들였기에 ‘목적지향성(Goal orientation)’이었지요. 반면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지위지향성(Status orientation)’이었어요.

목적지향성이란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업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뜻하지요. 아무리 동경제국대학을 나왔더라도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아버지가 경영하던 우동집을 그대로 물려받으니, 일본은 모든 산업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과거를 거쳐 벼슬길로 나가려 했고, 벼슬길로 나가면 또 경쟁하여 승진을 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나라가 고르게 발전할 수 없었지요. 그 결과 세월이 흐르면서 국력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로 고

공감토크 결

15. 지금은 수필가, 문학인으로서 모습이 더 익숙하지만, 원래는 중고등학교 교사로, 또 방송국 프로듀서로 근무하셨습니다. 어떻게 교사에서 프로듀서로 변신하게 되신 거예요?

김학 (-군산서해방송이 1969년 10월 2일 방송국 개국을 앞두고 PD, 기자, 아나운서, 기술, 행정 등 방송요원을 공모했어요. 그때 나는 PD직에 응시했는데 운이 좋아서 내가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지요. 그래서 방송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1980년 12월에는 군사정부가 언론통폐합을 단행했어요. 신문사는 각 시‧도에 하나씩만 남겼고, 방송은 MBC와 KBS만 남기고 나머지 민간방송은 KBS에 통합시켜버렸어요. 그래서 서해방송도 KBS와 합쳐진 것이지요. CBS는 보도기능을 KBS에 합치게 되었구요. 그래서 나도 2001년 12월 KBS에서 정년퇴직을 했던 갓입니다.

나는 2001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과정을 개설하여 수필 강의를 하기 시작했지요. 수필 전도사가 된 것입니다. 처음엔 28명으로 시작했지만 수강생이 자꾸 늘어서 4개 반 110명으로 크게 불어났었지요. 2015년 2월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고 3월부터는 신아문예대학을 신설하여 지금도 그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또 2008년부터는 안골노인복지관에, 2011년에는 꽃밭정이노인복지관에서 수필 강의를 시작했는데 지난해부터 꽃밭정이노인복지관 강의는 전일환 교수에게 물려주었습니다.)

16. 그럼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프로듀서에 대한 꿈이 있으셨던 건가요?

김학 (-그렇지요. 제 고등학교 은사이자 내당숙인 김영곤 선생이 서울 배화여고 교사로 근무하실 때 KBS드라마 현상공모에 『안시성의 꽃송이』로 당선하셔서 그 뒤 드라마작가로 활동하셨어요. 강원도에서 소대장 생활을 하던 나는 집에 휴가를 오려면 서울 그 아저씨 댁에서 하룻밤 자고 와야 했어요. 그때 그 아저씨는 주로 MBC에서 세종대왕, 왕비열전 등 텔레비전과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고 계셨어요. 그러니 나도 자연스럽게 방송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래서 제대 후 방송국 PD가 되려고 공부를 했었습니다.)

17. 30여 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셨을 텐데요.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나, 방송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김학 (-나는 주로 라디오 프로그램만 제작했어요. 오전 8시 반에 방송했던 <패트롤 전북>과 오후 3시대에 방송했던 <오후의 교차로>가 떠오릅니다.

18. 작가님이 프로듀서로 계실 땐, 작가가 없이 PD가 글을 직접 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점들이, 나중에 문학 활동을 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김학 (-그렇습니다. 내가 프로듀서로 일할 때는 작가가 없고 피디가 직접 원고를 썼어요.

1972년 서해방송에서 <밤의 여로>란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날마다 200자 원고지 10장 정도의 수필을 직접 쓰고 감미로운 음악 3곡을 넣어서 15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했어요. 그런 프로그램을 2년 반 정도 맡았지요. 그 때가 나로서는 글쓰기 지옥훈련 기간이었습니다. 그런 뒤 전북의 문인들에게 원고를 청탁하여 방송을 했고, 나중에는 대전의 김영배 오완영 시인, 청주의 이재인 수필가, 대구의 정재호 시인 등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수필가의 길을 걷게 된 배경입니다.)

19. 수필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신 건, 1980년에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에 당선되면서부터인데요. 우리지역 수필가로서 최초로, 중앙문단에 등단하신 거라면서요?

김학 (-그렇습니다. 수필집을 출간하신 분들은 있었지만 수필가로 등단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최승범 시인, 허소라 시인, 이보영 평론가 등이 수필집을 출간했지만 수필가로 등단은 하지 않았어요. 내가 1980년 월간문학 8월호에서 <전화번호>란 수필로 중앙문단에 등단을 했지요. 그게 처음이었습니다. 그 뒤 후배들이 줄지어 등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20. 당시엔 전문서적도 없고, 교육기관도 다 중앙에 있었을 텐데 글 쓰는 법은 어떻게 배우신 거예요? 스스로 터득하신 건가요?

김학 (-선배들의 수필을 읽으면서 요령을 터득했어요. 최승범 교수가 전북대학교 국문과에서 처음으로 수필론을 강의하셨는데, 그『수필ABC』이론서를 출간하여 가르치셨죠. 그 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1. 요즘엔 일명 수필 전도사로 활동 중이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계시다면서요?

김학 (-2001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14년 동안 가르쳤고, 안골노인복지관과 꽃밭정이노인복지관에도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강의를 했는데 참 보람이 컸습니다. 그런 뒤 신아문예대학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강의를 시작할 때 수강생들로 하여금 칭찬거리를 찾아와서 발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필소재를 찾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연말이면 신문이나 방송이 올해의 10대 뉴스를 선정 발표하듯이 <우리 집 10대 뉴스>를 쓰도록 권장합니다. 그것은 가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또 신문의 신춘문예 응모를 적극 권합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전북일보와 전북도민일보가 신춘문예에 수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올해부터는 전라매일신문이 신춘문예를 신설했는데 수필을 포함하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5명의 수강생들, 전북일보(김재희), 전북도민일보(정원정, 정성려), 경남일보(이주리), 동양일보(이은재)가 당선하여 이름을 떨쳤지요. 이런 전통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22.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에게도 수필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어요. 어르신들이 잘 따라 하시나요?

김학 (-어르신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특히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에는 32명의 수강생 중 80대 어르신들이 여섯 분이나 되는데 그분들이 더 열심히 글을 쓰시기 때문에 70대와 60대 어르신들이 그 뒤를 잘 따라가고 있어요. 80대 후반이신 김길남 어르신은 2008년부터 수필공부를 시작하여 그 해에 등단을 하시고 벌써 8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셨어요. 또 70대 김현준 어르신은 7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셨습니다.

또 문하생들의 재미있는 수필집 출판기념식도 많아요. 신효선 수필가는 자신이 쓴 수필에 퇴직 교수인 남편이 찍은 사진을 섞어서 수필집을 출간하여 남편의 칠순잔치와 곁들여 출핀기념식을 가져 눈길을 끌었지요.

또 화가 정정애 선생은 서양화전시장에서 처녀시집과 처녀 수필집을 출간하여 팔순잔치를 열어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지난 10월 12일 정읍에서는 부부수필가 고안상 김창임 두 분이 각각 수필집을 출간하여 합동부부칠순잔치를 열어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23. 수필은 정해진 형식 없이 내 생각을 글로 쓰는 거잖아요? 참 쉬운 듯, 어려울 텐데요, 수필 잘 쓰는 법 좀 소개해주세요~

김학 (-좋은 수필을 쓰려면 참신한 소재를 찾아서 참신한 해석을 하고 참신한 표현으로 글을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필쓰기에 왕도는 없습니다. 좋은 수필을 많이 읽고, 수필을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구양수의 삼다설(三多說)을 따르면 될 것입니다. 수필도 쓰면 쓸수록 기량이 늘더군요.)

24. 이렇게 우리지역 문학계를 단단히 하고, 또 지역민들에게 수필을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하셨는데요. ‘전북수필문학회’ 창립도 빼놓을 수 없죠?

김학 (-전북수필문학회 창립은 서해방송의 밤의 여로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1977년 연말에 <밤의 여로> 필진들이 모여 망년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 전북에도 전북수필문학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래서 정덕룡, 정주환, 김동필, 김학 등이 전북수필문학회를 앞장서서 결성하게 되었지요. 지금은 그 전북수필문학회가 <전북수필> 88호까지 출간했습니다. 초대 정덕룡 회장 뒤를 이어 내가 전북수필 회장으로 있으면서 양상렬 변호사님의 도움으로 전북수필문학상을 제정했는데 1회 때부터 2명의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자랑스럽습니다. 지금은 우리 고장 전북에 수필문학단체가 9개나 있어요. 그래서 올해 전북수필문학회 윤철 회장이 수필가들의 뜻을 모아 지난 6월 7일 완주군 대둔산관광호텔에서 제1회 전북수필가대회를 마련해서 성황리에 1박2일 행사를 치렀지요. 앞으로 연례행사가 되리라 믿습니다.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행사여서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25. 우리지역에서는 수필 전문지가 꾸준히 발행되고 있잖아요? 우리지역의 수필환경이 비교적 좋다고 봐야 되겠죠?

김학 (-전주에서는 수필전문지 월간《수필과 비평》과《좋은 수필》이 전주 신아출판사에서 발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전북의 수필가들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1992년 9월에 창간호를 낸 《수필과 비평》은 다양한 기획특집과 아이디어로 다른 수필전문지를 압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 그 수필 전문지가 해마다 수필세미나를 열고 있으니 전북의 수필가들에게는 새로운 수필이론을 충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죠.

26. 네. 이제 내년이면 작가님이 수필가로서 등단하신 지 딱 40년이 됩니다 40주년을 앞두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신다면요?

김학 (-한국문인협회는 등단 40년이 되어야 원로 대접을 합니다. 나도 명실 공히 문단의 원로가 되는 셈이지요. 원로가 되면 모든 면에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야 하니 개인적으로는 더 힘들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열심히 수필과의 사랑에 빠져 살았습니다. 열심히 수필을 썼고, 열심히 문하생들을 길러냈습니다. 수필이 이렇게 나의 노후를 행복하게 해줄 줄 몰랐습니다. 수필이 있어서 행복한 40년이었습니다.)

27. 40년의 시간이 있기까지 작가님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인생의 필독서, 혹시 많은 도움을 준 인생의 필독서가 있을까요?

김학 (-나는 『이솝우화』를 소개하고 싶어요. 이 『이솝우화』에는 인생의 진리가 들어 있어요. 한 편을 읽고 책을 덮어도 좋고 10편을 읽고 덮어도 상관이 없어요. 아니 『이솝우화』는 열 번, 백 번을 읽어도 물리지 않아요. 수필가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28. 40주년을 맞아 어떤 작품이 나올지도 기대가 됩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세요?

김학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수필 강의를 계속하여 후진을 양성할 생각이고, 나 스스로도 열심히 수필창작에 힘쓸 생각입니다. 내가 열심히 수필을 쓰면서 ‘나를 따르라’고 해야 후배들이 따라올 게 아닙니까? 내년이면 등단 40년입니다. 그러니 내년에는 수필선집을 한 권 내고 싶고, 세 번째 수필평론집도 한 권 출간하고 싶습니다.)

29. 마지막으로 이 질문 드리면서 마무리 하고 싶네요. ‘작가님에게 수필이란?’ 무엇인지?

김학(-수필은 아내와 함께 나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동반자입니다. 수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겠습니까? 수필은 앞으로도 끊임없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리라 믿습니다. 수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를 열면 제자들이 첨삭 지도해 달라고 보낸 수필들이 나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한 편 한 편 열심히 읽고 첨삭하여 제자들에게 되돌려줍니다. 그런 일에서 보람과 긍지를 느낍니다. 올해에는 어떤 제자들이 수필집을 출간할지 기다려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지금까지 문하생들이 펴낸 수필집이 무려 200권 가까이 됩니다. 우리 고장 전북이 한국수필의 메카로 발돋움하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김형철 네, 작가님의 등단 40주년, 미리 축하드리겠고요, 앞으로 건강도 잘 챙기시길 바랄 게요.~ 오늘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

<클로징>

김형철 수필을 흔히 ‘삶의 문학’ 이라고 하죠. 오늘은 40년 가까이, 삶의 문학을 행복하게 써내려가고 있는, 김학 수필가와 함께 했는데요. 여러분들도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 또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공감토크 결,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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