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이 가을에

2019.11.08 11:43

김학 조회 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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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이 가을에

  김 학

 
황금햇살이 연인의 눈길마냥 따사로운 가을이다. 청잣빛 하늘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높아 보이고, 허수아비마저 떠나버린 들녘이 신방(新房)의 금침(衾沈)만큼이나 포근해 뵈는 가을이다.

보기만 하여도 입맛이 돋고, 먹지 않아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가을이다. 봄, 여름, 겨울이 이 가을처럼 마냥 풍성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상강도 지나버린 가을의 끝자락. 여름 내내 밤낮으로 노래만 부르던 베짱이는 지금쯤 어느 개미집 문전을 기웃거리며 회한의 구걸을 하고 있을까.

귀뚜라미의 청아한 선율이 달빛 머금은 영창을 흔들어대더니 간밤에 무서리가 잔뜩 내렸다. 잎새를 떨궈버린 감나무에서는 부끄럼 타는 열아홉 큰 애기의 볼처럼 빨갛게 물든 감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농사도 풍년이요, 과일도 주렁주렁 열렸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맞이한 풍요로움이다. 구르몽의 시구(詩句)가 혀끝에 맴도는 찬란한 가을이다.

남원에는 이상하리만치 감나무와 모과나무가 많다. 고샅길을 걷노라면 집집마다 쭉쭉 뻗은 감나무와 모과나무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갓난아이 주먹같이 앙증맞게 포동포동 살찐 감이며, 헤비급 권투선수의 주먹 같이 암팡진 노란 모과가 탐스럽다. 열매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몸살을 앓는 나뭇가지가 측은하다. 이 풍요의 가을을 위해 농부들은 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던가.

옛날 내 직장의 오백 평 남짓한 뜰은 식물원을 방불케 했었다. 딸기, 토마토, 고추, 마늘, 상치, 무, 배추, 호박 같은 작물들이 꽃으로, 잎사귀로, 열매로, 뿌리로, 줄기로, 계절의 변화를 일깨워 주었다. 포도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추자나무, 은행나무, 매화나무, 모과나무가 철따라 우리의 입맛을 다독여 주기도 했다.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던 키다리 오동나무,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던 등나무,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아름드리 종가시나무, 미끈한 자태를 뽐내는 향나무, 독일 가문비, 히말라야시다, 가을이면 붉은 웃음을 토해내는 단풍나무, 봄이면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받쳐 입은 신부를 연상케 하는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 청상의 한이 서린 듯한 백목련, 핏빛 미소를 머금던 장미, 솔거가 즐겨 화제로 여기던 소나무, 어느 것 하난들 나의 눈길을 끌지 않은 게 없었다. 그들에게도 가을은 왔다.

햇빛이 그리우면 나는 때때로 뜨락을 거닌다. 뜨락에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낙엽들이 뒹군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은행나무의 모습이 팔등신 미인의 맵시마냥 날렵하다. 여린 바람결에 노란 은행잎이 하나둘 떨어져 내린다. 허리를 굽혀 은행잎 하나를 줍는다. 금방 손끝이 노랗게 물 들 것 같은 기분이다. 노란 은행잎 하나를 보내주면서 그것을 볼 때마다 자기를 기억해 달라던 해맑은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골골의 은행잎을 사들여 수출하던 친구의 얼굴도 어른거린다.

모과나무 곁으로 발길을 옮긴다. 향내가 스멀스멀 콧속으로 스며든다. 그 누가 과일 전 망신을 모과가 시킨다고 했을까. 모과들이 벙글벙글 웃는 것만 같다. 하나, 둘, 셋, 넷……. 너무나 많이 열린 탓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

한 그루의 나무에 매달려 있는 저 열매들도 머지않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리라. 어떤 놈은 신혼부부의 침실로 가서 사랑의 파수병 노릇을 할 것이고, 또 어떤 녀석은 노학자의 서재(書齋)로 가서 피곤한 심신을 어루만져 주리라.

모과차로 빚어진 향긋한 미각으로 대화의 실꾸리를 풀어주는 놈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녀석은 모과주로 담가져 도도한 취흥을 일구어 주기도 하리라.

인간에게처럼 모과에게도 저마다 가야 할 운명의 길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형제간에도 아롱이다롱이가 있고, 같은 학교 출신에게도 천차만별의 인생역정이 펼쳐지지 않던가.

우수수 낙엽이 진다. 널따란 잔디밭에선 시방 가을이 축제를 벌이고 있다. 빗자루 끝이 다 닳도록 쓸고 쓸어도 떨어지는 낙엽을 당해낼 수 없다며 진씨 아저씨는 맺힌 땀방울을 훔친다. 뿌리로 되돌아가려는 낙엽의 집념이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해 본다. 어느덧 나도 인생의 가을에 들어서 있다. 으스스 찬바람이 가슴을 파고든다. 나는 무엇 하나 거둬들일 것이 없다. 가난한 가을을 맞은 것이다. 나는 어리석은 베짱이처럼 젊음을 낭비해 버린 회한에 젖는다. 이러한 빈손으로 어떻게 인생의 긴 겨울을 날 것인가. 서녘의 교룡산(蛟龍山)이 기우는 해를 보듬고 정염(精炎)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욱 더 높아 보인다. 풍요롭고 찬란한 가을은 봄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을……. 때늦은 후회가 활화산처럼 내 안에서 폭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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