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2019.12.06 11:54

이형숙 조회 수:8

감자

                        신아문예대학 수팔창작 목요야간반 이연 이형숙   

 

 

                            

  초록으로 온 세상이 일렁거리는 유월, 화려하게 펼치던 벚꽃잔치는 꽃비를 내리던 날 무대에서 사라지고, 연두색 봄은 꿈인 듯 발끝을 세우고 지나갔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가슴을 적시는 달이다. 그 저릿한 슬픔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이념으로 갈라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온 엄마의 회한이 서려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기억은 바라지 않아서 가깝고 진하게 느껴져 스치기만 해도 돌아보곤 한다. 세상 어머니들의 삶이 소설이나 영화에 비유되곤 하지만 나는 지난했던 엄마의 삶을 슬픈 전설이라 생각한다. 그 전설들은 어릴 적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당신들이 겪었던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기에 오래된 전설보다 더 또렷하게 가슴에 남아있다.

  귓가에 남아있는 유월의 전설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리움을 앞세우고 되살아난다. 긴 행렬을 따라 피난민 무리에 떠밀려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서의 삶은 거처할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막막한 삶이었다. 낯선 하늘 아래 내일을 알 수 없는 허기진 날들은 끼니를 거르는 때가 먹는 날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너나없이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이었다. 새끼들에게 먹잇감을 날라야 하는 어미새의 절박함으로 지탱하는 하루하루는 생존의 두려움과 마주한 나날이었으리라.

  “총소리보다 더 무서운 게 새끼들 굶기는 것이었지.

 생이 다하던 날까지 자꾸만 도지던 상처였다. 어쩌면 엄마의 가슴 깊은 곳 어디쯤에서 그 기억은 세월 따라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존의 본능으로 아귀다툼만이 존재하던 살벌한 틈바구니에서 어쩌다 구한 감자 한 소쿠리가 있었다. 솥단지를 걸고 생솔가지를 끊어다 불을 피웠다. 불꽃은 일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잦아들었고 꺼져가는 불씨를 모아 겨우 살려내곤 하면서 펑펑 울고 말았다고 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야속해 울고 새끼들의 허기진 눈빛이 안쓰러워 울고 젖은 연기가 매워 울고 왜 총을 겨누고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이 원망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날의 눈물을 기억하는 엄마는 훗날 추억이라 했지만 우리는 슬픈 전설이라 말한다.

  엄마는 살아생전에 감자 사랑이 유난했다. 창고 한쪽 구석에는 언제나 감자가 바닥에 죽 널려 신문지를 덮고 있었다. 하지 무렵 시장 가는 길에 감자를 보면 반갑고 사랑스러워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조금씩 사 모은 감자를 가을이 다 가도록 밥에 얹어 드시곤 했다.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느려지던 노후에는 비 내리는 날이면 감자를 삶아 노인정으로 들고 나가시곤 했다. 전쟁의 회오리 속을 살아낸 사람들끼리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다독거리며 나누어 드셨으리라.

  반 고흐의 그림 중에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일을 마친 가난한 소작인들의 일상을 담은 그림이 걸작 중의 하나라고 한다. 창고에 모여 앉아 감자를 먹는 그림은 희미한 조명 아래 지친 농부의 모습이 어두운 바탕색 위에 그려져 있다. 고흐는 ‘내 그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예수의 삶을 흠모하던 그가 지독하게 가난했던 자신과 외롭고 힘든 이들에게 감자 몇 알로 위로를 선물하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의 허기진 지난날들이 떠올라 편안하게 즐길 수 없는 그림 한 장이다.

 

  갓 캔 감자를 삶을 때 코끝에 남는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척박한 곳에서 바람과 햇볕과 달빛을 보듬은 흙냄새다. 목 타는 가뭄에도 물을 탐하지 않고 뿌리를 키우며 그 강한 생명력으로 흔들림 없이 살아남는다. 오래된 옛날부터 안데스산맥의 잉카인들의 식량이었던 감자는 비탈진 산기슭 돌밭에서 자라는 구황작물이었다. 그들이 땀으로 일구어낸 땅에서 자란 감자가 전 세계로 보내져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기근이 들 때마다 부족함 없이 그 가치를 드러내곤 했다.

  달고 고소한 맛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손이 가지 않는 간식거리에 불과하지만 나는 밥 대신 감자 먹는 것을 좋아한다. 포슬포슬하고 촉촉한 그 맛을 알 리 없는 이들은 그 맛이 밍밍하다고 한다. 뜨거울 때 껍질을 벗겨가며 소금에 찍어 먹는 맛은 차분하고 담백한 맛이다. 입맛 없는 여름 밥솥에 얹어 쪄낸 감자는 밥 한 그릇보다 더 배부른 그야말로 내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구황식품이다.

  회색 구름이 비를 머금고 낮은 산자락에 내려앉아 숨을 고른다. 장맛비답지 않게 리듬을 타고 비가 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그리움을 흔들어 놓는다. 잊혀 진 줄 알았던 기억들이 와락 가슴에 달려드는 날이다. 여울져 흐르는 빗물에 그리운 엄마의 얼굴을 그려본다.

  작디작은 풀꽃도 풍성한 가을을 기다리는 열매도 뜨거운 태양을 품고 여름을 달린다. 그곳은 지금 어떤 계절인지, 그곳에서도 감자를 드시는지 여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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