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목욕탕에서 생긴 일

2020.01.11 07:22

정석곤 조회 수:57

대중목욕탕에서 생긴 일

은빛수필문학회 정석곤

 

 

 

  대중목욕탕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똑 같아져서 좋다. 빈부와 지위 그리고 재능 등 차이가 없고, 마음에 다툼과 경쟁이 없어 잠시나마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입구 계산대에서 열쇠를 받으면 고유번호에 따라 신장에 신발을 넣고 사물함에 모자, 안경, 겉옷과 속옷을 벗어 차근차근 넣는다. 귀중품은 한 번 더 확인하고 자물쇠를 잠근다. 모두가 실오라기 하나 몸에 걸치지 않고 손목이나 발목에 열쇠를 차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탕 안으로 모인다.

 

  온탕과 냉탕과 사우나 실을 드나들며 서로 알몸을 슬금슬금 쳐다본다. 키가 크다 작다, 몸이 뚱뚱하다 허약하다, 근육이 탄탄하다 약하다, 머리숱이 많다 듬성듬성하다 등 머리는 바쁘게 움직인다. 아마 대중목욕탕에 자주 드나드는 것도 치매예방법 한 가지가 될 성싶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동네목욕탕에 가면 등을 서로 밀어준 게 예삿일이었다. 조손, 부자, 형제, 지인뿐 아니라 처음 만나도 서로 등을 바꾸어 밀어준 게 목욕탕 문화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상대방의 등을 문질러 준 건 쌀밥에 뉘 하나 발견한 것 같다. 짧은 세월 동안 그 문화는 꼬리를 감추려한다. 목욕 수건에 비누를 칠해 혼자 등을 문지르는 둥 마는 둥 하고 샤워기로 물을 뿌리면 그만이다. 온 몸을 구석구석 문지르고 싶은 이는 목욕관리사에게 맡긴다. 서로 등을 문질러주는 목욕탕 문화는 현대 이기주의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주군 상관면 공기(孔氣) 마을 숲내음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식사는 우유에 시리얼 과자를 넣어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물이 괸 곳에 얼음이 언 길을 찬 공기를 쐬며 편백숲 앞까지 갔다가 오솔길 입구에서 되돌아 백세 길로 내려왔다. 겨울아침이라 피톤치드 냄새를 못 맡아 서운했다. 곧바로 상관리조트 대중목욕탕에 갔다. 지장온천수와 유황온천수가 피부질환과 피부미용에 탁월하다고 소문이 난데다 세밑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온탕마다 가득했다.       

 

  날마다 집에서 목욕을 하기 때문에 목욕탕에서는 온수로 샤워를 한 다음, 내 나름의 ‘냉온 목욕법’에 의해 목욕을 한다. 마지막 탕에서 나올 때는 온몸에 비누칠을 해 수건으로 문지른다. 오늘도 낮은 샤워기 앞에 앉아 비누칠을 하고 수건을 양손으로 잡고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큰 일이 벌어졌다. 낯선 분이 내 등을 밀어주시겠다는 게다. 몇 번 거절했지만 오른손에 때밀이 수건을 끼고 비누를 칠해서 내 등과 손이 안 닿은 부분을 문질러 주시는 게 아닌가? 때가 조금씩 나온다며 정성을 다하셨다. 나보다 높은 연배시라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제가 등을 밀어드려야 한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했다. 곁에 있는 다른 두 분도 등을 밀어들이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어느 분인가도 밀어드렸을 것이다. 아마 목욕탕에 오실 때마다 그런 선행을 베푸실 것 같았다. 요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더군다나 연로하신 분이신데…. 그 작은 섬김의 봉사가 내 맘을 감동시켰다. 나도 같이 잠을 잤던 초등학생 등을 밀어주었다. 또 멀리 있는 고등학생인 큰손자 슬우를 불러 등을 밀어주었다. 내가 낮아짐을 느꼈다. 내 작은 봉사가 이루어진 게다. 이다음, 목욕탕에 올 땐 누구든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등을 밀어주고, 내 등도 밀어 달라고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두세 해나 지났을까? 집 가까이 주차해 놓은 내 승용차에 미등이 켜졌다는 어느 아가씨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나도 두 번이나 다른 이가 주차해놓은 승용차 미등이 켜짐을 보고 전화를 해주어 고맙다는 찬사를 받았다. 지금도 그 아가씨의 목소리는 내 맘에 살아있다. 이제 얼굴도 이름도 모른 그 어르신의 작은 손길도 내 맘에 오래 남아 있길 바란다. 옛 목욕탕의 아름다운 문화가 다시 꽃 피었으면 좋겠다.

                                                                                  (2019. 12. 28.)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47 취학통지서 이진숙 2020.01.15 32
1146 작은 일 하나라도 김학 2020.01.14 3
1145 장수매 백승훈 2020.01.14 13
1144 KBS앵커와 볼펜 한성덕 2020.01.14 4
1143 [김학 행복통장(80)] 김학 2020.01.13 54
1142 잘 걸으면 운명이 바뀐다 김경록 2020.01.13 31
1141 눈 눈 눈 김학 2020.01.12 22
1140 마음씨 고운 며느릿감들 구연식 2020.01.11 58
1139 데이트합시다 박용덕 2020.01.11 43
» 대중목욕탕에서 생긴 일 정석곤 2020.01.11 57
1137 들꽃에 담은 사랑 한성덕 2020.01.10 65
1136 이안에게 최윤 2020.01.09 45
1135 나무난로 앞에서 윤근택 2020.01.08 74
1134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두루미 2020.01.08 44
1133 언어의 품격 한성덕 2020.01.08 55
1132 개쑥갓 백승훈 2020.01.07 52
1131 내 고향 부안 신효선 2020.01.06 33
1130 때늦은 후회 김학 2020.01.06 55
1129 전라감영 복원 조석창 2020.01.06 49
1128 친구의 기도/한성덕 한성덕 2020.01.0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