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에서 온 편지

2020.01.25 12:48

김성은 조회 수:13

괌에서 온 편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내 여권에 세 번째 도장을 찍었어. 이곳은 괌이란다. 미국령이고 스페인 사람들에게 지배 받은 역사가 있으며, 차모로 원주민들이 사는 곳, 괌은 지금이 겨울이라는데도 우리 나라 여름 기온이구나. 무안공항에 겨울옷을 모두 남겨 두고 가벼운 반팔 차림으로 괌에 닿았어. 한 학기 넘도록 전화 영어회화 공부를 열심히 했건만 외국인들과 대화를 하려니 가슴만 두근두근, 혀가 굳어 버리지 뭐니?

 입국 심사를 받는데 우리 부부보고 허니문이냐고 묻더라. 웃으면서 아니라고 대답했어. 생각해 보니 결혼한 지 12년차가 되더라구. 거의 부부들은 허니문이라서 물어봤다는 짧은 대화를 나누었어. 비행기에서부터 가족 단위 여행객들로 붐볐거든. 마음으로만 안고 온 유주가 또 아프게 꿈틀거렸어. 초행인 데다가 남편이 나와 아이를 함께 인솔하기가 만만치 않아 이번에는 답사 겸 우리 부부만 나온 참이었어.

 사방이 에메랄드빛 바다고 해수면 아래가 훤히 다 보인다고 했어. 남편이 환호하며 주변 풍광을 설명해 줬지만 솔직히 실감이 나지는 않더라. 내 피부로 감촉할 수 있는 바람이 괌산이라는 사실에 집중했어. 그곳의 냄새와 소리를 더 많이 감각하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워봤지. 놀라운 것은 온통 한국말이 들려왔다는거야. 어디를 가나 한국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어. 스페인 광장, 솔레다드 요새 등지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이 하나같이 우리말이더라구. 마이크로네시아몰과 T겔러리아 등 쇼핑몰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진짜 우리 동네 대형마트인줄 알았다니까. Tarjar 원터파크는 또 어떻구? 이 곳에도 한국인 가족들이 넘쳐났는데, 그나마 여기서는 일본어가 종종 들려왔어어린 아이들이 일어로, 영어로 말하는 소리들이 얼마나 귀엽던지!

 왜 우리나라 꼬마들도 전라도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엄청 깜찍하쟎아? 엄마 아빠들이 아이를 챙기고 놀아주는 모습은 국적불문 다 똑같은 것 같더라답사라고는 했지만 내 마음엔 유주를 데리고 오지 못한 미안함이 내내 무겁게 얹혀 있었어. 게다가 음식까지 내 입에 맞지 않는거야. 세상에서 난 그렇게 짠 두부와 셀러드를 처음 먹어봤단다.

 괌은 기온이 높은 곳이다 보니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염장은 필수인 것 같더라구. 버거와 피자, 스테이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내 식성이지만, 소금이라는 복병 앞에 내 혀는 무참하게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어. 베트남에서 고생했던 남편이 자기는 선진국 체질이라면서 호기롭게 음식을 먹었지. 에메랄드빛 바다에 감탄하고, 거대한 쇼핑몰에 취해서 남편은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어. 남편의 그런 모습이 실로 오랜만이더라구. 일상에 찌들어 서로에게 사나운 감정 끝을 조준하며 전쟁같이 살았기에.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이완시켜 주는 마법인가 싶었어. 이색적인 시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해방감이 꽤나 달콤했으니까. 결국 나는 애써 나간 미국 땅에서 우리 컵라면으로 연명해야 했어. ABC마트에서 햇반과 라면을 샀고 종갓집 김치도 한 단지 샀지. 그마저도 사정없이 짜더라.

 

 그래도 흰 밥을 먹으니까 속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어. 돌아오는 비행기는 가히 어린이집 통학 차량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지. 누구도 자유롭게 웃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을 탓하지 않았어. 참 신기하지? 유주를 낳기 전에는 어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질색했었쟎니? 다른 사람 사정 같은 건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꽤나 냉소적으로 스스로를 괴롭혔었지. 그런데 유주를 키우면서 내 마음이 한 뼘쯤 넓어지고 1도쯤 따뜻해졌다는 생각을 했어.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 고충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어린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고 울고 말하는 소리 속에 유주가 있었어. 엄마 아빠만 휴가를 즐기겠다고 비행기 타고 날아왔는데도 씩씩하게 승단시험을 준비하며 밝게 웃어주는 유주가 사무쳤어. 그래서 내 컨디션이 이렇게 저조했을까? 앞으로는 절대 유주 빼고 여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어떤 이유에서든 유주는 양보하지 않으려구.

 남편 덕분에 내가 괌을 경험했어. 에메랄드빛 바다를 두 눈에 담지는 못했어도, 단박에 뛰어들고 싶게 포근해 보이는 흰 구름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지는 못했어도, 그 곳의 바람, 소리, 짠맛을 기억할거야.

 남편이 멋진 해변을 배경으로 내 뒷모습을 찍어줬어. 요즘 사진 찍는 게 트렌드라며 손도 올려 보라고 하고 주문이 많으시더구만. 어색하게 피사체가 되었는데, 그 사진을 남편이 친정 가족 카톡방에 올린거야. 동생들이 나보고 해변의 여인이라며 신속한 댓글을 달아 주었지. 한 컷의 사진으로도 괌의 바다와 하늘빛이 예뻐 보인다고 했어. 그 곳에 직접 다녀왔어도 나는 알 수 없는 그림이었지만, 사진 속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어. 귀국하는 날, 렌트카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건 비치 해변에 앉아 가만히 바다 소리를 들었어. 따가운 햇살이 우리 이마를 달구었지. 빗방울이 떨어지다가도 금세 햇빛이 비치는 괌은 참으로 평화로웠어.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연인의 머리카락을 묶어 한 날 한 시에 목숨을 버렸다는 사랑의 절벽에서는 돌풍이 불었지남편과 내 머리카락을 묶고 그 절벽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내게는 있을까 생각해 봤어. 소리없이 사과했지. "여보, 미안해!" 남편은 두 연인이 머리카락을 묶은 이유가 혼자만 죽을까봐 그랬을 거라면서 깔깔거렸어.

 랜트카를 반납하고 출국 심사를 받았어. 장애인이라서 우대 받을 수 있었지. 장애인이라서 더 오래 기다렸어야 했다면 차별이라며 예민하게 분노했을거야. 거꾸로 우대 받는 것에는 감사의 농도가 분노만큼 짙은 것 같지 않더라구. 감사를 분노처럼 해야겠다고 다짐했어. 불같은 감사는 내 운명을 바꿔줄 테니까. 학교 도서관에서 챙겨온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점자책이 여행 중 나의 공백을 밀도있게 메워 주었어. 공항에서 대기하는 짧지 않은 시간이 독서로 갈무리되었지. 4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도 점자책 덕분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비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겨울 옷을 덧입었어. 무안에 내리니까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약 다섯 시간 만에 여름과 겨울을 오간 거야. 유주와 통화하며 차를 달렸어. 치킨을 한 마리 포장해서 9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지. 유주가 식탁 위에 엄마 아빠 좋아하는 간식을 차려 놓고 우리를 맞아 주었어. 1주일 동안 꼬박 손녀딸 메니저 노릇을 해 주신 친정어머니도 밝은 웃음으로 반겨 주셨지.

  "성은아, 넌 참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불같은 감사 잊지 말고 유주 웃음이 있는 일상으로 다시 힘차게 복귀하는거야. 누구인들 세상살이가 녹록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니? 눈을 떴든 감았든, 돈이 많든 아니든 사는 건 오롯이 각자 의지에 달려 있는 거라고 난 생각해. 행복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택하는 거라고. 성은아, 우리 행복하자. 실컷 사랑하고 많이 웃고, 필요 이상 해석하지 않으면 의외로 간단할 수 있을지 몰라. 너의 유연성 단련에 이번 괌 여행이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응원할게. 불같은 감사 약속할게. 건강하렴."

 

                                                                                  (2020.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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