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난로 앞에서

2020.02.09 13:01

윤근택 조회 수:8

나무난로 앞에서

                     -아흔 한 번째, 아흔 두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91.

  조손은 또 다시 나무난롯가.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도 봄을 무척 기다리나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다란 유리창 창턱에 기대서서 저기 註1)선의산(仙義山)을 내다보며 말한다.

  “한아버지, 저 능선을 한번 봐. 능선에 늘어선 나무들이 마치 백마(白馬)의 갈기같애.”

  녀석은 잔설(殘雪)로 말미암아 산은 백마처럼 보이고, 그 능선에 늘어선 참나무류의 낙엽활엽수들은 어우러져 말의 갈기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새끼인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으뜸아, 정말 그런 거 같구나. 내가 보기에도 저 능선의 나무들은 말의 갈기 같은 걸! 또,참빗의 살처럼 까칠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녀석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또 말을 이어간다.

  “한아버지, 저 능선의 나무들은 참으로 춥겠다? 우리와 달리, 난로도 없고... .”

  이 할애비는 문득 애국가 제2절이 떠올라 부르게 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그러자 녀석도 그 제2절을 다시 부르자고 제의한다. 녀석이 애국가를 제4절까지 언제 다 익힌 것인지... .

  하더라도, 그 노랫말을 지은 분한테는 다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내 귀여운 외손주녀석한테만은 다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으뜸아, 애국가 제2절에서 말한 대로 ,‘바람이나 서리’가 되었든,‘바람서리’ 즉 ‘ 폭풍우로 인하여 농업이나 어업 등이 피해를 입는 일’이 되었든, ‘바람등쌀’이 되었든, ‘여럿 가운데 사이’를 일컫는 ‘서리’ ‘바람 서리(사이)’가 되었든 그러한 환경에서도 불변하게 기상을 지닌 게 소나무만은 아니란다. 또 그렇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오히려 웃자란 소나무는 저 선의산 능선에 설 수도 없는 걸!”

  이 말을 듣고 있던 녀석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으뜸아, 그게 말이다. 그게 말이다. 한라산 높이 ‘한번 구경 오십이오(1,950미터)’, 백두산 높이 ‘이질사사[2,744미터; 시골 내 백시(伯氏)의 일반전화 뒷 번호와 동일함.)’. 그 높은 산꼭대기에는 키 큰 소나무 따위의 나무가 없는 걸! 왜? 그야말로 ‘바람등쌀’에 살아남을 수 없기에 그러하지. 대신, 그러한 산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차츰 키 작은 나무들이 무리지어 산다? 높이 올라갈수록 아예 ‘나 죽었소!’하면서 몸을 낮추고 산다? ”

  이 할애비의 강의가(?) 이어지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한아버지, 으뜸이는 무슨 뜻인지 금세 알겠다? 굳이 ‘나 잘 났소!’ 하지 않더라고 높은 산봉우리에 선 나무는, 그 산 높이만큼 키를 따먹고 들어가니, 그 산에서 가장 키 큰 나무가 되잖아.”

  참말로, 녀석은 대단히 영리한 아이다. 신명이 난 이 할애비는 ‘생태종(生態種)’의 개념과 더불어 그에 해당하는 몇몇 나무를 알려준다.

  생태종이란, 같은 종(種)에 속하나, 사는 곳에 따라 다른 형태나 성질을 가지며 그 특징이 유전적으로 굳어지는 무리를 일컫는다. 사는 장소의 환경조건에 적응되나, 종 분화에까지 이르지 않으며 교배가 가능하다. 향나무 가운데에는 ‘누운 향나무’, 주목 가운데에는 ‘누운 주목’이 바로 생태종에 해당한다. 설령, 이들을 환경조건이 좋은 곳에 옮겨 심어도 바로 서지 않는다. 한라산을 비롯한 북한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진달래과의 ‘들쭉나무’도 일종의 생태종이라고 할 수 있겠고, 땅거죽에 기다시피하며 자란다. 들쭉나무 열매로 빚은 ‘들쭉술’은 북한당국이 자랑하는 술.

  영리한 나의 외손주녀석은 이번에도 나름대로 오늘의 노변담화를 요점정리(?)한다.

  “누구든지 자기 잘 났다고 뻐기면 다친다? 화살이나 총탄이 마구 날아 올 적에는 ‘마카 다 수그리(‘모두 다 수그려라.’라의 경상도 사투리.).”

  이 할애비는 한바탕 호방하게 웃어젖히고, 녀석한테 질문을 하나 던진다.

  “으뜸아, 어른들이 이런 말씀도 하시곤 했어. ‘콩나물시루에서 버르장머리 없는 콩나물은 누워서도 잘 자란다.’하고서. 이 말은 또 어떻게 생각해?”

  그러자 녀석이 그 답을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고 하고 한마디 한다.

  “한아버지, 에이, 잘 나가다가 웬 일?”

  머쓱해진 나는 불문[火門]을 열어 장작개비 하나를 더 넣는다.

 

  작가의 말)

의자에 꼿꼿 앉아 키보드를 치자니, 손과 발이 시려 도저히 ... . 해서, 제 92화는 요 다음에 이어가기로 한다.

 

註1)선의산(仙義山)

  내 ‘만돌이농장’이 자리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와 청도군 매전면 두곡리의 경계인 산. 해발고도 756미터이며 이름난 산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정상의 암석이 평탄하고 넓어 말의 안장과 같다고 하여 ‘마안산(馬鞍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늘 내 외손주녀석은 그 ‘말의 안장’을 생각하여 산 능선 광경을‘백마와 갈기’를 떠올렸을까?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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