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죽과 수세미

2020.03.26 19:14

김성은 조회 수:5

잣죽과 수세미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돈 쓰고, 시간 쓰고, 정성 쏟아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었다. 야심차게 도전한 토마토 소스 야채 떡볶이였지만, 시간 조절을 못한 탓에 다 태우고 말았다. 내가 먹어봐도 맛이 없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외식이 불안해진 요즘 어린 딸 유주에게 세 끼 메뉴를 채워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물론 친정 어머니와 남편이 가사의 대부분을 책임져 주시지만, 스스로가 짊어지고 있는 요리에 대한 동경과 가책은 송곳처럼 내 마음을 들쑤신다. 친정 어머니가 아프셨다. 가족 모두가 함께 식사를 했는데 어머니만 탈이 났고, 밤새 설사로 고생하셨다. 경기도에 사는 동생들은 달려와 보지도 못한 채 동동거리며 온라인으로 죽을 배달시켰다. 이웃 동에 앓아 누우신 엄마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친정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 상태가 어떠신지 여쭈려고 했건만, 아빠 목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며칠 전부터 몸살 기운이 있다고 하시더니만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허약 체질인 아빠 역시 침대에 누워 계신다는 걸 알고 나니까 힘이 쭉 빠졌다. 당장 동생이 보낸 죽을 받아 드실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번에도 엄마는 혼자 병원에 가셨다. 부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당신 몸 가까스로 가누며, 이를 악물고 병원에 다녀오셨을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지척에 살면서도 민첩하게 부모님 수발을 들 수 없어 속이 상했다.

 

 소고기 다진 것을 볶아서 ‘밥이랑’ 제품과 버무려 주먹밥을 만들었다. 고맙게도 솜씨 없는 내 밥을 유주는 제법 잘 먹었다. 올리고당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본의 아니게 탕후루 떡볶이를 만들어 버린 엄마의 만행을 유주는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별 기대가 없는 것 같았다. 딸아이를 재우고 설거지를 했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궁리 끝에 흰죽을 쑤기로 마음 먹고 유튜브를 검색했다. 눌어 붙지 않게 주걱으로 살살 저어주면서 밥과 물의 비율을 13으로 하여 끓이라고 되어 있었다. 부끄럽게도 이제껏 나는 가족들이 아플 때마다 유명 죽집에서 손쉽게 죽을 사다 주는 정도로만 정을 표했다. 워낙 솜씨가 없으니 부엌에서 일을 벌리는 것 자체가 번번이 민폐였고, 식재료만 아까웠다. 생쌀을 불렸다가 죽을 쑤어도 되는 것을 모르고 유튜브에서 소개된대로 밥을 지어 끓이기 시작했다. 30분만 해도 충분할 것을 주걱을 꽉 쥔 채 한 시간이나 끓였다.

 마침 출근하는 날이라서 마음이 바빴고, 단잠에 취해 있는 유주를 흔들어 깨웠다. 야근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아빠가 들어올 때까지 30여 분 정도 아이 혼자 집에 있어야 했으므로 당부 사항이 많았다. 사과를 깎아서 아이 손에 쥐어 주고 집을 나섰다. 뜨거운 죽냄비를 조심스럽게 싸서 엄마 집에 들렀다. 활동보조 선생님이 웬 냄비냐며 의아해 하셨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냄비를 엄마집 현관 앞에 올려 놓았다.

 

  카톡을 확인한 엄마가 죽 잘 드셨다면서 고맙다고 하셨다.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지만 애써 밝은 톤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요령이 없으니 영양죽도 아니고 고작 흰죽을 끓인 것뿐인데, 동생들까지 고생했다며 내 빈곤한 정성을 치켜세웠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초등학생 모양으로 칭찬을 받으니 얼굴이 뜨거웠지만 도리는 한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고 퇴근 시간이 되어 다시 활동보조 선생님을 만났다. 조수석에 오르는 내게 선생님이 불쑥 보온병 하나를 건네셨다.

 “내가 집에서 잣죽 좀 쑤어봤어요. 어머니 입에 맞으셔야 할 텐데 간이 맞으려나 모르겠어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멍먹했고, 아픈 내 어머니를 위해 누군가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했다. 평생 비빌 언덕이 되어 주시는 어머니께 나는 그러지 못해서 무거웠던 마음에 한 줄기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 골몰하느라 차 안이 고요해졌다.

 별 것 아니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지만, 얘기를 들은 동생들도 촉촉한 감사를 표했다. 아침은 흰죽, 저녁은 잣죽을 드신 어머니는 다행히 기운을 회복하셨다.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어머니가 병원에 다녀오시는 길에 털실을 사오셨다고 했다. 출근하는 내게 어머니는 당신이 직접 뜨신 수세미를 색깔별로 세 개를 챙겨 주셨다. 한 코 한 코 정성을 담아 두 겹으로 뜨신 감사의 징표였다. 수세미를 받으신 활동보조 선생님은 기분 좋은 웃음으로 “잘 쓰겠습니다.” 하셨다. 선생님의 깨끗한 선의는 의기소침해진 내 마음의 주름을 뜨끈한 다리미처럼 말끔하게 제거해 주셨다. 이 참에 고소한 잣죽 쑤는 법을 배워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은 단 1초도 싫다. 똑똑히 배워두리라. 아픈 사람들은 입맛에도 힘이 빠져 나의 형편없는 요리 실력을 탓할 기력이 없을 것이고, 뭐든 죽사발 만드는 재주가 뛰어난 내가 조심스럽게 도전해 볼만 한 메뉴로 죽은 안성맞춤이 아닌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온기가 있다. 선생님의 잣죽이나 어머니의 수세미는 서로에게 깊은 파동으로 남아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이 되리라. 아름다운 관계 안에서 당신이, 내가, 우리가 더불어 정결하게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20.03.27.)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67 창 그리고 방패 최정순 2020.03.27 16
1366 판사의 명판결 두루미 2020.03.27 3
1365 승강기 앞의 허탈감 한성덕 2020.03.27 56
» 잣죽과 수세미 김성은 2020.03.26 5
1363 잔전거와 붕어빵 김미선 2020.03.26 17
1362 오뚝이 인생 두루미 2020.03.26 57
1361 삼라만상을 두루 적시는 남고모종 김정길 2020.03.26 2
1360 자식에게 전해주고 싶은 7가지 이야기 두루미 2020.03.26 48
1359 지구촌의 아름답고 신선한 호수들 두루미 2020.03.25 36
1358 오복의 으뜸, 이빨 이우철 2020.03.25 34
1357 그땐 그랬었지 박제철 2020.03.25 20
1356 언제나 당신 편 두루미 2020.03.25 6
1355 고도원의 아침편지 [1] 고도원 2020.03.25 22
1354 얼굴없는 괴물, 코로나19 김금례 2020.03.24 37
1353 꽃베고니아 백승훈 2020.03.24 11
1352 부장님의 마스크 두루미 2020.03.23 56
1351 때늦은 후회 최정순 2020.03.23 22
1350 마스크를 사면서 한일신 2020.03.22 51
1349 바람의 가위질 한성덕 2020.03.22 36
1348 '코로라19'도 지나가리라 이우철 2020.03.22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