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기 앞의 허탈감

2020.03.27 18:47

한성덕 조회 수:2

승강기 앞의 허탈감

                                                                     한성덕

 

 

 

 

  무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출석하던시 교회 목사님의 연세가 많으셨다. 그 당시만 해도 70세 은퇴제도가 없었다. 그 교회 사모님이, 주현선(김일석, 한성덕, 조운섭의 애칭)이라 부르는 우리 단짝친구들 셋과, 1년 후배 여학생들 대여섯 명을 엄청 예뻐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30여 명의 학생회를 이끌어가는 핵심 멤버들이요, 70여 명의 교인들 중에서 대들보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주에서 텔레비전을 처음 보았다. 뒷동산 향로봉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선을 끌어오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노력한 만큼 화질이 좋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야말로 비 내리는 호남선이었다. 흑백화면에서 나는 지지지 소리, 상하좌우로 춤추는 그림, 빗속(?)에서 겨우 보이는 형체, 사람들은 그것도 난리였다. 어쩌다 바람이 심하면 지지지 끓는 소리, 비 내리는 화면, 흔들림 현상은 더 요동쳐 화면이 엉망이었다. 아예 볼 수가 없어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도 망부석처럼 ‘그러려니’하고 눈을 부라리며 꾹꾹 참았다. 그토록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이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가 1969년이었으니 그 세월도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빨리빨리 안하면 요절난다.

  안테나는 산 정상과 텔레비전 근처에도 있었다. 방향을 잡는다고 안테나를 요리조리 움직이는 게 볼 만했다. 밖에 있는 사람이 안테나 기둥을 좌우로 돌리면, 중간사람은 화면을 보면서 ‘좌로, 우로’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마음껏 볼 수 있었던 곳은 큰길가의 대형문방구였는데 언제든지 개방했다. 지금처럼 공원이나 문화시설, 체육시설이나 운동기구, 또는 잘 만들어진 둘레길이 있었던가? 학원은커녕, 설령 있었더라도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의 유일한 낙은 오직 교회였다. 사춘기의 탈선을 막아주고, 여학생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며,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다. 그래서 교회를 우리 집으로 여기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사모님께서 우리를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사모님은 종종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주셨다 그때마다 우리는 간장까지 다 먹어치웠다. 내 삶에서 음식을 가장 배부르게 먹었던 때였다. 저속한 표현을 쓰자면 게걸스럽게 먹었다. 우리 셋은 죽음도 불사할 만큼 정이 깊은 친구들이었다. 허나 먹을 것 앞에서만큼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떠박지르고 입에 한 술 더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가난이 남겨준 비운의 청소년이었다. 간간이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흥건해진다. 암튼, 사모님에게 가서야 허기진 배를 채웠다. 철이 들었다. ‘사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했을 때는 이미 사모님이 천국에 가셨다. 때때로 그 사모님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지난(至難)한 세월이 허탈감을 부추겼나? 특히, 승강기 앞에서의 그런 느낌이 강하다. 승강기를 타려고 한두 발 앞까지 왔는데 쑥~ 올라갈 때의 허탈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다. 한 층 두 층 올라가는 승강기를 멀건이 쳐다볼 뿐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을 재보니 15층까지 올라갔다 와도 기껏해야 3분이 채 안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허탈감을 느낀다. 청소년 때,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난 뒤의 허탈감이 내 안에 스며들었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허탈감이 승강기 앞에서만 반짝하고 사라진다. 지속되면 어떻게 살까?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 어쩌면 나만의 생뚱맞은 허탈감인지도 모른다.

 

  허탈감(虛脫感)이란, 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무엇을 잃어버린 듯 정신이 멍해진 상태나 느낌을 말한다. 요즘이 그렇다. ‘코로나19’와 허세부리는 정치가 나를 허탈감에 빠뜨린다. 그 허탈감이 승강기 앞에서 반짝하고 지나가듯이, 어서 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자봄은 꼭 올 테니까.

                                                  (2020. 3.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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