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천자

2020.04.04 14:49

최상섭 조회 수:2

풀꽃 천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직 금요반 최 상 섭

 

 

  바람이 가르는 길을 따라 나서면 어느샌가 봄이 성큼 다가와 온 세상이 초록의 물결로 변한다. 그 풀꽃 천지에서 새로운 환희를 맛보게 된다. 메주 곰팡이 같이 찌든 겨울날들의 낡은 사고가 알에서 깨어나는 심정으로 세심하려는 마음이 크다. 하루같이 변하는 세상은 남녘 화신의 꽃향기로 가득하다.

 

 이렇게 초록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날에는 보리밭이며 들길을 무작정 걷고 싶은 충동으로 15세 소년의 설렘으로 돌아가게 된다. 목련은 희디흰 옥양목 같은 순정을 하늘에 대고 하소연하는지 아니면 겨우내 인고한 설움을 울분으로 토로하는지 그 자태가 심상치 않다. 어디를 가나 벚꽃길 천 리의 향기가 온몸으로 스미어드는 4월의 길가엔 꽃바람 향기가 가득하다. 눈을 들어 거울처럼 맑은 호수를 보면 철 잃은 후조들이 한가하고 시절과 그리움이 여울지는 그곳에는 추억 한 자락이 떠 있어 가슴에 남는다.

 

 나는 아무 이상이나 꿈도 없이 그저 푸르기만 한 들길이 좋아 그 길에 들어서면 참으로 반가운 봄날의 진객들을 만나게 된다. 은하수 꽃길을 깔아놓은 봄까치꽃의 자태는 정녕 아기별꽃들을 만나는 기쁨이나 같다. 저렇게 예쁘고 여린 꽃을 속인들이 개불알꽃이라 불렀다니 그들의 안목이 의심스럽다. 정말 보라색의 순정을 보는 것 같다. 저렇게 청아한 풀꽃이 또 있을까 하고 가까이서 보면 여린 애증이 넘친다. 나는 혼자 속으로 오래도록 이 꽃을 가슴에 품어두려 다짐을 한다. 몇 발자국 지나면 이제는 긴병꽃풀이 떼로 피어서 주위를 압도하고 있다. 온통 키 자랑을 하듯 한 몸 되어 피어 있는 이 꽃을 어떤 이는 장구채나물이라 말하지만 그 꽃과는 다르다. 어디를 가나 이 꽃은 한결같이 가족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꽃이다. 하나둘이 아닌 수백 개의 풀꽃이 저마다의 기세를 내세우듯 무리지어 핀 모습이 가관이다. 어디 그뿐인가? 강언덕이거나 밭을 이루는 언덕에 붉은 양탄자를 깔아놓고 지나가는 흰 구름을 꼬이려 미소짓고 있는 꽃은 광대나물이다. 온통 붉은색의 여리디여린 저 꽃덤불 속에서 철새가 구애를 한다.

 “밟지 마세요. 아파요.

 가던 길을 막는 꽃이 벼룩나물이다. 세상에 제일 작은 꽃을 피우고 마디마다 넝쿨로 무리 지어 논두렁 밭두렁을 메우는 꽃이 벼룩나물이다. 이렇게 파랗게 논두렁 밭두렁을 지키는 꽃이니 또한 고맙지 아니한가? 우리 선조들은 나물로 묻혀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이름 뒤에 무슨 무슨 나물을 붙였다. 무슨 나물 하는 풀잎들은 다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나가는 산들바람도 살가운 들길은 온통 신천지의 풀꽃들로 가득하여 그야말로 온 동네가 풀꽃 대궐이다. 이렇게 푸르름이 넘치는 계절에 먼 길 떠나간 친구는 왜 돌아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큰맘 먹고 편지를 써야겠다. 풀꽃 추억도 더듬어 쓰고, 초록 보리밭의 종다리며 개나리 담장을 넘어 휘파람 불던 날의 기억도 생생하게 적을 판이다.

 

 봄날은 이렇게 온통 초록의 바다로 파랗게 밀려와 따갑지 않은 봄볕과 살가운 바람으로 그리고 환희 넘치는 풀꽃들로 천지를 이루어 우리 마음도 기쁨 가득한 풀꽃 세상이 될 것이다.

                                                                              (2020.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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